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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84화 (84/259)

[84화]

황녀의 자리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그 자리에 앉은 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일단 여성이라는 그 자체가 다른 귀족 가문이나 타국과의 교섭 카드로서 사용되는 것이었고, 외모와 재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값어치가 올라간다.

타고난 미모, 지성, 무의 재능까지. 어릴 때부터 빠르게 그것을 겸비하게 된 그녀는 벌써부터 소문이 자자해서 여러 귀족 가문들이 부인 혹은 며느리로 삼기 위해 탐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 그 관리는 아주 엄중하고 또 엄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잘 때나 깨어 있을 때 모든 상황을 관리하는 통제 속에서 그녀는 마음 놓고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다.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부친과 모친은 오히려 그 통제를 강하게 했고, 형제와 자매는 서로 배가 같은 자들끼리 뭉쳐서 그녀는 고립되었다.

남자 형제는 혹시 모를 사태를 막기 위해, 자매들은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많은 재능을 가져 두각을 나타낸 그녀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해 말이다.

그나마 모친의 가문에 있는 귀족 자제들이 추종자를 자처하며 달라붙었지만, 그들의 눈은 짐승 같은 야욕으로 가득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예를 갈고닦는 것과 무표정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마음을 죽여 인형이 되는 것뿐이었다.

‘…내가 잘못된 걸까?’

하나 그렇다곤 해도 사람인 이상 소원이 없을 수가 없고, 교우를 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친구를 사귀고, 대화하며 즐겁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황실 특별 자격으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현실은 황실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저 뛰어난 능력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학생들 간의 파벌에서 ‘황실 파벌’의 대표를 맡게 되고, 황궁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추근거림과 더러운 시선만 늘어나고 인간의 악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더 깊이 알게 되었을 뿐이다.

‘화, 황녀 전하, 히히히… 물론 황녀 전하 말씀을 따라야지요.’

‘역시 황녀 전하이십니다.’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파티를 여는데 참여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귀족 학생들은 귀족 학생들대로 아부와 가식, 혹은 그녀의 미모에 발정 난 짐승처럼 달려들 뿐이었고, 그 아래는 아래대로 황녀라는 휘황찬란한 직함 때문에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거리를 두거나 말조차 함부로 걸지 못할 뿐이었다.

점점 자신이 품은 희망은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독서로 마음의 위로를 찾던 중 이 남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황녀 전하, 무례하게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이건 제가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무릇 세상엔 법전에 올라와 있지 않아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저는 그것에 익숙지 않아 몰랐던 것이고, 케드론 경은 제게 그것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뿐입니다.’

‘…아직도 기억나.’

물론 그동안 부모로부터의 조언도 있었고, 교육 때 자신의 실수를 질책하는 말도 들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다듬기 위한 행위. 사람 대 사람으로서 누군가가 당당히 맞서 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황녀에 대한 예의는 차리지만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내는 자, 옳다고 하는 것이 무조건 옳은 것만은 아니라고 말해 주는 자, 황녀라는 신분과 외모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신념을 내세워, 자신을 인형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 준 자. 그때부터 베오날드는 그녀의 관심을 사게 되었다.

‘가까워지고 싶지만 보통 방법으로는 다가갈 수가 없어서… 그런 핑계를 대긴 했는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황실의 손에 관리되는 거나 다름없었고, 접근하려는 핑계를 만드는 것만 해도 큰 고생을 할 정도였지만 다행히도 그는 레파르트 경의 추천을 받은 자라서 주목할 부분이 있었고, 어째서인지 불량한 학생 생활로 인해 다가갈 수 있는 적합한 명분이 생겼다.

‘그리고 재미있었어.’

베오날드와 어울리면서 마음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얼마나 소소한 행복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황녀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을 경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방적으로 겁을 먹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사람으로서 맞서 주고, 대화해 주는 자였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그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은 도저히 눈도 못 마주치는 황제와 당당히 말을 나누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결국 상업이 융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강한 병사들을 더 많이 키울 수 있지요. 그리고 상업을 융성하게 하려면 ‘길’이 필요하고, 강한 병사들을 만들려면 더 많은 인구와 질 좋은 무기, 갑옷을 생산해 내야 합니다. 물론 식량 공급도 원활해야 하니 농업도 버리면 안 됩니다.”

