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식사라곤 해도 조용히 우리끼리만 하는 거니 너무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후우~ 그거 하나는 다행이군요. 제가 귀족 간의 예법은 어떻게든 공부했는데, 황실 예법 같은 건 전혀 몰라서 말입니다.”
“귀족 간의 예법을 공부했는데 왜 평민 학부에? 그것도 관료 과정을 밟고 있는 거죠? 검술과 학식이 그 정도인데 다른 걸 해도 될 텐데요?”
“애초에 제국 아카데미가 제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고, 게다가 뭘 할지는 이미 정해 놨거든요.”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 나왔기에 베오날드는 짜 놓은 각본대로 술술 대답할 수 있었다.
엄연히 사실인 대답이기에 마음의 부담도 일절 없다.
“그럼 뭘 하려고 하는 건가요?”
“베노피스를 찾고자 합니다.”
“모험가가 되겠다는 건가요? 허구와 같은 환상을 좇는 게 장래 희망일 줄은 몰랐군요.”
그녀의 말에 웃음이 나오려는 베오날드였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간신히 참아 냈다.
그래, 500년 뒤의 사람들에겐 베노피스의 존재가 그런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설마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 베노피스의 주인인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라는 것도 모르니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스스로 납득하며 태연히 답했다.
“하지만 증거는 있잖습니까? 아까 봤던 유물들 같은 거 말이죠. 게다가 아시다시피 저는 어차피 귀족, 평민 어느 곳에도 어울릴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자유와 로망을 찾아 나서는 게 낫지요.”
“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발데리안 가문의 가신이 된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통과점입니다. 모험을 하려면 현실적으로 돈도 필요하니까요.”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핑계를 대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보여 주는 베오날드였다.
젤시 황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문제일 수 있었지만, 늘 재정 문제에 관해 보고서를 보며 골머리를 썩이는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현재 다른 마차에 타고 있는 세인과 하이디는 두 사람 나름대로 베오날드와 황녀 사이에 흐르는 공기를 해석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황녀 전하께서 굳이 이렇게 두 번씩이나 찾아오는 게 좀 이상하죠? 하이디 아가씨.”
“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이 참, 말씀 놓으셔도 되는데…….”
“그러면 그 아가씨라는 호칭을 빼 주십시오. 어차피 같이 베오날드 님을 섬기는 처지이며, 우리 둘…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으으음…….”
하이디와 세인 둘 다 베오날드의 휘하였지만 아직 어색한 감이 있었다.
일단 엄연히 자작가의 귀족 아가씨인 하이디였고, 세인은 그런 귀족을 모시던 메이드였기에 어지간해선 거리가 좁혀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성격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차근차근 대화를 하면서 좁혀 가고 있었다.
“베오날드 님의 여자? 음~ 가족이라고 하기엔… 아직 아이가 없어서 좀 부르기 그렇죠?”
“음, 그렇지. 하지만 나는 아이를 가지면 또 무기를 못 잡을까 걱정되기도 해서… 오히려 그런 쪽 걱정 없는 네가 부럽다.”
“아뇨. 저는… 오히려 한 사람 몫을 하며 베오날드 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하이디 님이 부러운걸요. 아직도 은혜를 입으며 공부하는 처지라. 게다가 본래 정상적인 귀족 집안이라면 서로 싸우고 난리 났거나… 제가 하이디 님의 손에 진작 죽었을걸요? 호호호.”
“…넌 가끔 무서운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 집안은 그런 게… 전혀 없어서 몰랐거든.”
메이드로서 일하면서 귀족 가문의 암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세인과 여성답지 않은 체구와 재능을 가져서 백안시당하는 거 외에는 아무런 터치도 없던 하이디의 인식 차이는 꽤 컸다.
하나 오히려 그 덕분에 신분 차이가 나는데도 이렇게 평온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베오날드 님에겐 정말 여러모로 감사하고 있어요. 더 이상 더러운 일에 협조 안 하고 순수하게 섬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가족으로서 대해 주신다고 하니~ 다만 가끔은 좀 먼저 해 주셨으면 하는 것도 있지만 말이죠.”
