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정말 갑작스럽게 이렇게 데려가게 된 것을 다시금 사죄하지.”
“괜찮습니다. 어느 분의 말씀이신데 감히 거절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만 연유나 알려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선배님.”
“나 또한 본래 이렇게 다시 부를 일이 없다고 생각했네. 하나 아버님께서 꼭 데려오라고 하시더군.”
“아버님이라고 하면… 발데리안 가문의 주인이시겠군요. 그러니까… 작위가…….”
“발데리안 백작님이긴 하지만, 우리는 검가(劍家)라고 불리는 걸 더 좋아해서 가주님이라고 하는 걸 더 좋아하니 그렇게 불러 드리게나. 백작님이라고 하는 건 근질거려서 못 참으시겠다더군.”
‘…500년이 지나도 가풍은 잘 안 바뀌는 건가? 그 선조에 그 후손이군.’
‘으아아아! 백작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닭살 돋을 것 같슴다! 공작님!’
‘뭐라고 하는 게냐? 기껏 작위랑 영지가 내려졌으니 감사해야지!’
‘아! 싫슴다! 내가 그걸 어떻게 관리함까? 백작이라 부르지 마십쇼!’
‘공식 석상에서 쓰는 정도는 참아라.’
베오날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500년 전의 기억. 그리고 지금 눈앞엔 자신의 충견이었던 자의 후손이 앉아 있었다.
기이한 기분 속에서 베오날드는 과거의 추억과 상상도 못한 현재가 이어지고 있어서 감상적이 되어 가는 기분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발데리안 가문은 분명 자신의 부하였지만 그건 500년 전의 일이었고, 게다가 지금 자신은 이제 18살인 베오날드 캘러메인이었기에 입장과 상황이 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이들에게서 그 녀석이 보이는군.’
“도착했다. 슬슬 긴장하도록.”
‘으음…….’
그리고 어느새 도착한 발데리안 가문의 저택. 아마 본래 영지의 것이 아닌 수도에 머물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라서 그런지 그리 크진 않았다.
하나 그래도 검의 명가라는 가문의 성향은 잘 드러나서 통짜 철로 된 문에 3자루의 검이 양각되어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용인을 제외하고는 저택의 구성원들은 발데리안 가문에 소속된 ‘검사’인 건지 모두 경무장과 검을 차고 있었다.
“저 사람들… 다 가문의 검사들인 겁니까?”
“그래. 하나 대부분 방계 혈족들이고, 마나 호흡법을 익혔어도 깨우치지 못한 얼치기들이지. 아무튼 기사가 되지 못한 것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발데리안 가문의 군대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다.”
“그렇군요.”
“따라오게.”
마차가 멈추고, 베오날드와 세인은 케드론의 뒤를 따라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진 않지만 역시 ‘검가’라고 스스로 칭하는 만큼 장식으로는 대부분 검과 갑주가 전시되어 있었고, 예술품 중에는 전쟁터에서 싸우는 기사들을 그린 것이 매우 많았다.
‘케르웰 녀석의 취향이 전통처럼 내려오는 건가? 50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취향이군.’
“여기서 기다려라. 차는 시종들이 내올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아, 저기, 제 고용인들에게 전갈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사람 한 명 빌려 주시겠습니까? 선배님.”
“무리해서 부른 건 나이니… 그리하도록 하지.”
케드론이 나가고 잠시 후, 먼저 이 저택의 하인이 와서 베오날드에게 펜과 양피지를 건네줬다.
그는 하이디와 셀리나에게 전하는 편지를 적고서 하인에게 곧장 비밀 저택 쪽으로 가라고 전한 뒤,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면서 건장하고 풍만한 체구에 검을 찬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불꽃같은 붉은 수염이 아주 인상적인 남성으로 술 냄새를 풍기면서 달려오더니 베오날드를 노려보며 물었다.
“흠! 네가 베오날드라고 하는 놈이렷다?”