“정석이긴 하지. 하나 방법이 쉽지는 않을 텐데? 또한 상인들에게서 세금을 걷기란 쉬운 게 아닐세. 길드에서 반발을 하거든.”

“그럼 제국에서 상단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건 어떨는지요? 황제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엄격한 품질 관리, 추가로 은행업도 겸하면 아마 재정을 확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더구나 황실에는 제국 내에서 가장 무력이 강한 자들이지만 황궁 순찰 같은 업무를 하느라 실전 능력이 떨어지는 이들도 있으니 그들을 밖으로 돌릴 수도 있지요.”

“으으음, 상당히 급진적이지만 참고할 만한 의견인 것 같군. 역시 젊은 친구다운 발상이야. 허허허, 레파르트 경이 괜히 추천한 게 아니군.”

대화 자체는 활기 넘치는 젊은이와 지혜로운 노인 간의 건전한 대화로 보였지만, 거기에 흐르는 기류는 결코 온후한 것이 아닌 마치 예리한 칼날이 오가는 것 같았다.

황제는 나름 압박을 넣기 위해 이런저런 곤란한 질문까지 던져 대고 있었는데, 베오날드는 마치 묘기라도 부리듯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화하면서 황제로부터 참고하겠다는 말까지 나오게 하다니.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대체 뭐지, 이놈은? 이게 고작 10대 애송이라고?’

‘황제라곤 해도 고작해야 통일 제국 절반도 안 되는 영토를 통치하는 제후 따위에게 내가 굴복할 것 같나? 내 앞에선 네놈은 시골 촌장과 다를 게 없다. 노친네.’

‘…허! 기가 막힐 노릇이군.’

분명 예의와 언변 모두 깔끔하게 지키고 있다.

하나 자신의 앞에서, 그것도 여러 압박이 될 만한 질문을 던졌는데도 태연하게 받아치는 저 태도는 10대 소년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이 절대 아니었다.

지금 베오날드에게서는 10대 소년의 향취가 아니라, 황실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산전수전 다 겪은 대귀족의 풍모가 느껴지고 있었다.

‘천성적인 자질인가? 하긴 캘러메인도 엄연히 대귀족의 일파. 피가 절반이라곤 하지만 그것을 받았다면 저런 게 나올 가능성도 있지. 허허허! 생각 이상의 거물이야. 이런 원석은 놔두면 오히려 손해이지. 그리고…….’

이런 거물이 될 싹을 지방에 자유롭게 풀어 두면 그것만으로도 제국의 안녕을 해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기에 레파르트 경이 아주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황제였다.

그가 돌아오면 큰 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황제는 베오날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가장 좋은 건 내 아이 중 하나와 혼인시키는 건데, 그러자니 또 혈통이 걸려서 문제군. 그 이전에 분명 이 아이는 자신이 할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 거부하겠지? 그럼 역시 미리 제거하는 수밖에 없나?’

‘아, 꿍꿍이가 보인다, 보여. 내가 백작 시절에 많이 봤지.’

왕이든 황제든 권력자들의 마음은 다 거기서 거기.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자신의 권력을 기준으로 주판을 굴리는 것이고, 그 원리를 아는 베오날드는 황제의 생각이 눈에 훤히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뻔한 생각이 굴러가는 것을 보며 어느덧 식사는 마무리되어 가고, 디저트로 새하얀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오, 이건… 뭐죠?”

“아이스크림은 처음인가?”

“…예, 처음 봅니다. 오… 이거… 오오오……!”

“좋아하니 다행이군. 허허.”

‘…알거든? 마탑에서 연금술 연구하면서 심심하면 만들어 먹고 그랬거든?’

촌놈처럼 모르는 척 위장해야 하는 슬픔 속에서 베오날드는 마탑에서 지내던 시절을 떠올렸다.