“아, 그렇긴 하지. 부끄러운데… 베오날드 님 쪽에선 절대 안 오시더군. 원하면 받아 주시긴 하지만 말이야.”
“물론 불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막 문란하거나 찝쩍대거나 폭력을 쓰거나 하는 분들보단 만 배는 낫죠.”
이 점에 대해선 둘은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지역이든, 영지든 간에 여성 문제로 인한 집안 내의 다툼, 사생아의 출현이나 영주의 횡포 등등… 단골 소재처럼 나오는 걸 생각하면 베오날드의 방식은 정말 이례적인 것이었다.
“가끔은 거친 것도 나쁘지는…….”
“하이디 님! 이상한 취향에 눈뜨시면 안 됩니다. 실제는 상상보다 무시무시합니다. 아무튼 황녀 전하 말입니다만, 분위기가 좀 묘하셨죠?”
“어떤 점이 말인가? 나는 그저 무섭게 노려보던 것밖에 모르겠던데…….”
“싫어하는 사람이면 굳이 저렇게 계속 찾아와서 어울리지 않거든요? 보통 하루만 봐도 이 사람이 어울릴 만한지 아닌지 견적이 나왔을 텐데…….”
“으음… 하지만 베오날드 님의 말씀으로는 방심해선 안 된다고 하던데.”
하이디는 베오날드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과 다르게 세인은 여성의 감정 쪽에 더 민감해서 단순히 베오날드가 생각하는 정치, 암투적인 일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진심은 황녀 전하만 아시겠지. 그나저나 황궁… 처음 가는데, 이대로 괜찮을까? 처음 가는지라 긴장되는데…….”
“…그러네요. 지금 그런 건 생각할 틈이 없는 것 같아요. 저희도 이런데, 베오날드 님은 아마… 더하겠죠?”
다각다각다각.
그렇게 각자의 마차 칸에서 떠드는 사이, 어느새 황궁에 도달한 2대의 마차였다.
입구에서부터 엄격한 감시와 검문을 통해 마차 안을 확인했고, 젤시 황녀가 있음에도 베오날드 일행은 소지품까지 완벽하게 체크하고 난 뒤에야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황궁이라는데, 꽤 수수하군. 미술품도 별로 안 보이고… 보석도 그다지 안 쓰고, 황금이 적어! 제국이라더니, 참 내~’
한 제국의 황성으로서 충분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칼레움 제국의 황성이었지만 베오날드의 눈에는 수수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병사들과 기사들의 검문검색을 거치고 베오날드 일행은 안내를 받아서 식당에 도착, 베오날드만 젤시 황녀와 독대를 하고 다른 둘은 이전처럼 별도의 칸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아주 노골적으로 날 고립시키는 건… 역시 계속 압박을 해서 내 밑천을 보기 위해선가? 흔한 수법이군.’
“가리시거나 못 드시는 음식 종류가 있으신지요?”
“아뇨. 없습니다.”
“예. 그리고…….”
“황녀 전하, 신분이 낮은 제게 일일이 그런 것까지 물어보시는 건 잘못된 일입니다. 배려라는 것은 좋지만, 심하면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고 위치를 자각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불러지는 분의 위신이 깎이게 되고 말입니다.”
배려도 지나치면 독. 황궁에서 오랫동안 귀족으로서 지내 온 베오날드는 그녀의 과도한 배려가 오히려 안 좋은 것임을 빠르게 눈치채고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이 커지면서 자신이 실수한 것을 인지했다.
아마 황궁에 다른 이들을 초대해 본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런 실수가 나온 것이리라.
‘그리고 사실 내가 이걸 지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하지만 괜히 불똥이 튈 수 있으니 커버할 수밖에 없지.’
실컷 황궁 예절에 대해 걱정해 놓고 이렇게 지적하는 자체가 모순되었다는 것을 자각한 베오날드였지만 그래도 괜히 논란이나 문제가 생길 일을 만드는 것보단 나으리라 생각했기에 오지랖을 떤 것이다.
