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놀랍군. 설마… 진짜로 구해 올 줄이야. 하지만 이게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나?”
“애초부터 불리한 거래를 제안하셨으면서 너무 그러지 마시죠. 하나 지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죠? 수도와 주변 지역에 있는 모든 고서점, 상점, 도서관을 뒤져서 깡그리 모은 겁니다. 돈으로 말이죠.”
“나는 너처럼 계약서에 없는 조항이라면서 빠져나가는 양심 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상인.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게 내 도리지. 후우~ 오늘 일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군. 세인, 여기 돈을 줄 테니 하이디와 같이 식사 후 남은 수업을 듣고 돌아와라. 난 먼저 가겠다.”
“그럴 줄 알고 장소도 미리 마련해 놨습니다, 베오날드 님.”
베오날드는 데런을 따라 그가 마련한 장소로 향했다.
아카데미를 나가서 데런이 마련한 비밀 저택으로 간 다음 곧바로 지도 뭉치들을 펼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지도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 그냥 막 사들인 것이라서 그런지 표기 연도, 지도 위치 등등이 모두 제멋대로였다.
“…어쩌자고 이런 걸 사 왔나?”
“그야 원하시는 물건은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거라서 말이죠. 제게 가능한 건 이것뿐이었습니다.”
“당당하군. 후우~”
하지만 데런의 말이 맞긴 했다.
제대로 된 지도, 그것도 대륙 전체가 정밀하게 나와 있는 지도라면 국가 단위에서 기밀로 다뤄지는 물건인지라 일개 상인이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데런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고, 베오날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무슨 퍼즐 맞추기도 아니고… 골치 아프군. 그나마 익숙한 지형과 지명도 보여서 다행이야.’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났는지 모를 오래된 지도들에서 익숙한 지명과 지형이 발견되면서 어쩌면 이걸로 베노피스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생겼다.
하지만 그것을 판별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베오날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그에게 금화 3개를 던져 주었다.
“이건 뭡니까?”
“식사 및 숙박비다. 그리고 기름도 더 사 와라. 밤중에도 계속 일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서찰을 쓸 양피지와 펜, 잉크도 가져와라. 전갈을 보내야 한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베오날드 님.”
마치 이제부터 섬기게 된 것처럼 예를 갖추는 데런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도 이 지도들을 정리하는 일이 먼저였다.
하이디와 세인에게 보낼 전갈까지 쓴 그는 지도를 맞추는 일을 계속했다.
지도 분류부터 시작해서 지명을 보고 맞추는 일까지 모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씩 윤곽이 잡히니…….’
시간은 걸리지만 그래도 진행은 되고 있었고, 베오날드는 이 지도 뭉치에 있는 자료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지도를 직접 그리기 위해 또다시 데런에게 돈을 지불하고 아예 가죽 하나를 사 와서 직접 그려 나가기까지 했다.
지도를 그리기 위한 전문적인 지식은 부족했지만, 지금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위치면 충분했다.
‘베노피스 영지의 위치만 알아내면 가서 직접 찾아보면 그만이니. 내 비밀 실험실이랑 연구실, 보물고… 아마 남은 게 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비록 제국의 재정을 빼돌려서 이룩한 것이지만 500년 전 자신이 이룬 찬란한 위업을 생각했을 때 그 연구 자료와 재보를 누군가 가지고 있다면 이 문명이 이렇게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열되었어도 분명 뛰어난 누군가가 자신의 재보를 가지고 지배하거나 권력을 잡았어야 정상이지, 아무리 전란으로 모든 게 뒤집혔어도 지금 이 상태는 될 수 없었다.
‘더구나 딱 봐도 멍청한 놈들, 내가 저택에 위장용으로 만든 보물고에 있는 게 전부인 줄 알고 털어 갔거나…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지하까지 뒤져 볼 생각을 못한 거겠지. 아무튼 찾기만… 찾기만 하면!’
