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2주 뒤.
화창한 봄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베오날드는 아카데미에서 학생다운 기분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각종 행사도 모두 빠지거나 다른 학생들의 관심을 무시한 채 거의 수면실처럼 사용하는 중이었다.
물론 실제로 해당 전공의 수업을 듣는 것은 세인이었기에 아무 문제없었지만, 기껏 황실 기사단원의 추천을 받아 입학해 놓고 불성실한 수업 태도와 학생들과의 교우 관계도 좋지 않고, 아카데미의 행사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는 모습에 베오날드에 대한 평판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대체 레파르트 경은 어쩌자고 저런 학생을 추천한 건지?”
“캘러메인 영지에서 얻은 명성은 거짓이었나?”
“잡종이 괜히 잡종이겠어요?”
“딱 봐도 멋대로 하려고 우리 학부에…….”
웅성웅성.
하나 어차피 베오날드의 관심사는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거나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냥 싹 무시해 버렸다.
케드론 덕분에 발데리안 백작 가문이라는 든든한 뒷배도 생겼기에 더 이상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견제받고 치인다고 해도 수도에 저택을 두고 윤택하게 살 수 있는 가문이면 충분히 대귀족이지. 마치 전생의 우리 가문 같군.’
스포츠에 비유해 보자면 캘러메인 백작가는 아래 그룹이 너무 약해서 평화로운 2부 리그 최상위라 볼 수 있었고, 발데리안 백작가는 1부 리그 중하위권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혼란을 겪고 있는 거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오, 드디어…….”
하나 그런 소리를 모두 무시해도 될 정도의 메리트가 지금 베오날드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
데런이 준 자료를 통해 약 3주간의 작업 기간을 거쳐서 완성한 지도.
비록 대륙 전체가 아니라 칼레움 제국을 중심으로 주변의 영역만 밝혀낼 수 있었지만 지명과 도시, 산맥과 길이 모두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본 베오날드는 감격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내가 있는 위치를 가늠하기엔 충분해.’
“오, 굉장하네요. 고작 몇 주 만에 완성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의 퀄리티……. 패스파인더나 언어학자들이 붙어서 매진해도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오래되면 될수록 나한텐 유리하니 말이지.’
자신은 엄연히 500년 전에 살았던 인간이다.
오래된 지도의 언어는 오히려 베오날드에게 메리트였고, 현재의 언어는 데런이라든가 맡길 사람은 많았다.
그렇기에 데런과 베오날드에게 이 일의 완수에 대한 인식 차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근데… 몇몇 지명이 좀 이상하군요. 혹시 제가 알아보지 못하게 일부러 이런 암호 같은 글귀로 적어 두신 겁니까?”
“나는 아직 널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지도들 합쳐 봐야 칼레움 제국과 주변국밖에 되지 않아. 나는 대륙의 지도를 원한다고 했을 텐데?”
“으으음… 일개 상인 레벨에선 이게 한계라고요. 진짜로 대륙 지도를 가지고 싶으시다면 황성을 가거나, 대귀족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사람과 접촉해야 한다고요. 거기다 쉽게 주지도 않을 테구요.”
“맞아. 그게 사실이지. 일개 상인 레벨에선 자신들의 상권이 닿는 영역에서밖에 정보를 얻지 못할 테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조건을 내줬지. 한데… 너는 그걸 알면서도 했고?”
“하하하, 투자입니다, 투자. 놀아나는 걸 알면서도 투자한 거죠. 이 정도로 베오날드 님을 밀어주는 놈은 저뿐일 겁니다. 그렇죠?”
푸른 눈을 반짝이면서 최대한 연기를 하는 데런. 사내놈의 애교라서 본래는 불쾌해야 정상이었지만, 깔끔하고 시원하게 생긴 외모로 저러니 보통 사람들이라면 넘어가고도 남을 터였다.
하지만 베오날드에겐 어림없는 일이었다.
