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황족 전용 영역 안쪽에는 황실 혈족 개개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공부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안전을 위해 복도 쪽엔 무장을 한 황실 기사들이 순찰을 하고 있어서 은근히 살벌한 광경이었다.
젤시 황녀를 따라 그녀의 전용 공부방으로 들어간 베오날드는 속으로 진정하려 했지만 이건 500년 전 전생에서도 고치지 못한 버릇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들어오세요.”
“예…….”
그녀를 따라서 들어가자 방 내부의 광경이 보였다.
미리 그 방의 주인이 신청해 놓은 도서들을 모아 놓은 책장과 각종 다과를 비롯해서 혹시 모를 가정교사들의 방문을 대비한 여러 개의 의자와 책상, 칠판까지 마련된 공부방. 그녀는 베오날드의 의자와 책상을 세팅하여 자신과 마주 보게 해 주었다.
“…그래서, 뭘 시험하시려는 겁니까?”
“일단 앉으세요. 마실 것은 뭐가 좋죠? 시원한 것도 있습니…….”
“오? 이, 이건……?”
구석에 있던 묘하게 생긴 작은 상자에서 병을 꺼내는 젤시 황녀의 모습을 본 베오날드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주 오래되어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는 강철 상자. 베오날드는 그것에 다가가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 이게 대체 뭡니까?”
“아, 마도구는 처음 보시는군요. 바깥에 있는 칸에 마정석을 넣으면 내부에 있는 냉기 마법이 작동해서 상자 안을 차갑게 식혀 주는 유물입니다. 아주 오래된 던전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것이지요.”
차분히 설명해 주는 젤시 황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베오날드는 이 내부의 물건을 차갑게 해 주는 상자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젤시 황녀는 그가 시골 출신이라서 호들갑을 떠는 거라 생각하고는 차갑게 식혀진 음료를 먼저 마시면서 그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베오날드가 놀란 원인은 달랐다.
‘이거 우리 베노피스에서 만든 거잖아? 찾았다! 히드라 문양!’
상자 구석에 작게 새겨진 ‘히드라의 각인’을 찾아낸 베오날드는 이 유물이 자신의 영지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귀족이면서 연금술사인 그는 영지의 번영을 위해 실용적인 곳에 마법을 사용하려 여러 일을 벌였던 몸이다.
그리고 그 습관은 공작이 되어서 통일 제국을 다스리는 위치까지 갔을 때도 멈추지 않았고, 제국의 재정에서 빼돌린 자금으로 여러 연구를 해서 수많은 물건을 만들어 내었다.
“이, 이거 어디서 구한 겁니까?”
“저는 모르죠. 아마 모험가들이 발굴해 낸 것을 사용하는 걸 겁니다. 분열의 시대 이후 마물들의 영역도 늘어나 버려서 옛 제국의 사라진 도시나 시설이 던전화되었고, 거기서 나온 것들이겠지요.”
‘과연… 그렇게 된 건가? 전쟁 이후, 마물의 영역도 늘어날 수밖에 없지.’
베오날드의 생각대로 인간끼리의 내전에서만 이유를 찾다 보니 잊고 있던 점으로, 이 대륙엔 엄연히 야생동물뿐만 아니라 몬스터도 살고 있었다.
가장 융성했다고 하던 통일 제국이지만 실제로 사람이 사는 영역은 그 절반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열의 시대가 지나고 난세인 지금은 실제로 지배하는 영역보다 훨씬 더 적은 영역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거… 대부분의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이라면 하나씩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양산했을 텐데, 지금에 와선 황족이나 쓸 수 있는 유물 취급이라니……. 정말 기묘하군. 정말이지 세상이 후퇴해도 너무 후퇴했어.’
“베오날드?”
“아, 예. 죄송합니다. 너무 신기한 것을 봐서 말이죠. 하하하.”
500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오히려 퇴화한 것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젤시 황녀의 말에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500년 만에 자신의 흔적이 있는 유물을 발견해서 놀랐지만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다시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오오오… 이거 정말 시원하군요. 차도 이렇게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데, 맥주 같은 걸 넣어서 시원하게 만든다면 그 맛이 상상도 안 되는군요.”
“황실 기사들도 저 유물을 보곤 모두 다 그런 소리를 하더군요. 그래서 아마 황실 기사단 본부에도 저게 있을 겁니다.”
“그건 좀 부럽군요. 그럼 이런 유물들은 상당히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될 것 같습니다만.”
“예, 그렇죠. 그것을 알기에 지금도 수많은 모험가들이 몬스터를 토벌하고, 위험 지역과 옛 던전들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 각 나라에서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름 없는 간신’의 유물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거액에 사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죠.”
“세상에…….”
자신의 유산이 대륙을 분열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에 베오날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특히나 고작 이 마정석으로 사용하는 냉장고가 비싼 유물이라니 더 어이가 없었던 그는 전성기 베노피스에 있던 마정석을 사용하는 각종 물건들을 보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마정석 냉장고까지 만들 정도면 군수 물자를 비롯해서 각종 병기의 개발은 얼마나 되어 있었겠는가.
‘하지만 말해 봐야 분명 정신병자라 생각하겠지. 아무튼 이걸로 더더욱 베노피스를 찾아야 할 이유가 늘었군. 게다가… 왜 여신이 날 보낸 건지 알 것 같다.’
베오날드는 하루라도 빨리 ‘베노피스’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대륙의 지도를 본 시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지만, 지금도 모험가들과 대륙의 국가들에서 찾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보다 금방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한 욕심 하는 인간이라서… 창고에 개짓거리들을 많이 해 놨지.’
