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 평민 학부엔 어쩐 일이십니까? 황녀 전하.”
황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이 예를 갖추면서 그녀를 맞이했다.
베오날드가 보기에 특이한 점은 오늘은 전에 보이던 그 많고 많은 하얀 제복의 귀족 학부 추종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하나 그렇다곤 해도 경계해야겠군.’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타오르듯 일렁이면서 베오날드를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입이 열렸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예. 잠깐 시간 있습니까?”
“황녀 전하께서 내라고 하면 어찌 내지 않겠습니까? 다만 장소를…….”
“따라오세요.”
당당히 몸을 돌린 그녀가 먼저 걷기 시작하자, 베오날드 일행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디로 데려갈 생각인 건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결코 우호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베오날드는 일단 긴장했다.
하지만 햇빛에 반사되어 사라락 빛나는 은발이 너무 영롱하여 그의 시선을 흔들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아름답긴 아름답군. 그녀를 얻으려고 구애하는 귀족들이 엄청 많을 텐데… 그것도 황가의 힘이 되겠지.’
전생에서 어지간한 미녀를 모두 섭렵한 베오날드가 보기에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젤시 황녀의 미모. 보석처럼 신비롭게 타오르는 저 붉은 눈동자만 해도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이 아카데미에서도 수많은 추종자가 있으며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결투를 걸어오는 멍청이도 있는 거겠지.’
“다 왔습니다.”
“여기는… 대련장 아닙니까? 설마 황녀 전하께서도 저와 결투를 하시려고요?”
도착한 장소는 이전에 한 번 왔던 곳으로 이상한 귀족 놈에 의해서 결투를 하게 되었을 때 하이디가 대신 싸운 장소였다.
불길한 예감을 받은 베오날드가 미리 물어보자, 그녀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베오날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뇨. 대련입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황녀 전하.”
“농담이 아닙니다, 베오날드. 사람을 알기 위해선 검을 맞대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레파르트 경이 당신을 추천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그건 또 무슨 근육뇌적인 방식이야? 하이디! 너는 왜 고개를 끄덕이며 알 것 같다는 얼굴이냐? 이래서 골수 무인들이란!’
“거절할 생각이라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되면 난 당신이 레파르트 경의 추천으로 입학하였음에도 불성실한 태도로 황실 기사인 그의 명예를 더럽혔으며, 아울러 제국 황실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과 동시에 제국 아카데미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당신의 거취에 대해 학생회에 공식적으로 제기하겠습니다.”
사실상 대련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논리를 보면 반쯤은 억지였지만 황실 기사단의 명예는 곧 황실의 명예와도 연결될 수 있고, 상대는 황족이기에 그것을 가지고 트집 잡을 사안이 충분했다.
게다가 저 젤시라고 하는 황녀는 이 아카데미 내에서 황실파의 중심인물. 안건을 제기하면 추종자인 귀족 파벌 학생은 물론 선생들까지 호응할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러도록 하죠.”
“그럼 보호구와 목검을 드릴 테니 착용하고 오시지요.”
“예.”
결국 베오날드는 보호구와 목검을 들었다.
엄연히 ‘결투’가 아닌 ‘대련’이라는 형태를 띠었기에 이번엔 하이디에게도 맡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직접 나서야 하는 그였다.
아무튼 이득도 없고 내키지 않는 대련을 해야 하는 베오날드는 대련장에 서서 젤시 황녀와 마주 보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나 싸우면 됩니까? 1분? 3분? 5분? 대련은 한 번으로 끝나겠지요?”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이 레파르트 경의 추천을 어떻게 받았는지 말입니다.”
‘…그 망할 황실 기사 때문에 일이 몇 개나 꼬이는 건지. 후우~ 이렇게 된 이상…….’
“그럼 시작하죠.”
‘3분간 적당히 놀아 줘야겠군.’
따악!
그렇게 베오날드에겐 전혀 의욕이 생기지 않는 대련이 시작되었다.
사전에 조건이라도 걸까 고민하긴 했지만, 그렇게 되면 이기든 지든 문제가 생길 거고, 상대가 황녀인 만큼 조용히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하나 대련 상황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는데, 젤시 황녀의 기량이 예상을 훌쩍 넘었던 탓이다.
‘…하긴 오러의 기척이 느껴졌고, 대놓고 나는 무인이라는 걸 강조하는 패션을 하고 있었으니… 큭!’
“대련이라곤 해도 무(武)를 겨루는 것이니 적당히 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다쳐서 몇 달간… 침대에서 누울 정도가 되면 자동으로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하겠지요.”
‘…생각이 아주 뻔하군. 게다가 오러까지?’
따악!
은은한 보랏빛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오는 황녀의 목검. 베오날드도 어쩔 수 없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그 공격에 맞섰다.
공격의 강도로 보나, 궤적으로 보나 확실하게 자신을 때려눕히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을 확인한 베오날드는 단순히 3분 버티자는 생각만 할 수 없게 되었고, 점점 공세의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젠장할!’
“그래도 역시 레파르트 경이 아주 잘못 본 건 아닌 것 같군요.”
“그럼 손속을… 좀! 가볍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뇨. 기왕 시작한 거, 밑바닥까진 가 봐야겠지요.”
그 대화를 끝으로 오러가 깃든 목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대련장에 울려 퍼졌다.