“난 딱히 남녀를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그 안에 추악함이 깃든 게 뻔히 보이니 영 끌리지 않는군.”
“추악하다니요. 누구나 가진 정상적인 욕망이지요.”
“아무튼 좋아. 그래도 이 일에선 성과가 확실히 있었으니 대가 정도는 줘도 되겠지. 자, 받아라.”
베오날드는 그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고, 데런은 부리나케 다가가 무릎까지 꿇고서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비누 제조법이다.”
“비, 비누요? 아니, 고작 비누 말입니까?”
데런은 눈을 크게 뜨고 베오날드를 노려보았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감정이 담긴 것으로, 아무리 상인이 싫다곤 하지만 자신은 거금을 들여서 지도와 이 비밀 저택까지 마련해 주고 큰 도움을 주었는데, 대가가 고작 비누 제조법이라니 기가 막힌 것이었다.
“고작?”
“예. 고작입니다! 물론 오래전엔 귀족님들이나 쓰는 물건이었지만, 이런 제국 수도라면 대량으로 생산할 재료와 설비, 인력이 많아서 상인은 물론 평민들에게도 약간만 사치스러울 뿐 흔한 물건이란 말입니다.”
“그렇군. 그러면 더 좋겠군.”
“더… 좋다고요?”
“네놈이 상인이라면 적어도 그 물건을 만들어서 가치를 판단해 보고 난 다음에 나에게 따지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만?”
“…알겠습니다, 베오날드 님. 일단은… 물러나도록 하죠.”
그렇게 물러나는 데런. 하나 베오날드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자신이 준 비누 제조법이 과연 보통 제조법일 것인가? 자신은 분명 그에게 보상으로 한몫 크게 잡을 기회를 건네준 것이었다.
기회를 줬는데 그것을 살리지 못한다면 저 데런이라는 상인 가문 출신의 한계는 금방 드러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과연 기회를 얼마나 살릴지 궁금하군. 그럼 나도 이제 여길 정리하고 가 볼까?”
완성한 지도 하나만 챙긴 베오날드는 남은 자료를 깡그리 촛불로 태워 버리고는 비밀 공간을 나섰다. 그리고 지하실 위로 올라가자 거기엔 경계를 하며 대기 중인 하이디와 공부 중인 세인과 셀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베오날드가 올라오자 어미 새에게 다가가는 새끼 새들처럼 몰려와서 질문을 던져 댔다.
“드디어 일이 끝나셨나요?”
“베오날드 님, 이제 다음 일정은? 아까 전에 데런 님이 나가시던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오늘 저녁 식사는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요?”
“셀리나, 우선 여기 일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하이디, 너는 먼저 알테리오를 데리고 와라. 집으로 돌아갈 거다. 세인, 식사는 돌아가서 하도록 하지. 돌아갈 준비를 하도록.”
베오날드의 지시 아래 곧바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일행은 알테리오를 타고 도시 외곽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갔다.
지도 작업 때문에 한동안 잘 들어가지 못했던 보금자리에 도착한 베오날드 일행은 곧바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으음…….’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베오날드는 지도를 보며 베노피스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산맥의 형태와 제국 영토의 구성과 강의 흐름 등등, 500년간 여러모로 변하긴 했지만 아주 큰 틀에서 보면 변화란 없었다.
문제는 이 나라 칼레움 제국의 위치가 생각보다 묘한 곳에 있다는 거였다.
“베노피스에서 상당히 남쪽… 그러면 발데리안 가문도 상당히 남쪽으로 도망쳐 왔나 보군. 후우~”
베오날드는 한숨을 쉬면서 지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닌 이상, 베노피스는 지금 이곳에서 북쪽으로 멀리 올라가야만 있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를 안 순간 또다시 새로운 의문이 연이어 생겨났다.
‘여기 위치는 그럼 대략 통일 제국 기준… 남쪽 미개척 땅이 번영하게 된 것이군. 그렇게 보면 결국 여기서 북쪽에 있는 볼레아 왕국과 다이나 왕국이 본래 내가 운영하던 통일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처먹었다는 건데… 으으으음… 크기가 말도 안 되는데?’
