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86화 (86/259)

[86화]

“으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상황을 정리하도록 말이죠. 그러니까 먼저 황녀 전하, 어째서 저를 동아리에 들이시려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야 유능한 인재를 데려오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죠.”

“황녀 전하께 죄송하지만, 이 친구는 저희가 먼저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케드론이 적절하게 끼어들어서 황녀의 의견을 차단하려고 했지만, 황녀는 베오날드를 보는 시선과 완전히 다른 눈빛으로 케드론을 노려보았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베오날드를 볼 때의 눈빛이 간절했던 것과 다르게 케드론을 보는 시선은 마치 증오하는 적을 보는 듯한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뭐야, 평소랑 다르게 오늘은 알기 쉬워. 표정과 기척 관리를 엄청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곤란한 상황이군. 근데 이건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인데…….’

“…아무리 그래도 저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베오날드, 저쪽에서 어떤 조건을 내밀었나요? 저희 ‘검과 방패’ 쪽으로…….”

‘이게 무슨 일이지? 근데 내가 황녀의 호감을 이렇게까지 올렸던 일이 있었나?’

어울릴 때는 계속해서 무뚝뚝하고 서로를 재는 것 같은 대화를 했을 뿐이고, 베오날드도 딱히 그녀의 호감을 사려고 특별한 행동을 한 게 없이 그저 ‘평범하게’ 대응했을 뿐이다.

한데 젤시 황녀는 마치 어린애가 꼭 사고 싶은 인형을 보는 듯한 억지와 간절함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시면 황실에 납품되는 군마 한 필과 갑주 한 벌, 검, 창, 철퇴를 패키지로 선사하겠습니다.”

“잠깐! 황녀 전하, 아무리 그래도 물건으로 낚는 건 비겁하지 않습니까?”

“재정도 엄연히 전략의 일부입니다!”

‘…이 황녀, 갑자기 지능이 낮아져 버린 건가? 아니면… 아! 황제인가?’

젤시 황녀의 심경에 대해서 전혀 파악하지 못한 베오날드로선 그녀가 이렇게 구는 이유를 그 벨릭스 같은 황제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저 황녀가 이렇게 들이댈 리 없을 것이고, 황제의 입김이 들어갔다면 이유를 생각하기에 너무나 쉬웠다.

‘과연, 위험한 적일수록 가까이 둔다, 라는 게 이 경우인가? 나는 머리 쓸 일이 많아서 그런 거 절대 못하는데 말이지. 난 내 정원에 아름다운 것들만 두고 싶다고!’

베오날드는 과거에 들은 내용을 생각하며 그녀가 자신에게 갑자기 집착하는 이유가 황제가 개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대처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정답은 역시 케드론을 따라서 ‘검의 정원’ 동아리에 드는 것.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발데리안 가문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고, 잘못하면 여름 방학 때 케르웰이 남긴 유산을 해독한다는 약속이 없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으음,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거절하기가 난감한데 말이지…….’

벨릭스와 같은 막장 부모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 거기에 저번 만남 때와 다른 간절한 태도가 베오날드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전생에 수많은 부인을 둬서 웬만한 미인에는 익숙한 베오날드조차 놀랄 만한 미소녀인 점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점은 전생의 자신처럼 막장 부친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빠야, 아버지가… 무서워.’

‘형, 나… 내일 죽는대…….’

‘죽기 싫어. 죽기 싫어요. 제발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 더 잘할 수 있어요.’

어린 시절, 부친 벨릭스 폰 노이멀의 막장스러운 후계자 생산 계획으로 인해서 베오날드는 수많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고, 잔혹한 수업과 경쟁에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당시 어린 베오날드에게도 연민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에 결국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쓸모없다며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서로에 의해 죽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었다.

‘하아~ 이건 거부 못하겠네.’

사람이 하루아침에 망가지기란 쉽지 않았다.

충격으로 인해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낫기 전에 계속해서 부딪치고 또 부딪치면서 서서히 그 균열이 벌어지는데, 혼자서 이겨 내지 못하면 결국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 사람들은 대부분 작은 균열일 때 심각함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더 이상 고칠 수 없을 때가 돼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베오날드는 그렇게 부서진 형제자매들을 많이 보았기에 알 수 있었고, 그래서 황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러면~ 어쩔 수가 없네요. 황녀 전하 쪽으로 가도록 하죠.”

