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 기꺼이 승낙하겠습니다만, 한데 굳이 저에게 맡기시는 이유를… 더 알고 싶습니다. 연금술이라면 마탑이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풀 수 있었으면 진작 풀었다. 망할 돌팔이 놈들! 돈은 돈대로 받아 처먹고 풀질 못하니 화가 안 날 수가 있나! 이런 망할 놈들!”
어지간히 마탑의 연금술사와 마법사들에게 당한 건지 분노를 터뜨리는 발데리안 가주였다.
이 점은 베오날드도 크게 공감하는 것으로, 대체 마법사라는 놈들은 진리를 찾는 건지 아니면 돈을 찾는 건지 모를 정도로 돈에 미친 자들이었다.
“특히나 제국이 분열하던 시기, 마탑 놈들도 ‘그분’의 연구 자료와 재산을 가지고 서로 싸우다가 아예 마탑이 무너져서 더더욱 난리가 났었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을 하는 멍청한 놈들! 그래서 수준이 떨어져서 그 모양이지!”
“하지만 제 연금술 수준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더구나 제가 배운 게 그… ‘그분’의 지식이 맞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라 0에서 그 정도 수준에 올라왔다는 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거고, 재능은 있다는 거다. 거기에 케드론의 이야기도 그렇고, 직접 보니 처신은 할 줄 아는 놈인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아니면 우리 발데리안 가문에 불만이 있냐? 엉?”
‘…이놈 집안은 결국 모조리 선조를 따라가는 건가? 500년 정도 지나고 다른 피와 섞였으면 저 성향이 옅어져야 정상 아닌가?’
베오날드는 속으로 기가 막혔지만, 어찌 되었든 승낙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자신이 내막 같은 것을 어느 정도 아는 가문이기도 하고, 게다가 충성스러운 부하의 집안이니 마음도 끌리는 데다 자신을 위한 유물까지 준비해 놨으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추가로 그쪽 본가로 가게 되면 어쩌면 더 많은 기록과 유물이 있을지 모르고, 또 베노피스의 위치도 객관적으로 알 방법이 생길 수도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쉬워지겠어.’
“그러니 곧장 발데리안 영지로 출발할 준비를 해라. 유물은 당연히 여기 없고 본가에 있으니까.”
“예? 지금 바로 말입니까?”
베오날드는 놀란 눈으로 발데리안 가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진심이라는 듯 먼저 일어나서 문 쪽으로 가 시종을 부르고 있었다.
베오날드가 다급히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의지를 굳힌 듯했다.
물론 이대로 끌려가서는 안 되기에 베오날드는 아직 갈 때가 아니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케르웰의 후손에게 비는 꼴이라니!’
“유물이 거기에 있으니 거기로 가야지 않나? 북쪽으로 마차로 쉬지 않고 가면 4일 정도면 도착하는 곳일세.”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주님. 아무리 그래도 저는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입니다. 물론 유물을 조사하는 게 급하신 마음은 잘 알지만 저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그건 내가 지원해 주겠다. 가정교사를 붙일 테니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식사 및 가는 길에 챙겨 줄 건 다 챙기도록 지시하겠다. 얼른 가자.”
“가주님, 진정하십시오. 저는 아직 햇병아리이고, 배워야 할 지식과 자료가 많아서 이곳 제국 아카데미에 지원한 겁니다. 마탑에 가지 않는 이상! 이 대륙에서 제국 아카데미의 도서관만큼 자료와 지식이 풍부한 곳은 없습니다. 아니면 발데리안 가문 내에 그런 자료들이 있으십니까?”
“음? 으으으음……!”
그제야 발데리안 가주가 움직임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막무가내로 해결해 줄 수 없는 사안이 나오자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무식한 것도 유전이고, 막히면 끙끙대는 것까지 싹 다 똑같네. 정말 피는 진하구나…….’
‘거기서 막히면 말임까? 그러니까… 끄으응~ 끄으으으응~ 끄으으으으으응~’
선조에 대해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그가 스스로 결론 내리길 기다렸지만, 발데리안 가주는 끙끙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는 근성도 집안 내력인지 그는 베오날드의 의견에 쉽사리 납득하지 않고 방안을 찾으려고 끙끙댔다.
‘예전엔 내가 주군이라서 말 한마디 해 버리면 그만이었는데, 지금은 저쪽이 더 위인 입장이니……. 후우~ 케르웰 녀석 아래에 있던 제장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럼 어찌할 것이냐?”
