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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76화 (76/259)

[76화]

“제길! 스렌 경! 뭐 하는 겐가?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 다 이겼지 않은가? 계집이라 봐주는 겐가?”

“자자, 진정하시죠, 유리스 선배님.”

생각해 보니 선배라서 호칭을 선배님으로 정정한 베오날드였지만 그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저런… 검술에 대해 모르는 주인을 섬기면 피곤하지. 차라리 말이나 안 하면 좋으련만. 이래서야 따르는 기사가 낼 힘도 못 낼 텐데 말이지.’

재잘거리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유리스와 달리 베오날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하이디를 믿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온전히 싸움에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승리도, 패배도 모두 그녀에게 맡긴다는 신뢰.

그리고 맡긴 이상 자신은 승패에 따른 다음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 기사, 의외군. 몸에 둘러진 오러는 하급 기사 수준인데 기량이 보통이 아니야. 역시 수도는 수도인가?’

저 스렌이라는 기사는 확실히 과거 싸웠던 중급 기사인 벤트 경보다 대인전에서 뛰어난 것 같았다.

오러의 양은 적었지만 아주 효율적으로 쓰면서 하이디의 맹공을 흘리거나 비껴 내면서 날카로운 반격은 물론 공격에 허와 실을 적절히 섞고 있어서 그녀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단하군.’

스렌 경, 올해 나이 41세. 그의 집안은 대대로 파르멘 가문의 기사 혹은 군사로서 복무하였고, 그 또한 부친에게서 배운 마나 호흡법으로 기사의 자리에 올랐지만 오러와 소통하는 재능이 부족해서인지 만년 하급 기사 신세였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노력하는 타입으로 가진 것이 적다면 효율적으로 쓰면 된다고 생각하여 자신만의 ‘검’을 갈고닦았고, 적은 양의 오러를 날카롭게 컨트롤하는 방법을 뼈를 깎아 가면서 완성했지만 여전히 중급 기사의 시험은 매번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견뎌 내며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동안 많은 절망이 있었지만 묵묵히 견디면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흐아아압!”

자신이 상대하는 이 여기사에게서 그는 자질과 재능의 차이라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피와 땀, 눈물을 짜내면서 만든 ‘검’의 허와 실. 이 여기사는 분명히 속아 넘어갔는데도,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는데도 그 순간순간마다 갑자기 성장하면서 그걸 뛰어넘어 버렸다.

‘…본래라면 스무 번도 넘게 찔렸어야 했다.’

빠르게 휘두르는 허세에 속은 걸 흘려서 완벽하게 찔러 들어갔지만 그녀의 육체가 회피 불가능한 자세에서 움직였고, 황금빛 오러가 빛나면서 그 움직임을 현실로 만들어서 피했다.

한두 번이면 자신도 우연이라고 인정하였을 테지만 지금 이런 일이 스무 번 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 번은 안 당하겠다는 듯 적응해 버렸고, 다음 카드를 써서 던져서 또 위기를 만들면 그녀는 또 진화했다.

‘이게 재능……. 거기에 축복받은 육체, 믿음과 신뢰로 바라봐 주는 현명한 주군까지……. 기사로서 가지고 싶은 것을 모두 갖추고 있군.’

옆에서 마치 원숭이인 양 발광하면서 떠들고 있는 자신의 주군과는 다르다.

믿음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의 기사가 지금 자신을 양식으로 성장하는 것을 간파하고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가 가는 길에 존재하는 장애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까지 떠올리게 된다.

“후우… 하아아아아아앗!”

‘…그렇다면 더더욱 험한 장애물이 되어 줘야겠군.’

“윽!”

채애애애애앵!

승패는 이미 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스렌 경이 평생을 일구어 만들어 놓은 카드는 몇 장 남지 않았고, 그것을 다 써도 이 아이는 아마 그것을 뛰어넘을 것이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난다면 주인에게 다소 꾸지람은 듣겠지만 어차피 기사는 중요한 인력이니 쉽게 버림받지 않을 터였다.

하나 그래도 스렌 경은 자신의 모든 카드를 다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녀의 전설에… 내 이름을 새기고 싶으니 말이지!’

나중에 그녀가 성장했을 때, 분명 싹트지 않은 시기에 만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아니, 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스렌 경은 지금까지 무미건조했던 기사로서의 삶에 의미가 생겼다.

“잡았… 습니다!”

‘역시… 훌륭하군.’

태애앵! 팍!

스렌 경에게 예정처럼 찾아온 패배. 결국 그녀의 회심의 일격에 검은 튕겨 나가서 땅에 꽂히고, 목에 그녀의 검이 겨누어진다.

땀에 젖은 연한 금발과 드디어 따라왔다는 성취감이 가득한 하이디 경의 눈이 너무나 찬란하게 느껴졌다.

스렌 경은 이 광경은 분명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눈을 감고 선언했다.

“…패배를 인정한다.”

“이… 이! 쓸모없는 놈 같으니! 진작 처리했어야지! 스렌 경!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자네는 우리 가문 최고의 듀얼리스트(결투사)이지 않은가? 지는 게 말이 되냐고!”

“죄송합니다, 도련님.”

주군에게 승리를 바치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했으며 마음속엔 기쁨이 맴돌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검으로 인해서 저 전설이 될 후배가 발돋움한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족의 영역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래도 ‘기사’로서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뿌듯해했다.