‘성맥(星脈)’도 있고, 그 안에 잠든 보물… 아니, 자신이 피땀 흘려서 이룩한 것들이 보관되어 있는 만큼 반드시 찾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지도 맞추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정말 싫었지만 중간중간 모르는 지명이나 또 다르게 변질되어 버린 언어에 대해서는 데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아~ 여기가 아마 론섬 산맥일 겁니다. 여기 있네요. 이게 자리 잡는 귀족마다 자꾸 이름을 바꿔 대니 말이죠. 특히나 전쟁으로 주인이 몇 년도 안 돼서 바뀌는 경우가 많으니…….”
‘그래서 성가셔! 그러니 이놈 힘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군.’
성질은 나지만 지금 이 사안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난감했다.
베오날드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건 크나큰 실책이었고, 자신은 이대로 이 상인 놈과 계속 어울리게 생긴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자에게 아직 자신의 목적을 알려 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나저나 왜 이런 큰 지도를 찾으시는 겁니까?”
“알 거 없다.”
“솔직히 이 정도 윤곽이 나온 것만 해도 인정해 줄 만하지 않습니까? 아, 거기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옆에 마을이 있고 없고가 차이 납니다.”
데런은 베오날드의 지도 짜 맞추기를 도우면서도 끈질기게 그의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떠보았다. 하지만 베오날드는 철벽을 치면서 그의 질문을 받아치고 있었다.
하나 데런도 보통 인간은 아닌 건지 베오날드의 칼 같은 태도를 뚫고 들어오기 위해 질문을 하고 일을 돕는 것을 계속했다.
“정말이군. 아무튼 인정하는 것과 내 생각을 말하는 건 별개의 일이지. 동업자도 아닌데 말이지.”
“그렇죠. 동료와 계약자는 엄연히 다르긴 하죠. 아, 그럼 그 여성분들도 계약자입니까?”
“2명은 가족, 한 명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잠시 어울리는 관계.”
“그럼 저도 이 일이 끝나면 그 이익을 위해 어울리는 관계로 진급합니까?”
“아니, 그냥 아는 사이부터 시작이지.”
아무 거래도, 계약서도 교환한 게 없으니 단계를 철저히 구분하는 베오날드였다.
하나 데런은 그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슬쩍 자신의 노력을 한 번 더 어필했다.
“…이 지도들 사는 데 돈이 꽤 들었는데 말이죠? 발품을 판 거랑 제 인맥을 활용한 건 둘째 치고라도 말이죠.”
“난 꼭 돈을 쓰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
“아, 그렇게 나오시면 섭섭한데요.”
“섭섭하면? 상업에 있어 리스크가 있는 일에 투자 비용을 잃는 건 다반사 아닌가? 자업자득이지.”
정론으로 칼같이 반박을 하자 데런은 돈에 관한 화제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새로운 카드를 뽑아서 내밀어야 할 때였다.
“어차피 ‘상인’ 인맥이 필요하신 건 아닙니까? 연금술사 베오날드 도련님.”
“아무것도 모르고 다가온 건 아니었나 보군.”
“예. 황실 기사 ‘레파르트 경’의 추천을 받은 인재이니 당연히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봤을 때 확인했죠. 보통 사람이라면 그 귀족도 귀족이고, 황녀님 같은 지체 높은 사람 앞에선 주눅 들고 떨어야 정상인데, 베오날드 님은 아주 태연하시더군요. 심지어 귀족 혈통이신 분이 말이죠.”
‘…그야 내 앞에선 다 애송이니까 그렇지. 한 명은 조카뻘이고 말이야.’
겉모습은 20대에 가까운 청년이지만 내면은 전생 이후 나이까지 합치면 100살이 다 되어 가는 노인, 심지어 대륙 전체를 손에 쥐고 흔들었던 대귀족을 지낸 괴물이다.
황녀고, 귀족이고 간에 결국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들에게 쫄아 붙으면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 점이 바로 이 찰거머리 같은 놈이 자신에게 붙으면 이득이 된다는 확신을 줘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좋은 것’에 투자하고 거기에 손을 대는 건 상인의 본분입니다. 더 큰 이득이 올 게 눈에 보이잖습니까?”