“예, 베오날드 캘러메인이라고 합니다. 캘러메인 백작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성을 받았지만 절반만 그 혈통을 갖고 있어 평민 학부로 들어갔습니다. 아무튼 불러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그런 건 관심 없다. 네놈 이름, 누가 지었느냐? 부모님이냐?”
“예, 부모님께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아마…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와서 신관분들이 제게 지어 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물으시는지요?”
“알 거 없다. 흐으으으으으으음…….”
거기까지 이야기한 발데리안 가주는 굵직한 시가를 꺼내더니 오러로 불을 붙여서 깊게 빨아들였다.
뭔가 갈등하고 고민하는 표정이다.
그것을 보며 베오날드는 혹시 아무리 기록 삭제가 되었어도 자신을 따르던 직속 가문에는 이름이 전해진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발데리안 가주는 재를 한 번 털고서 베오날드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연금술을 할 줄 안다면서?”
“예. 저택에서 발견된 오래된 고서 덕분에 우연치 않게 얻은 재주입니다.”
“그 책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아쉽지만 파기했습니다. 지식은 한정될수록 귀중한 것이니까요. 마나 호흡법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후우우우~”
질문 뒤에 또다시 긴 호흡으로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 고뇌하던 발데리안 가주는 시가를 끄고서 세인에게 말했다.
“옆의 시종, 넌 나가 있어라. 단둘이 이야기해야 할 게 있다.”
“예? 아, 예!”
세인이 나가고 베오날드와 단둘이 남은 발데리안 가주는 초조한 눈빛으로 끙끙대다가 결단을 내린 듯 눈을 부릅뜬 채 베오날드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 대륙은 6개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나라로 합쳐져 있었다. 혹시 알고 있나?”
“예, 알고는 있습니다. 통일 제국 시기라고 보통은 말하죠.”
“그래, 우리 발데리안 가문은 그 통일 제국 시기부터 활약했고, 분열의 시대의 혼란을 넘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명문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지. 분열의 시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아나?”
“모친께 듣기론 통일 제국 시기, 어떤 악독한 간신이 권력을 잡고 전횡을 휘둘러 국력을 약화시켜서 밑에 있는 귀족들이 일어났다고… 배운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악독했으면 신전과 다른 모든 귀족들이 힘을 합쳐서 가문과 이름을 모두 기록에서 삭제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억울한 일의 당사자라서 그런지 감정이 올라오려는 걸 막느라 꽤 힘든 표정을 하는 베오날드였다.
하나 그것이 오히려 발데리안 가주에겐 껄끄러운 일을 말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 그게 지금 모두에게 알려진 ‘역사’들이지. 하나… 우리 가문엔 좀 다르게 전해져 온다.”
“어떻게 다릅니까?”
“분열의 원인은… 그분에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탐욕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왜 그것을 확신할 수 있냐면 우리 가문이 바로 그… ‘이름이 사라진 간신’을 섬기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간신… 아니, 선조님께선 그를 ‘그분’이라고 하셨으니 지금부턴 ‘그분’이라고 하마.”
‘…케르웰.’
“우리 가문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그분’은 비록 사익을 추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국이라는 형태가 무너지지 않게 관리했었다고 하셨다. 오히려 무너뜨린 것은 ‘그분’의 재보와 땅을 노린 자들과 큰 그림을 보지 못한 ‘그분’의 후계자였지.”
‘알테리오…….’
발데리안 가주는 베오날드가 예상했던 통일 제국의 붕괴 시나리오를 그대로 이야기해 나갔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베오날드가 후계자로 점찍어 놓은 자신의 아들에게 배신당해서 축출당하고, 그의 재산과 보물을 노리는 귀족들이 서로 싸우다가 분열하게 되었다는 내용 그대로 말이다.
“그리고 그 참혹한 혼란 속에서 교단과 통일 제국은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려고 더 안간힘을 썼다고 선조님은 전하더구나. 마치 제국의 붕괴는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후세에 전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처럼… 그럴 시간에 세상의 혼란을 막았어야 한다고…….”