“배려는 좋은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황녀님께서 저에게 극진히 대해 주시면 다른 황족이나 귀족들의 명예에 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편하게, 가령 예정에 없던 손님이라면 그냥 ‘어느어느 분이 합석한다.’라는 식으로 통보만 하시면 됩니다.”
“허허헛, 예의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친구로군.”
“폐, 폐하, 오셨습니까?”
황녀가 인사하는 사이, 폐의 ‘ㅍ’자가 나오자마자 베오날드는 뒤에서 누가 오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의자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그 어떤 전장보다 치열한 곳이 바로 이 황궁. 모든 권력과 야심이 모이는 인외마경인 이곳에선 어설프면 죽는다는 게 몸에 배어 있는 베오날드의 처세술이었다.
그리고 그는 엎드린 채로 드디어 젤시 황녀의 본심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이거였군. 간교한 년 같으니. 감히 날 짐승 아가리에 넣어도 유분수지! 하! 다시 봤다, 황녀!’
그리고 베오날드는 자신이 크게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젤시 황녀의 수완에 감탄했다.
어제 가볍게 보내 주고, 오늘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화하면서 방심을 유도한 다음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함정 앞에다 떨어뜨릴 줄이야.
베오날드는 이 과감한 전략에 감탄하며 젤시 황녀에 대한 판단을 싹 바꾸었다.
‘내가 방심했군. 무의식중에 어린 소녀라고 긴장을 풀었던 게 화근이야.’
“고개를 들고 일어나도 좋다. 젊은 친구답지 않게 눈치가 아주 빠르군.”
“칭찬… 감사합니다, 폐하.”
“젊은 친구들끼리 식사하는 자리에 늙은이가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미안하네. 하나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처음으로 황궁에 데려온 손님이 누구인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허허허.”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눈 속의 눈동자가 웃지 않는 것을 베오날드는 알 수 있었다.
인자한 얼굴에 숨겨진 날카로운 노인의 시선.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 못 챘을 정도로 아주 짧게 지나간 빛이었지만 베오날드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그도 나름 권좌 옆에 앉아서 제국을 지배하던 자였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폐하. 이 제국은 모두 폐하의 것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히려 제가 황실분들의 화목한 식사를 방해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네. 아무튼 앉지.”
“예. 그 영광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허허허.”
베오날드는 일절의 방심도 하지 않고 칼같이 예를 갖추면서 의자에 앉았다.
예고 없이 등장한 황제와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생각으로 인해 그는 이제 더 이상 18세의 어리숙한 소년이 아니라 제국의 권좌 옆에 앉았던 간신 베오날드 폰 노이멀로 돌아간 것이다.
나이에 따른 모습을 보여 줄 때가 아니라는 걸 자각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특이하게도 자넨 캘러메인 가문의 양자인데, 아카데미의 검은 제복을 입고 있군. 레파르트 경의 추천이면 귀족 학부로 입학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제 속에 흐르는 피가 매우 어중간한지라,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일부러 검은 제복으로 택했습니다. 사람은 몸을 낮추면 어느 정도 바람을 피할 수 있습니다.”
황제에게서도 젤시 황녀에게 들은 이야기와 비슷한 것들을 들으면서 압박을 받는 베오날드였지만, 이젠 완벽하게 상대의 의도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여 능수능란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러를 다루는 ‘기사’인데, 귀족가에 손을 대면 문제없을 텐데?”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도 있기에 어디에 소속되어 목줄을 매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하면 발데리안 가문과는?”
“계약 관계 같은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서 서로 대가를 주고받으며 손을 잡은 그 정도 관계입니다, 폐하.”
젤시 황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뭔가 기묘함을 느끼고 있었다.
황제가 참여한 만큼 식사는 당연히 코스로 준비되어 있었는데, 분명 음식과 음료는 사라지는데도 황제는 물론이고 베오날드도 식사 소리는 일절 내지 않은 채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닌데…….’
마치 냉랭한 칼바람이 부는 설산의 정상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이빨을 드러내는 2마리의 맹수들을 보는 것 같았다.
고수와 고수의 대련 같은 대화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절대로 바라지 않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지만, 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바라던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그저… 그와 친해지고 싶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