“아무튼 승패는 갈렸고, 명예를 걸고 싸웠으니 대가를 받아야겠죠. 선배님.”

“힉! 윽! 그… 그러니까 얼마라고 했지? 화, 황녀 전하의 명예만큼이면…….”

유리스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거창하게 주장한 ‘황녀 전하의 명예’. 과연 그 액수를 얼마로 매길 수 있을까?

적게 매기면 적게 매기는 대로 ‘황녀 전하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은 오히려 자신이 되어 버릴 것이고, 많이 매기면 그 액수를 지불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유리스가 고민하는 사이, 베오날드는 그의 옆에 무릎 꿇고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스렌 경을 보며 말했다.

“뭐, 됐습니다. 덕분에 우리 하이디 경이 많이 배웠습니다. 대가는 그 수업료로 퉁치죠.”

“예? 베오날드 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리스 선배님, 스렌 경. 하이디, 너도 깨달은 게 있다면 예를 갖춰라.”

“아! 예! 저,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베오날드 일행은 떠나 버렸고, 유리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스렌 경을 바라보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세를 유지하며, 자신을 기억해 준 기사와 그녀의 주군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그리고 베오날드 일행은 하이디가 결투로 인해 땀을 너무 흘렸고, 시간도 많이 허비한 탓에 그럴싸한 식당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식자재를 사서 숙소에 돌아가서 밥을 먹기로 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입학식 첫날이 끝이 났다.

***

며칠 뒤, 아카데미 평민 학부.

애초부터 귀족과 평민은 그 진로의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아카데미의 갈라진 학부에서 배우는 것도 달랐다.

귀족 학부에서는 정치, 외교, 경제, 기사, 군사학 등등… 지배층을 위한 교육들이 전공으로 나열되었으며 평민 학부는 수학, 일반 행정 및 상업, 대장장이와 같은 길드에서 지원하는 과목들도 있었고, 그런 지원에 따라 사라지거나 새로 생기는 게 많아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조직의 인원 관리의 효율을 올리기 위해서는…….”

베오날드가 지원한 것은 일반 행정 전공. 어제 ‘관료가 되려고요?’라고 묻던 데런의 말대로 그가 신청한 전공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반 행정이었지만, 이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인에게 배우게 하려고 한 것이다.

“태연하게 해라. 눈치를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한다.”

“예, 예. 베오날드 님.”

베오날드는 수업의 필기를 시킨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자신의 옆에 앉혀서 수업을 듣게 하고는 자신은 그녀에게 해석을 듣는 척 연기하며 그동안 고서점에서 사 온 책들을 연구하고 있었다.

연기로 과연 이것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강의실 안에는 베오날드처럼 최소한 직접 나와서 공부하는 학생은커녕 술 취해서 하인이나 대리인에게 대신 수업을 듣게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일단… 전부 성인이고, 자신의 책임이라지만 기가 막힐 노릇이군.’

그들은 대부분 부호나 상인의 아들들로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전공이라 성실치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배움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도 모자라서 시간 낭비까지 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 봐야 결국 남의 사정. 근데 세인은… 사실 내가 강요한 건데 잘해 주고 있으니 기특하군.’

세인의 경우 본디 메이드였는데 현재 신뢰할 수 있는 인원이 없어서 강제로 공부시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항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한 치도 소홀함 없이 집중해 주고 있으니 너무나 고마운 베오날드였다.

자신처럼 야망이나 목적이 확실한 게 아닌 이상 공부라는 것을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자,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 거기 대리인분들은 꼬옥 수업 내용을 학생들에게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늘 수업이 끝나자, 세인은 곧바로 펜을 놓고 책을 닫은 다음 그대로 엎어지면서 피로를 호소했다.

옆에 주인까지 있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집중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휴우우~ 끝났네요. 아, 죄송합니다. 베오날드 님.”

“아니, 아니. 괜찮다. 풀어져도 괜찮아. 두뇌를 사용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지치면 쉬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게다가 애당초 이건 내 압력에 의한 것이니…….”

“아뇨.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마님의 강요로 이것저것 배울 때보다 훨씬 나은걸요.”

일생을 로이엔 남작가나 메이라 부인 같은, 성격도 지X인데 폭력까지 사용하며 온갖 암투와 암습의 버림패에 동원되어서 버려지는 걸 두려워하던 처지에 비하면 베오날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절대로 베오날드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가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슬슬 나가지.”

“예.”

“여기 계셨군요! 베오날드 님!”

그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베오날드의 귀에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진한 갈색 피부의 미남이 신나서 달려오고 있었다.

바로 상인 가문 출신의 데런으로, 베오날드는 그 찰거머리 같은 근성을 보고 표정을 구겼지만 그는 여전히 꿋꿋한 상인의 미소를 지으면서 베오날드 앞에 도달했다.

“후우~ 구했습니다! 지도!”

“엑…….”

“여기 보시죠.”

촤르르르륵!

그가 내민 것은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두툼한 서류 뭉치였다.

베오날드는 그것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이내 이해할 수 있었다.

서류 하나하나가 지도이면서 지도 조각. 이것들을 짜 맞추면 거대한 지도가 되리라는 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베오날드는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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