“정말요?”

‘내가 스스로 어리석은 선택을 할 줄이야. 하지만… 어떠랴. 저 기뻐하는 미소를 기억 속에 담아 두고 참아야지.’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인 소녀가 기뻐하며 웃음 짓는 표정은 특별한 것이리라.

친부모들도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테니 아마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보물일 터였다.

다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는 케드론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가 문제였는데, 베오날드는 일단 그에게 슬쩍 눈치를 주며 마치 비밀 사인을 보내는 것처럼 설득해 보았지만 역시 발데리안 가문의 혈통이라서 그런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크윽! 결국 네놈은 속물이었던 거냐?”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이해해 주시길. 그래도 기존에 한 계약은 철저히 지킬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다. 그래, 어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

‘…조카님, 미안해.’

결국 케드론은 분하다는 듯 그 자리를 떠났고, 남은 건 베오날드와 젤시 황녀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선택해 준 것이 기쁜지 눈빛에 기쁨의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다.

베오날드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한 게 없는데 이 정도로 기뻐하니 그 망할 황제가 사람을 얼마나 들볶았으면 이럴까? 하는 오해를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대가가 마음에 끌리긴 했습니다. 크흠! 이래 봬도 집을 나온 어중간한 귀족이라서 돈이 궁하긴 했거든요. 예, 이래서 아마 ‘기사 자격’이 없는 속물일 겁니다. 실망하셨죠?”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저희 ‘검과 방패’ 동아리로 가죠. 추천인인 제가, 가입 절차를 밟고 약속한 군마와 갑주와 무기들도 맞추러 가야 하니까요.”

‘아무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 500년을 거쳐서야… 이런 기회가 생길 줄이야. 후우~’

황녀의 아주 작은 미소에 씁쓸하던 마음이 조금은 씻어 내려가는 기분이 든 베오날드였다.

그녀를 따라 아카데미 여기저기를 지나서 도착한 곳은 어느 건물이었는데, 이 정도면 하나의 대저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여러 동아리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건물 입구에 ‘검과 방패’라고 적힌 판과 문양을 봤을 때 이 건물 하나를 통째로 그들이 쓰는 것 같았다.

“기합이 부족해! 빨랑빨랑 움직여라! 그래서야 어디 적을 쓰러뜨리겠나?”

“검과 방패의 명예는 우리 기사들만 지는 게 아니다. 종자 후보가 될 너희도 기사의 명예를 일부 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그냥 아카데미 안에 따로 합동 군사 훈련 시설을 별도로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군. 난세라서 만들어진 건가?’

자세히 보니 한쪽 구석엔 연병장도 가지고 있었고, 말을 키우는 마구간, 대련을 할 수 있는 대련장, 훈련을 하는 기사 학부 학생과 그들을 보조하는 종자나 시동을 가르치는 자들도 있었다.

베오날드의 말대로 이 정도면 아카데미 안에 있는 동아리가 아니라, 수업 후 황실의 허가를 받고 같이 군사 훈련을 하는 집단이나 다름없었다.

‘음, 황족이 배치되어 있을 만하군.’

“어떠신지요?”

오는 길에 침착해졌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한 건지 다시 무뚝뚝 모드로 돌아온 황녀가 차분한 어조로 베오날드에게 감상을 물었다.

“예, 놀랐네요. 동아리… 라고 할 수 없는 것이군요. 그런데 아까 케드론 선배님이 했던 말을 생각하면 이런 게 하나 더 있다는 거죠?”

“맞아요. ‘검의 정원’ 동아리도 비슷하게 갖추고 있어요.”

“파벌 귀족분들의 기부와 투자가… 장난이 아닌가 보군요. 그리고… 나뉜 파벌은 이제 여기 상황을 보고 군사력을 가늠하거나 서로 파벌 속 귀족들의 전력을 파악하거나 하고, 경쟁까지 해서 더욱 발전하는 것까지 여러 의도가 잘 어우러진 시스템이군요.”

