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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85화 (85/259)

[85화]

그렇게 살벌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베오날드 일행은 친절하게 황실에서 마련해 준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황성에 남은 건 이제 젤시 황녀뿐. 그녀는 사실은 베오날드와 더 대화하고 싶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방에서 창밖을 보며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을 달래는 시간도 오래가지 못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황녀 전하, 저희입니다.”

“무슨 일이죠?”

“폐하의 명으로 ‘측정’을 하러 왔사옵니다.”

“들어오세요.”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아무 반응 없이 승낙하는 젤시 황녀. 곧바로 문이 열리고 10명 정도의 메이드들이 몰려와서 그녀의 옷을 벗기고 오늘의 상태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키, 체중, 가슴둘레, 허리둘레를 비롯한 사이즈 및 건강 상태를 아주 꼼꼼하게 체크해서 적었다.

그리고 메이드장으로 보이는 늙은 여성은 마치 엄격한 품질 검사를 하듯 인상을 찌푸린 채 그 수치들을 살펴보았다.

“체중이 500그램 느셨군요.”

“식사 후 아직 예정된 저녁 운동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빼고 주무시길 바랍니다. 황녀 전하께선 제국의 소중한 존재이니까요. 그리고 아카데미의 과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젤시 황녀는 이런 일이 일상이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면서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손길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이런 물건 취급은 이미 어릴 때부터 받아 온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녀이지만 결국 황가(皇家)를 위한 ‘상품’이나 마찬가지. 대귀족이나 공훈을 세운 장군 혹은 기사에게 하사하는 물건, 그렇기에 엄격한 관리를 통해서 ‘상품 가치’를 유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로부터 전언이 있습니다. 당분간 계속해서 그 베오날드라는 자에게 접근해서 감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알았습니다. 다만 곧 중간고사이기에 그 일은 시험을 치르고 난 뒤에 하겠다고 전하십시오.”

“예.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측정’이 끝나고 사람들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젤시 황녀는 아주 조그맣게 주먹을 쥐면서 속으로 즐거워했다.

목적이 어떻든 간에 베오날드를 또 만날 명분이 생긴 데다, 그와 정상적인 수준의 대화와 교우를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녀에겐 지금 삶에서 오아시스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메이드장의 지시대로 500그램 체중을 빼기 위해 검을 들고 수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칼레움 제국의 황제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오늘 자로 올라온 딸아이의 신체 수치표를 읽으면서 메이드장에게 물었다.

“음, 역시 조금 쪘군. 처리하고 자라고 전하는 거 잊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명하신 대로 젤시 황녀 전하의 신체 및 미모는 계속 관리해 나갈 것입니다.”

“좋아. 그리고 내 전언을 들었을 때 그 아이의 반응은?”

“늘 그렇듯 아무 반응 없었습니다.”

“그런가? 그건 다행이군. 혹시나 했는데, 이상한 애정이나 호감을 가지는 기미는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래서 그동안 철저히 교육시키고 감시하지 않았습니까?”

“암,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이야. 가장 비싸게 팔아야 하는 상품인데, 팔기 전에 웬 놈팡이에게 상처 입으면 곤란하잖나.”

황녀가 기사나 귀족과 눈이 맞아서 도망가는 스토리는 비단 서민들의 입소문이나 음유시인의 노래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황제는 철저히 감시해야만 했다.

젤시는 특히나 외모, 지성, 재능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데다 이제 혼인하기 적절한 연령에 들어섰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값어치가 무지막지하게 오르고 있었다.

“젤시 황녀 전하 앞으로 온 혼담이 무려 나라를 안 가리고, 스물을 넘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네 말이 맞다. 허허허, 잘 키운 딸 하나가 열 기사 안 부러운 게 이런 경우지.”

황가와 인연을 맺는 것도 있겠지만, 경국에 달하는 미모와 각종 재능을 겸하고 있어서, 특히나 좋은 자질을 가진 후손을 낳으려는 무가(武家)나 마법사 집안에서는 특히나 오러까지 깨우친 젤시를 엄청 노리고 있었고, 15세가 넘은 이후부터는 매일같이 혼담이 오가는 레벨이었다.