“일단 제국 아카데미 학업을 계속하게 해 주십시오. 조사는 방학 기간을 통해서 진행하고,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가주님의 아래에서 일하겠습니다. 물론 중간에 만약 서로 의견이 틀어져서 인연이 끊어지게 되면 저는 이 저택과 발데리안 가문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잊겠다고 여신께 맹세합니다.”
“흐으음…….”
여신에 대한 맹세. 거기에 막상 들어 보니 베오날드의 의견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고, 방학 때 조사한다는 적절한 절충안도 나왔기에 발데리안 가주는 결국 못 이기는 척 승낙을 했다.
“음, 좋다. 그렇게 하자. 연락은 케드론을 통해서 하면 되겠나?”
“예, 그러십시오.”
“좋아. 그럼 밥 먹고 가게! 케드론이 이미 준비해 두었을 걸세!”
“아, 알겠습니다.”
그냥 자신을 데려오려고 핑계로 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진짜로 식사를 준비했다는 말에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이 발데리안 가문의 식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발데리안 가주를 따라서 식당으로 내려가자 길고 거대한 테이블에 수많은 발데리안 가문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앉아 있었다.
‘…이, 이건?’
발데리안 가문의 식탁 위를 보고 놀라는 베오날드. 무슨 바이킹이나 산도적처럼 빵과 고기, 술을 산처럼 쌓아 두고 있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각종 통구이, 심지어 몬스터의 것으로 보이는 고기까지. 이만한 양을 매 끼니마다 만드는 것도 문제였지만, 돈이 엄청 많아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법했다.
‘얘네 아직도 이렇게 먹나? 전통이란 게 정말 무섭구나…….’
‘우리 집이니! 내 맘대로 하겠슴다! 깨작깨작 어떻게 먹슴까? 이렇게 먹는 게 편하지.’
500년 전 당시 발데리안 가문을 세운 선조인 케르웰은 애초에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식사 예절 같은 건 지키지 않기로 유명했고 술, 고기, 빵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마구잡이로 먹어 치우는 짓을 했었는데, 설마 이게 아예 집안 전통이 되어 500년이나 지나도록 유지될 줄은 몰랐다.
“크흠! 늦어서 미안하다. 내가 일 때문에 너무 늦었구나. 맘껏 먹어라!”
“밥이다!”
‘그때 내가 억지로라도 그만두게 했어야 했는데……!’
귀족가의 체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식사 장면을 보며 베오날드는 500년 전에 자신이 케르웰을 말렸어야 했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어린아이들에겐 술을 먹이지 않는다는 점과 각자의 앞에 신선한 야채가 쌓인 커다란 그릇이 하나씩 있어서 영양소는 골고루 먹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 저 녀석은?’
“케드론 형, 고기 더 먹어. 그거 먹고 되겠어?”
“맞아맞아. 밖에서 식사 예절 지키는 건 그렇다 쳐도… 집에선 편하게 먹지.”
“많이 먹어야 힘을 내지 말임다.”
“나는 괜찮다. 그러니 너희는 식사에 집중하도록 해라.”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불러 세우고 질책했던 케드론 발레리안. 그는 이 시장통 같은 혼란스러운 식사 속에서도 홀로 고고히 접시 하나에 있는 스테이크와 가니시를 썰고 빵과 와인도 차분히 마시는 우아한 모습, 즉 전형적인 귀족들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베오날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 옆으로 가서 식사를 시작했다.
‘케드론… 이라고 했었나? 보통은 밖에서 예의를 차려도 안에서는 가문의 법도를 따르는 법인데… 특이하군.’
“뭐냐?”
“선배님은 이 가문 사람인데, 다르게 드시네요.”
“우리 가문은 마음대로 먹는 것을 허락한다. 남이 어떻게 먹든 상관하지 않지. 고로 내가 이렇게 먹는 게 굳이 다른 건 아니다.”
그렇게 말하며 우아하게 식사를 지속하는 케드론. 베오날드는 일단 손님이었기에 남의 가문에서 그처럼 제멋대로 할 수 없어 이 가문의 방식대로 식사를 했다. 그러면서 드디어 발데리안 가문에서 생겨난 변화의 싹에 속으로 감탄했다.
‘그렇지. 500년이나 지났으면 변종이 나올 때도 된 거지.’