“그래, 그게 너희들 본능이지. 하나 그렇다곤 해도 나는 너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을 거다. 철저히 다른 상인과도 비교하고, 재정을 아끼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거다.”
“그래도 좋습니다. 자신 있으니까요.”
“그래? 좋다. 마음대로 해라. 하나~ 아직 지도가 완성된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마라.”
베오날드는 지도 맞추기를 계속했다.
역시 하루 이틀 가지곤 무리였기 때문에 결국 그는 세인과 하이디, 셀리나까지 불러서 이곳을 교대로 지키게 하면서 출결 관리를 위해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고, 돌아와서 작업하는 과정을 일주일 넘게 반복했다.
아무리 오러로 단련된 기사라고 한들 오랫동안 수면 부족이면 지장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베오날드는 아카데미에서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그곳에서 수면을 보충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어차피 수업을 듣는 메인은 세인이었기에 아무 문제는 없었다.
“끄으으으으! 잘 잤다. 세인, 무슨 문제는 없었느냐?”
“예.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다만 수업하시는 교사분의 시선이 좀 날카로웠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어. 하아아암~ 작업이… 워낙 끝나지 않아서 말이지.”
“한데, 지도를 만드실 필요가 있으신지요? 이미 만들어진 것을 쓰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걸 쉽게 구할 수 있으면 그랬겠지. 그러지 못하니 이 고생을 하는 거고. 하나 충분히 수고를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서서히 윤곽이 잡혀 가는 지도에 베오날드는 한시라도 빨리 ‘베노피스’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도를 마무리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떠나려는데, 입구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까탈스러워 보이는 외모에 안경을 쓴 새하얀 제복의 청년, 얼마 전에 봤던 발데리안 가문의 케드론 발데리안이었다.
‘이 녀석이 왜 날 기다리고 있는 거지?’
“크, 크흠! 어이, 잠시 실례를 해도 되겠나?”
“어떤 용건이신지요? 저는 그때 이후로 이제는 확실히 처신을 다스리고 있습니다만? 선배님.”
실제로 입학식 이후로는 알테리오를 저택에 놔두고 걸어서 등교하는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딱히 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얌전히 수업만 받고 돌아가는 나날의 연속이라 귀족의 눈에 거슬릴 일을 하려야 할 수 없기에 이유가 궁금했던 그의 질문에 케드론 발데리안은 안경을 올려 쓰며 답했다.
“아니, 오늘은 뭐라고 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혹시 저녁 식사는 아직인가?”
“아직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좋아. 그럼 우리 집으로 가지. 세파르 경!”
“예! 도련님! 갑니다!”
히이히히히히힝!
베오날드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케드론은 누군가를 불렀고, 그러자 순식간에 마차가 와서 두 사람 앞에 섰다.
그리고 타고 있던 집사가 문을 열고 베오날드와 세인에게 예를 갖추자 세인은 당황해서 베오날드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이 상황에서 뭔가 다른 느낌을 받은 듯 아련한 표정을 한 채로 아무 말이 없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하지. 아무튼 타게.”
‘공작 각하, 식사하셨슴까? 안 하셨다고요? 오케이! 얘들아! 각하 식사 안 하셨단다. 바로 모셔라! 불라도! 빨리!’
‘이야기요?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할 테니, 얼른 타십쇼, 공작 각하.’
‘이거 참…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 들어와 버렸군.’
우연인지 몰라도 지금 이 케드론의 행동이 마침 딱 500년 전 베오날드의 부하였던 케드론의 조상, 케르웰 폰 발데리안이 자신에게 하던 것과 똑같았기에 추억이 떠올라 버린 것이었다.
500년의 시간을 넘어 후손에게서 재현된 추억이다 보니 베오날드는 케드론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고, 결국 발데리안 가문의 마차를 타고 그들의 저택으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