“아무튼 마도구에 대한 의문이 풀어졌으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예. 이번엔 대체 어떤 시험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우선은… 취미가 뭔가요?”
“…예?”
“…….”
베오날드는 순간 자신이 질문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젤시 황녀의 표정은 무뚝뚝한 상태 그대로였다.
취미. 본업이 아닌 남는 시간에 즐기는 유희 활동을 묻는 것.
왜 이런 걸 묻는 건지 역으로 물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베오날드는 이것 자체가 또 다른 시험이라 생각하며 순순히 대답하기로 했다.
“취미는 딱히 없습니다.”
“없나요?”
“예. 저는 눈뜨고 나서부터 잘 때까지… 아니, 어쩌면 자는 순간까지도 살기 위해, 또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여러 일들을 해야 합니다. 일단 절반이지만 귀족의 혈통이라 거기에 따른 자격을 갖춰야 하고, 자신을 지킬 검술, 배우고 있는 연금술, 추가로 여러 학문까지… 취미라는 것을 누릴 시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설프게 남들 다 하는 취미를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거고, 거짓말을 시작하면 또 거짓말로 틀어막아야 하는 만큼 베오날드는 여기선 그냥 사실대로 담담히 말했다.
대체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을 경우 정공법만큼 효율적인 게 없다.
‘딱히 내가 황가를 모욕한 건 없으니… 그리고 모자란 자가 노력하면서 사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말이야.’
“그런가요. 저는 독서와 연극, 오페라 감상입니다. 근래 연극과 오페라를 주로 보았어요. 최근 본 것 중에서 감명 깊은 건 ‘베인야드의 순례’예요.”
‘베인야드의 순례’. 베인야드라고 하는 성기사가 여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만으로 역경에 돌파해서 결국 그녀가 있는 천상으로 향한다는 소설로, 성기사 베인야드가 수많은 유혹과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여신에 대한 기도와 인내로 모든 것을 이겨 내는데, 이 여신에 대한 애절한 기도가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울려서 인기를 얻은 작품이었다.
“그거… 지금 기준에서 보면… 꽤 고전 아닙니까?”
그리고 그 베인야드의 순례라는 작품은 500년 전, 베오날드의 시대에 발매된 책이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여신에 대한 모독이니 뭐니 하면서 작가를 화형시키라고 난리가 났었지만, 대귀족 부인들과 딸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인해서 다행히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고전이라고 해도 명작은 명작이니까요. 혹시 보셨나요?”
“…예. 보긴 봤습니다. 근데 정작 그것을 쓴 작가 본인은…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여신을 섬기는 성기사의 여정을 쓴 건데! 이게 왜 로맨스 소설 쪽에 꽂혀 있냐고요!’라면서 절규를…….”
“예? 혹시 작가… 본인을 아세요?”
“…라고 써져 있는! 에세이가 있었습니다. 추정이니까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500년 전의 것과 통하는 대화 소재가 나와 버려서 말하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베오날드는 얼른 얼버무리고 가슴을 졸였다.
본래 그는 이런 실수를 잘 안 하는 편인데, 지금 이 황가의 영역에 왔다는 긴장감부터 시작해서 마정석 유물을 보면서 동요한 탓에 순간 흐트러져 버린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서 금방 수습은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묘하다는 걸 깨닫는다.
‘…젠장, 완전히 이상한 놈 보듯이 쳐다보는군.’
“베인야드의 순례 작가의 에세이면 엄청난 유물 아닌가요? 그건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게… 진위 여부가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이라서 말입니다. 제대로 된 역사학자의 검증을 받아야 하는 거라서 말이죠.”
“그렇군요. 아무튼 교양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니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젤시 황녀와의 대화는 여러 화제를 돌아가며 계속되었다.
베오날드는 대체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이러는지 몰랐지만 아무튼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그렇게 수십 분, 강의가 끝나고 바로 와서 이런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한 것도 있지만 긴장 상태이다 보니 칼로리 소모가 컸던 베오날드의 배꼽시계가 꼬르륵 하고 울려 버렸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오래 붙잡고 있었으니 당연하겠지요. 그럼 식사하러 가시죠.”
“…예?”
“제 쪽에서 식사 대접을 하는 것에 문제 있나요? 따라오세요.”
당연하다는 듯 먼저 일어나서 방을 나서는 젤시 황녀를 보며 베오날드는 설마 자신을 이대로 황궁으로 데려가려는 건가? 싶어 긴장한 채 아카데미의 도서관을 나서서 다시 일행과 합류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젤시 황녀가 부른 것은 황궁으로 가는 마차였던 것이다.
‘…진심이냐?’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흔들리는 화려한 마차 2대를 보고 베오날드는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인데 이대로 황궁까지 가서 압박당할 걸 생각하자 벌써부터 위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겉으로 표내지 않았기에 그런 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젤시 황녀는 베오날드와 그의 일행에게 마차를 배정했다.
“베오날드, 당신은 여기에 타세요. 일행분들은 뒤쪽 마차에 타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하이디와 세인을 다른 마차로 보내고, 베오날드와 나란히 같은 마차에 타는 젤시 황녀였다.
베오날드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오늘 일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마련된 황궁행에 압박을 느끼면서 고뇌하는데, 젤시 황녀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그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지만 입꼬리의 끝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하나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모를 만큼 작은 움직임이었고, 애초에 이 마차 안에는 베오날드와 단둘뿐이었기에 그것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