“단번에 거기까지 눈치채다니, 역시 대단하군요.”

동아리의 의도를 아카데미의 영역에서 멈추지 않고 국가 단위로 어떻게 사용하는지 간파한 베오날드의 통찰에 감탄한 젤시 황녀였다.

그리고 둘은 동아리 건물로 들어간 다음 곧장 계단을 올라서 동아리의 회장실로 향했다.

“여기서 이제 가입서와 제 추천서를 작성하면 가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장이 승인하면 되는 거죠.”

“황녀 전하께서 동아리 회장이 아니십니까?”

“예.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기사 동아리의 회장은 역시 3학년 중 가장 강하고 명망이 있는 기사가 맡는 게 정상이니까요.”

‘하긴 황녀는 황녀지, 기사가 아니지. 서임을 받지 않았으니 말이야. 회장을 다른 사람이 맡는 건 당연한 일이군.’

회장의 방은 역시 기사 동아리인 만큼 손님맞이를 위한 의자와 탁자를 제외하고는 꽤 살벌한 모양새였다.

벽 한 면엔 각종 무기와 갑옷들이 있었고, 반대쪽 면에는 그나마 동아리다운 상장과 상패, 트로피들이 놓여 있어서 볼만했다가 몬스터의 머리 박제가 주르륵 있는 걸 봐선 동아리 방이 아니라 무슨 로그나 모험가 길드 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다.

“오, 황녀 전하, 오셨습니까? 이번 시험은 어떠셨는지요?”

그리고 들려오는 한 사내의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거기엔 깔끔하게 정리된 황갈색 머리칼에 강렬한 눈빛, 이미 기사로서 전장을 거친 것 같은 냄새를 풍기는 사내가 황녀에게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자가 ‘검과 방패’의 회장일 것이라 예상한 베오날드는 좀 더 파악하기 위해 둘의 대화를 듣기로 했다.

“그럭저럭 잘 본 것 같습니다.”

“하하하, 겸손도 하셔라. 늘 학원 수석과 차석을 겨루시면서 그럭저럭이라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럭저럭도 되지 못한답니다. 그나저나 저 친구는?”

“신입입니다. 제 추천이죠. 소문으로 들어서 아실 겁니다. 그 레파르트 경의 추천을 받아서 입학한 학생.”

“으으음… 그렇습니까?”

황녀를 바라보는 눈빛과는 전혀 다른 경계심과 적대감을 가득 담은 눈빛을 베오날드에게 뿜어내는 회장이었다.

이 정도는 베오날드도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베오날드도 놀랄 정도의 미소녀에 다양한 재능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황녀. 집안 세력이 좀 있는 귀족 남성들은 모두 노리고 있을 터인데, 갑자기 그녀가 추천하는 ‘남성’ 기사가 나타났다면 경계는 물론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대놓고 눈으로 말하고 있군. 꺼져, 라는 말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들려오는군.’

“…하지만 저희 동아리엔 아무나 가입시킬 수 없는 건 아시죠?”

“예. 하지만 황실 기사 레파르트 경의 추천, 발데리안 가문의 케드론 경도 노리는 인재, 엄연히 대의회에 참석 자격이 있는 캘러메인 가문의 혈통에다 제 추천까지.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요.”

모든 조건이 다 있어도 황녀 자신의 추천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을 절대 눈치채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결국 눈치 못 챈 그녀 대신 베오날드와 회장은 서로 눈빛을 통해서 수컷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분노와 살기를 내뿜는 회장과 그것을 태연하게 받으면서 어쩔 거냐는 듯 눈으로 묻는 베오날드의 공방이었다.

‘당장 꺼져라. 죽고 싶지 않으면?’

‘…아, 대놓고 황녀를 노리는 녀석이구나. 젊을 땐 뭐… 다 저렇지. 근데 나도 케드론 녀석의 제안도 거절했고, 신경 쓰여서 빠질 수 없는 처지인데 말이지.’

‘…말로 해선 안 되나 보군. 주제도 모르는 놈 같으니!’

그리고 잠시 후, 서로의 눈빛을 통한 교섭이 결렬됐다는 걸 알아챈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베오날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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