마법사들과 달리 연금술사 학부에서는 심심하면 이런저런 마도구를 만들었고, 그 와중에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 괴짜들도 많았다.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 이상한 실험을 하거나 멀쩡한 식료품을 가지고 온갖 이상한 간식을 만들어 내던 게 기억이 났다.

‘베오나알드~ 시제품 마셔 봐.’

‘백작님을 붙여라.’

‘아~ 그러지 말고 마셔 보라고. 성공하면 네가 만들어서 팔아도 되니까~ 응? 베오나알드~’

‘백작님을 붙이라고! 확 연구비 끊어 버린다? 애초에 난 네 실험체가 아니라고!’

‘안 돼에~ 연구비 끊지 마아~’

아이스크림의 단맛을 느끼자 마탑의 기억이 어렴풋이 스치고 지나갔다.

500년 전의 그 시절, 마법사 놈들도 괴짜였지만 연금술사 놈들도 만만치 않게 괴짜라서 상대하기 엄청 힘든 것은 물론이고 사고를 쳐 놓고도 죄책감은 전혀 없어서 수습은 늘 돈 있고, 상식 있는 자신이 해야 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게다가 그놈들 전부 다 미친놈들이라서 내가 백작, 후작, 공작이 되어도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제멋대로 굴고! 하아~ 게다가 연구비 주는 만큼은 성과 내는 놈들이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혹시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아뇨! 맛있습니다. 생전 처음 맛보는 극강의 달콤함이라 아직 적응이 안 되어서요. 하하하. 이런 맛은 처음이라. 하~ 언제 다시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섭섭하기도 하고… 음?”

옆에서 걱정해 주는 젤시 황녀의 질문에 대충 둘러댄 베오날드는 슬쩍 그녀를 보고 기묘함을 느꼈다.

황녀의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 분명 먹으라고 놔둔 것일 텐데 한 숟갈도 뜨지 않은 채로 녹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베오날드는 황제와 젤시 황녀의 상태를 빠르게 살피고는 황제가 어떤 인종인지 곧바로 파악했다.

‘이제야 알 것 같군.’

만약 황녀가 스스로 먹지 않겠다고 했다면 처음부터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젤시 황녀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계속해서 베오날드와 황제, 아이스크림을 슬쩍슬쩍 번갈아 보고 있었고,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것을 먹으며 베오날드만 바라볼 뿐이었다.

즉, 이런 일이 일상적이라는 소리였다.

‘이 황제 놈, 벨릭스과였군.’

황제에게 벨릭스 폰 노이멀의 그림자가 바로 씌워졌다.

자식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가문의 도구로만 보는 작자. 이 황제도 그와 유사한 타입인 것 같았다.

물론 대부분의 귀족들과 황족들이 가문의 혈족을 도구로 보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 베오날드도 그게 가문을 번영시키는 데는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이해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절대 용납 못하는 부류지.’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런 통제와 괴롭힘은 베오날드도 전생에 당해 봤던 것이기에, 그 효율성은 머리론 이해해도 감정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자신이 가주가 되고선 차기 후계자 키우는 방식을 깡그리 바꿀 정도였다.

부모조차 혐오하게 만든 그 방식을 지금 똑같이 하는 작자가 나타났으니, 이 칼레움 제국에 대한 베오날드의 혐오감은 급격히 치솟았다.

“황녀 전하께서는 안 드십니까? 녹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

“……!”

그래서 베오날드는 이 자리에서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을 마치 황제가 들으라는 양 대놓고 말해 버렸다.

젤시 황녀도 무표정을 풀 정도로 놀라고, 황제도 기이하다는 듯 베오날드를 쳐다보았다.

딱 봐도 해선 안 될 말을 한 분위기가 되자 베오날드는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제대로 찍었군.’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다시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젤시 황녀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허허, 그렇구나. 먹으려고 만들라 지시했을 텐데, 왜 먹지 않는 건지. 허허허.”

‘확인 사살… 시켜 주니 아주 고맙군. 벨릭스 같은 놈.’

하지만 그것이 가식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아는 베오날드는 황제의 눈동자 안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분노의 빛을 찾아내고는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이 칼레움 제국과는 절대 손잡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저녁 식사 자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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