게다가 혼담뿐이랴? 젤시 황녀와의 혼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온갖 뒷공작과 재물들이 황실로 흘러들어 올 뿐 아니라, 경쟁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하니 잘 키운 딸 하나가 황권 강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이 특권을 오랫동안 누리고 또 최고점에서 팔아 치우기 위해서는 계속된 관리가 필요했다.

“아무튼 매우 귀중한 아이다. 전력을 다해서 가꾸도록.”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메이드장이 예를 올리고 물러났고, 홀로 남은 황제는 오늘 본 베오날드에 대해 생각한다.

확실히 레파르트 경이 추천해서 아카데미로 올릴 만한 이유가 있는 아이였지만 문제는 너무 거물인데 비해 혈통의 하자 때문에 황실의 사위로는 삼을 수 없다는 거였다.

‘아니, 그 정도 가치라면 오히려 무리해서라도 들여와야 하는데… 후우~ 내밀 물건이 없어, 물건이… 나이대가 맞는 아이도 거의 없고, 가문이 맞는 아이도 없어.’

젤시 황녀의 경우가 기이할 정도로 늦둥이라서 특이한 것이지, 자신은 이미 육십이 넘은 나이로 대부분의 자녀들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

그나마 생각해 볼 만한 게 손녀들인데, 이건 설득하는 것부터 힘들 것이고, 결혼한 자녀들의 가문에서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설득도 2배 힘들며, 심지어 처가든 외가든 가문까지 계산해야 하는 문제가 늘어난다.

‘그렇다고 젤시를 주기에는 너무 아깝고… 딴 나라에 주면 이건 또 큰 화근이 될 것 같고……. 우리 쪽 기사나 가신의 가문과 혼약시키려고 해도 혈통이 문제고… 으으으음! 정말 아까워. 아까워 미치겠군.’

정말로 혈통만 정상이었어도 고민할 거 없이 어디든 혼담을 진행시킬 수 있는데, 이게 문제가 생기니 너무나 까다로워졌다.

게다가 더 골 때리는 것은 놈은 이미 발데리안 가문과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빼앗길 수 있다는 조급함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아까워. 남 주긴 아깝고, 우리가 먹을 사이즈는 절대 아니고… 으으으으으으으으음!’

이 정도로 아까워하면 여간 마음에 든 게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사실 디저트 사건 때 다 눈치를 채고 슬쩍 선을 넘어서 반항한 것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게 젊은 놈치고 너무 완벽하고 날선 칼 같은 모습을 보이던 베오날드에게서 아직 미성숙한 무모함과 미숙함을 볼 수 있었기에 역으로 호감이 생긴 황제였다.

정말로 완벽함 때문에 우려되었다면 이미 먹지 못할 것을 감 잡은 순간 황실 기사에게 암살을 지시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무리하게 암살 시도를 하기보다는 젤시를 미끼로 붙여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황제는 이 일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했다.

***

일주일 뒤.

근 일주일 동안 제국 아카데미의 이벤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중간고사가 있었다.

시험을 치르긴 했지만 베오날드는 중상위권에 안착하는 것으로 성적을 마무리 지었다.

사실 마음먹고 공부한다면 더 높은 성적을 얻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냥 불성실한 수업 태도를 지우는 것 정도로만 성적을 얻길 바랐고, 다른 일도 할 게 많은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 정도로 만족했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 세인. 너는 내가 시험지를 그대로 만들어서 줄 테니 따로 체크하자꾸나.”

“예, 베오날드 님.”

“후우~ 아무튼 평화로우니 너무 좋군. 그 상인 놈도 없고, 하고 있는 일은 모두 계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야.”

아쉬운 점이라면 여전히 정체에 빠진 자신의 검술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 점은 매일 단련하고 있고, 또 이제 하이디와 실력이 엇비슷해져서 대련까지 하면서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역시 쉽게 길이 열리지 않았다.

‘좀 더 오러의 수련이 깊어야 하나? 아니면 노이멀식과 황실 마나 호흡법이 맞지 않는 건가? 결국 뿌리는 같을 터라 문제없을 것 같은데… 으으음…….’

“시험이 끝난 걸 축하하네.”

“아, 선배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검술을 개선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 움직이는데, 하얀 제복에 안경을 쓴 이지적인 인상의 청년이 베오날드에게 다가왔다.