“신념이… 광기가 되어 버린 거겠죠. 아마 자신들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저질렀는데, 결국 세상이 오히려 더 어지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니 그걸 부정하기 위해서 미쳐 날뛰는…….”
“오오! 이해력이 아주 좋군! 그래! 바로 그것 같아!”
쾅!쾅!
의자가 부서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후려치면서 베오날드의 말에 흥겨워하는 발데리안 가주.
베오날드가 이렇게 생생하게 분석할 수 있던 것은 그 당시에 집권하던 교황과 자신과 대립하던 어린 황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지금에 이르러선 ‘그분’에 대해선 이제 이름도 전해지지 않고 악의 근원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글자의 기록은 지울 수 있어도 사람의 기억은 말로 전해지는 법. 우리 가문처럼 그 당시부터 살아남은 가문은 진실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을 해 왔지.”
“그래서… 이 장대한 이야기로 저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하하핫, 걱정 말게. 이제 이야기할 테니 말이야. 선조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남겼네. ‘내가… 그분을 위해서 싸우다 죽는 걸 택하지 않고 비굴한 개처럼 놈들에게 빌어서 목숨과 가문을 부지한 것은… 이대로 그 미친 황제와 교단에 의해 그분의 진실과 이름이 사라지는 걸 두려워해서다.’”
‘케르웰…….’
“‘그리고 언젠가 그분의 후손, 수없이 뿌려진 씨앗… 그분의 씨앗 속에… 아! 망할 배신자인 알테리오는 빼고! 후손이 살아남아 있다면 찾아서 그분의 가문을 우리가 다시 일으켜 세워 드려야 한다.’라고 말이야.”
베오날드는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참아 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강하게 허벅지를 꼬집어야만 했다.
기적처럼 기억을 가지고 전생을 한 덕분에 겨우겨우 500년의 시간이 지나고 들을 수 있게 된 대를 이어 내려온 부하의 충성스러운 전언. 가슴이 용암처럼 뜨거워지는 이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표정이 안 좋은데? 뭔가 거슬리는 이야기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머리가 피로해져서 말입니다. 계속하셔도 됩니다.”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다. 아무튼… 우리 가문은 선조님의 말과 함께 ‘그분’의 이름과 이야기를 계속해서 후대에 전하면서 언젠가 ‘그분’의 후예가 우리에게 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올 거라는 확신도 없는데 말입니까? 게다가 ‘그분’의 후예인지는 어떻게 판별하실 겁니까? 아무리 선조님의 말이라곤 하지만, 너무…….”
“시끄럽다! 이건 우리 가문을 세우고, 전설을 남긴 선조님의 절대적인 유언! 그러니 가문을 이어 온 후계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이 이야기 자체가 가문의 후계자로 임명될 때, 가문 최고의 마나 호흡법과 같이 배우는 것이다.”
‘아니, 마나 호흡법은 별도로 알려 줘도 되지 않나? 그걸 500년이나 미련하게 이어 오다니… 케르웰 녀석의 피는 대체…….’
기가 막힌 이야기의 전달 방식에 놀라면서도 혈통은 역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발데리안 가주는 한 번 호흡을 크게 쉬고 난 뒤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이제 왜 네놈을 불러오라고 한 건지 본격적으로 말해야겠군. 우리에게 유언을 전하던 선조님은 우리에게만 준비를 시키는 게 아닌, 당신이 직접 ‘그분’의 후세에게 전해 드릴 유물도 준비하셨다.”
“유물… 말입니까?”
“그래,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봉인된 유물이다. 선조님은 ‘…그분에 필적하는 연금술 지식과 생각을 이어받은 자만이 풀 수 있을 거다.’라고 하셨지. 네놈에게 그것을 푸는 의뢰를 맡기고 싶다.”
발데리안 가주가 무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거절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표정. 하지만 베오날드는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따르던 부하의 가문이기도 했고, 500년 전 케르웰이 남겨 준 유물이 어떤 것일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