어느새 구경하는 학생들이 늘어났고, 귀족 학부 학생들은 자기 학부의 아이돌 같은 젤시 황녀가 평민 학부의 나태아와 대등하게 싸운다는 것을 확인하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기껏 자신의 평판을 깎아서 관심을 거두게 했는데,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도로 아미타불이다.
마음 놓고 연금술 연구와 수련을 할 수 없게 되는 건 싫었던 베오날드는 젤시 황녀의 거센 공격을 막으며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그나마… 이 황녀, 실전 경험은 전혀 없는 건지 공세가 뻔해. 젠장!’
강한 척하는지라 얼마나 대단한가? 했지만, 이 나이대엔 아무리 천재라고 할지라도 기량은 뻔했다.
특히나 황녀라는 신분이 있는 이상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나 자신이 다치는 것을 상정한 대련 같은 건 거의 하지 못했으리라.
‘심지어 여성이라 어디 흠집이라도 나면 팔기 어려우니 말이지. 아무튼 3분이 왜 이렇게 길… 음?’
“…후우~”
베오날드가 필사적으로 방어만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젤시 황녀가 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그리고 호흡을 고르는 그녀의 베오날드를 바라보는 시선은 살짝 바뀌어 있었다.
베오날드는 아직 3분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검을 멈춘 그녀를 기이하게 바라볼 뿐이다.
‘뭐야?’
“검술 실력은 확실히 기사급이 맞군요. 무(武)의 면에서만큼은 레파르트 경이 오판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다행이군요. 그럼?”
“예. 이걸로 끝입니다.”
베오날드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시간으로 보면 아주 잠깐이었기에 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또한 이렇게 황녀가 먼저 끝내 주면 주변에서 뭐라고 할 후환도 없었기 때문에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휴우~ 황녀 전하께 인정을 받으니 감사하기 짝이 없군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직 인정한 게 아닙니다. 무(武)의 면에서만 합격점을 얻은 겁니다.”
“예?”
“무력만 강한들 결국 무뢰배일 뿐,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에 어울리는 면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레파르트 경도 필시 그렇게 생각하겠죠.”
‘무슨 속셈이지?’
“그러니 내일은 다른 분야로 확인하기 위해서 찾아가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말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젤시 황녀. 베오날드는 황당했지만 어쨌든 이 상황은 무사히 끝났고, 시간도 얼마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안도하며 세인, 하이디와 함께 대련장을 나섰다.
“으으음… 도대체 황녀 전하의 목적은 뭐였을까? 혹시 너희는 감 잡은 거 있나?”
“뭔가 경고 같은 게… 아닐는지요?”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이라 모르겠군.”
황녀 전하는 명백한 악의도, 그렇다고 호의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베오날드는 그녀의 내심을 읽을 수 없어서 난감했다.
일전에 조카뻘 되는 케드론의 편을 들어 자신을 도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긴 했는데, 베오날드는 그녀의 진의를 알아내기 위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날 견제하려는 건가? 아니면 내가 발데리안 가문의 도련님과 어울리는 걸 아니까 거기서 뭐라도 얻어 내려는 걸까? 으으으으음… 그래, 내 약점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려는 걸 거야. 휴우~ 그 데런 상인 놈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자마자 이번엔…….”
베오날드는 내일 또 어떤 일어날지 걱정하며 하교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예고한 대로 젤시 황녀는 베오날드의 마지막 강의 시간에 맞춰서 또다시 찾아왔다.
아마 자신의 강의 시간표쯤은 황녀 권한으로 아카데미에서 얻어 냈을 터. 어쨌든 어제처럼 추종자 없이 홀로 왔고, 베오날드는 어제처럼 먼저 예를 갖추고서 인사를 했다.
“예정대로 오셨군요, 황녀 전하. 그래서 오늘은 어떤 용무십니까?”
“일단 따라오시죠.”
“그러지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한 어조로 지시를 한 그녀를 따라서 향한 곳은 아카데미 도서관으로 평민, 귀족 학부의 수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연구하기 위해서 책을 빌리거나 공부하는 장소였다. 베오날드의 경우 최근 지도의 작업을 위해 몇 번 들렀던 적이 있는 곳이었다.
“여긴 어째서 오자고 하신 것인지?”
“무(武)에 대해서 확인했다면 이제는 다른 것을 확인해야겠지요. 일행은 입구에서 대기하고, 당신만 따라오십시오.”
‘…뭐지?’
베오날드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그녀의 지시에 따라 세인과 하이디를 도서관에 대기시키고 그녀와 단둘이서 도서관 내부를 걸었다.
역시나 주변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골치가 아팠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묵묵히 걸었고, 곧 두 사람이 도달한 곳은 도서실에 마련된 황족 전용 구역이었다.
‘…이런 제길!’
그곳을 표시하는 황금빛 명패를 본 베오날드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이건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조지(?)려고 한다는 의도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생에 그는 황실에 기생해 온 몸인지라 이런 영역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였다.
“어서 들어오시죠.”
황족 전용 구역이라는 것은 여기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면 무조건 자신의 잘못이나 다름없고, 조금만 수틀려도 목숨이 위험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갈 때보다 더 긴장하며 젤시 황녀의 뒤를 따라 그곳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