“뭐지? 내가 우스운가? 가문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멋대로 하는 모습이?”
“아뇨. 전혀요. 오히려 좋게 보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내에선 질서를 유지하시는 분이지만 반대로 이 가문 안에서는 변화를 바라시는 분이니 말입니다.”
“난 그저 우리 집안이 좀 더 ‘귀족’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지 않으니 같은 귀족에겐 야만인으로 불리고, 밖에서는 귀족이라 치이는 판국인데… 뭘 해도 하나는 확실히 하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후우~”
케드론의 한숨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바로 이해되는 베오날드였다.
작위를 받고 ‘귀족’이 된 이상 그 작위에 맞는 권위와 체면을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이 발데리안 가문은 500년이나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오히려 전통으로 만들어 버려서 골치가 아파진 것이다.
베오날드는 다시금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였다.
‘케르웰 녀석의 정신을 개조시켰어야 했는데. 후손이 피해를 보는군. 근데 잠깐만, 이 녀석 말대로라면 발데리안 가문의 입지는 그렇게 좋지 않은 건가? 이 케드론이라는 녀석은 나름 귀족 파벌의 거두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군. 애초에 선조가 내린 ‘유물’ 같은 걸 조사하기 위해 큰돈을 쓰는 시점에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
“뭐, 선조의 유물이라면 그래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지요. 거기에 어떤 보물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죠. 분열의 시대 이전의 통일 제국 시대는 꽤 번영했으니까요.”
“흥, 그거야말로 허상을 좇는 거지. 아무튼 가뜩이나 가문도 귀족으로서 멀쩡하지 않아서 이리저리 치이는 판국인데, 가주님은 변화할 생각을 하지 않으신다. 시대가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지면 변화해야 하는데 말이지.”
평민의 질서와 상식을 지키자고 하면서 변화를 언급하는 게 기묘한 일이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기이할 정도로 이상한 가문의 전통을 좀 제대로 된 귀족의 것으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이라서 케드론의 성향과 다르다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참에 다시 말하지만, 전에 너에게 한 일도 딱히 개인감정으로 한 건 아니다. 내가 나서지 않았으면 너는 필시 다른 감정이 이입된 귀족에 의해 해를 입거나, 아니면 분쟁이 일어났을 거다.”
‘이 녀석, 의외로 괜찮은걸? 가문의 전통이 이상하면 의문을 표할 줄 아는 점도 그렇고… 모친이 잘 기른 건지 아니면 천성이 이런 건지 몰라도 전통과 상식에 대한 생각이 공존하면서 변화도 고려하는 점, 썩 나쁘지 않아.’
베오날드는 그런 케드론의 모습을 기억 속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도적들 파티 같은 식사를 마친 뒤, 베오날드는 발데리안 가문의 마차를 타고 다시 데런의 비밀 저택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돌아오셨군요, 베오날드 님! 갑자기 발데리안 가문으로 가셨기에 무슨 일이 생겼나 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발데리안 가문에 끌려간 거예요?”
“별일 아니었다. 나는 우선 지도 작업부터 마무리하겠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세인에게 물어라. 나는 말해선 안 될 부분도 있으니까. 그럼.”
설명은 세인에게 맡기고 베오날드는 다시 지도 작업에 들어갔다.
겉으론 내색 안 하고 있었지만 속으론 또 다른 흥분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이 이렇게 잘 풀려도 되는 건가? 라고 광소를 터트리면서 행복에 들뜨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든 발데리안 가문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그쪽에서 찾아와 줄 줄이야.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리는군. 베노피스를 찾는 일이 아주 수월하겠어.’
지금 맺은 발데리안 가문과의 우호적인 관계, 거기에 방학 때는 아예 유물을 구실로 발데리안 영지에 데려가 준다고까지 하니 안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발데리안 영지의 위치를 알게 되면 자신의 영지인 베노피스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설사 500년 전과 지금 발데리안 가문의 영지 위치가 달라졌다고 해도 최소한 그 정도 기록은 남아 있을 터. 거기에 유물의 기믹이나 퍼즐을 핑계로 지도를 요구할 수도 있으니 더더욱 최적!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이 지도를 완성하고 나면! 베노피스를 찾을 수 있다!’
확신에 찬 눈을 한 베오날드는 퍼즐처럼 난잡하게 놓인 지도들을 뚫어져라 보며 맞춰 나갔고, 새로운 부분은 그리면서 작업을 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