본래 볼레아 왕국은 볼레아 변경백으로서 통일 제국 기준으로도 가장 북방 끝에서 몬스터와 야만인들의 침략을 막아 내던 나라였다.
그런데 지도에 따르면 분명히 볼레아 왕국과 다이나 왕국은 칼레움 제국 북쪽에 경계가 표시가 되어 있는데, 이러면 두 나라의 지금 영토의 크기는 통일 제국급은 아니라도 제국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는 되는 것이다.
‘물론 영토만 크다고 해서 나라가 강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통일 제국 시기의 도시와 건축물, 도로 같은 시설들이 남아 있을 텐데, 그거면 아무리 분열과 전란이 있었어도 금방 부흥할 텐데…….’
이해가 안 되는 문제가 새로이 나타나자 머리가 아파진 베오날드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지금 이 답은 풀 수 있는 게 아니다.’로 귀결되었다.
누가 알려 주지 않는 한 결국 직접 그곳에 가서 그쪽 지도와 현황을 파악해야 알아낼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 의문은 결국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겠지. 어쨌든 귀찮았던 지도 프로젝트가 끝났으니 이제 다시 본래 하던 일들을 해야겠군.”
지도를 책장 하나에 잘 숨겨 둔 베오날드는 검을 들고 저택 밖으로 향했다.
그동안 지도를 만드는 데 모든 시간을 쏟느라 소홀했던 검술 단련을 위해서였다.
하나 그 덕분에 ‘황실 기사 레파르트 경’의 추천으로 주목받던 이미지를 날려 버릴 수 있어서 감시자는 모조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거 하나는 다행이군.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은데, 귀찮은 놈들의 시선이 사라진 건 아주 좋지.”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줄었다는 것에 안도하던 베오날드의 눈에 먼저 나와서 단련하는 하이디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주변에 감시자가 없는 걸 알아서인지 마음껏 오러를 사용하며 단련하는 중이었다.
“흠! 차앗!”
‘…이젠 어쩌면 나보다 강하겠는걸? 저번 결투가 상당히 도움이 된 것 같군. 그 기사에겐 정말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라겠어.’
이전에 사소한 분쟁으로 인한 결투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은 건지 하이디의 기량은 정말 눈부시게 발전했다.
모자라는 것은 마나 호흡법의 진도가 조금 늦는 것뿐이라고 할 정도로 그녀의 기량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해 나가는 게 눈에 보여서 부러웠지만, 그렇다고 질투심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
자신은 정원의 주인. 가꾸는 정원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자라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따름이었다.
다만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주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별개였기에 베오날드는 미소를 띤 채 하이디에게 다가가 대련을 신청했다.
***
다음 날, 제국 아카데미.
큰 작업이 끝났고, 지긋지긋하던 상인 놈도 사라졌으니 베오날드는 방학이 될 때까지 마음 놓고 아카데미에서 학업에만 열중하면 되었다.
평판이 떨어져서 여러모로 편해졌기에 그는 계속해서 수업을 게을리 듣는 척을 하면서 다른 일을 하곤 했다.
‘레파르트 경의 평판이 말이 아니게 되어 버렸군. 하지만 애초에 날 속인 죗값이 크니…….’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다음 시험 준비를…….”
‘으음, 평판은 그래도 시험 준비는 해야겠군. 낙제하면 우리 세인이 배움의 기회를 또 잃을 테니… 음?’
웅성웅성.
수업이 끝나자 짐을 챙겨 나가려던 베오날드는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 내에 있는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엔 어디서 본 것 같은 푸른빛이 감도는 은발이 햇빛에 반짝이고, 붉은 눈동자가 불처럼 타오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젤시 황녀. 일전 케드론에게 시비가 걸렸을 때, 자신을 구하러 와 주신 황녀 전하였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그녀는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