케드론 발데리안. 발데리안 가문의 자식으로 이 아카데미 귀족 파벌의 거두쯤 되는 학생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자마자 케드론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혹시 지금 시간 있나?”

“음, 선배님이 물어보시는데 내지 않을 수 없죠.”

“그 태도는 마음에 드는군. 아무튼 따라오게. 자네에게 소개시켜 줄 곳이 있네.”

“아, 잠시 제 고용인들은 따로 시킬 일이 있으니 보내고 가겠습니다.”

“그러게.”

베오날드는 세인과 하이디에게 먼저 돌아가라 지시를 한 뒤, 케드론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자네, 동아리는 들었나?”

“아뇨. 다른 할 일을 하는지라 늘 귀가만 합니다. 그래서 더욱 평판이 안 좋지요. 대체 뭐 하러 제국 아카데미에 다니는 거냐? 하면서 말이죠.”

수업을 제대로 듣지도 않을 거면 차라리 제국 아카데미에서 인맥이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베오날드는 일단 외견은 나태한 모습 그 자체로 아카데미를 다니기만 해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이번에 중간고사에서 중상 이상의 성적을 받은 것 때문에 의혹은 조금 가신 편이었다.

“그것참 잘됐군. 들어간 곳이 있었다면 그곳에 퇴부서를 작성해야 했을 테니 말이야.”

“저를 동아리에 들이시려는 겁니까? 선배님.”

“정확히 짚었네. 그것도 그냥 동아리가 아니지. 이 아카데미에 둘뿐인 기사 동아리 중 하나인 ‘검의 정원’에 가입시키려는 거지.”

‘아… 귀족 파벌이군요.’

기사 동아리가 둘뿐이라는 점에서 베오날드는 곧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아마 가입 요건은 ‘기사’ 혹은 ‘명망이 있는 기사 가문’ 혹은 그 구성원의 추천이며, 필시 동아리 주축은 현재 나뉘어 있는 정치 파벌의 가문 구성 그대로 따라가서 아카데미 안에서 세력 다툼을 하는 것이리라.

“레파르트 경의 추천에 의하면 자네는 필시 오러를 깨우친 자이며, 엄연히 캘러메인 백작가의 가문명도 갖고 있네. 그 정도면 가입 요건은 충분히 갖추고 있지. 거기에 내 추천까지…….”

“검은 제복이라고 뭐라고 듣지 않으려나요?”

“물론 반발이 없진 않겠지만, 그래도 상대 파벌보다 기사의 숫자가 많으면 이득이니까 그리 크진 않을 걸세.”

“거기, 잠시 멈추세요!”

그때, 베오날드와 케드론의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둘은 동시에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은발과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달려오는 새하얀 제복의 젤시 황녀가 보였다.

그녀는 오러까지 끌어 올린 채로 열심히 뛰어와 두 사람 앞에 멈췄다.

베오날드와 케드론은 영문을 몰랐지만 우선은 황녀에게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녀 전하.”

“베오날드, 베오날드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또 시험입니까?”

“아뇨. 오늘은 다른 겁니다. 베오날드를 저희 ‘검과 방패’ 동아리에 초대하기 위해서 온 겁니다.”

이젠 더 이상 레파르트 경의 명예니 뭐니 하는 핑계를 대기 애매한 상황에서 젤시 황녀는 중간고사 시험을 치르면서 어떻게 하면 베오날드와 만날 기회를 가질지 고민했고, 오러를 사용하며 기사의 소질이 있는 베오날드를 자신이 속한 동아리에 집어넣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왔는데, 한발 먼저 케드론이 그를 호출해서 데려간 것을 다른 학생을 통해서 듣게 되었고, 황녀의 체면이고 뭐고 간에 그녀는 빠르게 달려와서 두 사람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어… 이건 참 난감하군.’

케드론이 놀란 표정을 하는 가운데, 베오날드는 설마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상상도 못했기에 어찌하면 좋을지 궁리하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단 젤시 황녀는 무표정했지만 눈빛이 불타고 있어서 자신을 초대하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고, 케드론 쪽은 대체 왜 그녀가 여기 온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베오날드를 바라보면서 해명을 원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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