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75화 (75/259)

[75화]

“저기, 베오날드 님, 여차하면 제가 쫓아 보낼까요?”

“아니, 어차피 오늘은 전공만 선택하고 가면 그만이다.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내버려 둬라.”

“예.”

하이디의 말에 베오날드는 여전히 냉정한 답변을 내놓았다.

확실히 상인의 인맥은 필요하고, 있으면 분명히 득이 될 것은 사실이지만, 냉정하게 상업에 한해서 볼 경우 지금 자신이 가진 지식과 저 상인 가문의 자식을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와 기사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제1원칙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였기에 베오날드는 무조건 그를 피하고자 했다.

“이걸로 전공 선택과 수업 신청은 끝났군. 이제 제출하고 돌아가면…….”

“어라? 관료가 되시게요? 그러실 분으론 안 보이는데?”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상인. 너와는 상대 안 한다.”

아직도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말을 걸자 날카롭게 반응하는 베오날드. 하이디와 세인에게는 손대지 말라고 했기에 둘은 데런을 철저히 무시한 채 베오날드를 따를 뿐이었다.

그런데도 데런이라는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따라오면서 말을 걸었다.

“상인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으십니까?”

“감정만 있을까? 당한 것도 있으니 이러는 거지. 황금에 미친 벌레들 같으니…….”

“하지만 지금 세상엔 없어서는 안 될 벌레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데런이 날카롭게 받아쳤지만, 베오날드는 성가시다는 생각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는 불쾌감을 담은 시선으로 데런을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렇지. 그래서 뭐가 하고 싶은 거냐?”

“일단 친구 사이부터 시작해서 상업적인 인맥을 열고 베오날드 님이 하시는 각종 일을 도맡아 하며 섬기고 싶지요.”

“말이 섬긴다는 거지, 내 밑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거 아닌가?”

“하하하,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요.”

“좋아. 그러면 내 조건 하나만 들어주면 기꺼이 네놈과 어울려 주지.”

“오? 뭡니까?”

드디어 문이 열린 것인가? 하고 기대하는 눈빛이 된 데런이었지만 베오날드는 이 녀석에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 지금 가장 구하기 힘들면서 시험해 보기 딱 좋은 과제가 있었기에 그에게 바로 제시했다.

“지도를 가져와라. 그것도 대륙 전체가 그려진 세계 지도이면 더 좋다. 최소한 현존하는 여섯 나라의 위치와 주요 산맥이 모두 그려진 것이어야 한다.”

“엑? 지도 말입니까?”

“그래. 상인이라면 그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못한다면 더 이상 치근덕거리지 말고 꺼져라.”

“지도라. 지도라……. 으으으으음…….”

500년이 지나도, 지도는 역시 지도. 그 가치는 단순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략, 전술, 경제 등등 여러 문제를 설계할 수 있고, 또 현재 500년간의 분쟁으로 인해서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 유실된 것은 물론, 여섯 나라가 서로 전쟁을 벌이고 견제하는 상황에서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 수는 없으리라.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되겠는지요?”

“…마음대로. 하나 너무 오래 걸리면 안 되는 건 알고 있겠지?”

“하하하, 그 정도는 당연합니다. 그럼 신속하게 준비해 오겠습니다.”

“그러도록.”

드디어 저 찰거머리 같은 것을 떼어 내었기에 베오날드는 만족했다.

그 뒤 학과별 수업 일정표를 받고 난 뒤, 아카데미를 빠져나갔다.

본격적인 수업은 내일부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왕 온 거 수도의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가려고 일행과 함께 식당으로 향하는데, 아카데미를 나가자마자 또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하얀 제복인 것으로 보아 귀족 학부 학생인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아주 더러운 인연이 달라붙는 것의 연속이군.’

“네놈이 베오날드라고 하는 놈이군.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자애로우신 황녀 전하의 은혜를 그런 식으로 배반하다니! 잡종 놈! 용서 못한다.”

“귀족가 자제분 같으신데, 우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는지요?”

“흥! 그렇지 않아도 이제부터 할 참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파르멘 남작가의 삼남이자, 이 제국 아카데미의 정치 전공 2학년, 유리스 파르멘이다. 그리고 여기는 내 충성스러운 기사 스렌 경이지.”

“그래서, 어쩌고 싶으신지요? 제가 황녀님께 가서 사죄하면 되는 겁니까?”

“웃기지 마라. 이미 상처 입은 그분의 마음이 고작 네놈의 사죄로 풀릴 것 같으냐? 그분의 마음과 명예를 위해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퍽!

베오날드의 제복 가슴에 하얀 장갑이 부딪쳤고, 그는 그것을 집어 들며 유리스를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안에서 귀족 간의 결투가 있을 거라는 예상을 하긴 했지만, 입학 당일에 이렇게 사건이 연속으로 터지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무튼 장갑을 받은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유리스에게 물었다.

“그럼 결투는 어떻게? 서로 직접?”

“웃기지 마라, 잡종! 네가 ‘오러’를 사용하는 건 다 알고 있다. 그래서야 공평하지가 않지. 그러니 내 기사 스렌 경이 나 대신 명예를 걸고 싸울 것이다!”

자기가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면서 큰소리치는 게 언뜻 보면 우스울 수 있지만, 전생에 일개 연금술사로서 ‘대리 기사’를 세운 적이 있는 베오날드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해 둔 멘트를 꺼냈다.

“그렇군요. 그러나 제가 ‘오러’를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전 ‘기사’로 서임을 받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기사 간의 결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대신 싸울 명예로운 기사를 내세우죠.”

“흥, 그럴 수 있다면 하도록 해라.”

“예. 소개하지요. 캘러메인 백작령 아래에 있는 중급 기사 젤커드 자작의 따님인 하이디 젤커드 경입니다.”

“뭐라고?”

“저는 잡종이긴 하지만 일단 귀족의 혈족, 그리고 기사 대 기사. 결투에 아무 문제없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유리스 경, 스렌 경?”

스렌 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고, 유리스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빛으로 베오날드와 하이디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은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는 스렌 경에게 베오날드가 얻어터지는 광경을 보고 싶었을 테지만,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좋다. 그럼 바로…….”

“여긴 사람들의 눈이 많으니 장소를 옮기는 건 어떨는지요? 또 결투의 승리 조건도 정하고, 승리하고 패배했을 때 상호 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합의를 끝내고 전투를 시작해야지 않겠습니까?”

“끄으으으응!”

단순히 그냥 손만 봐줄 생각으로 내지른 것이었는데 상대는 그래도 귀족가의 혈통이라서 그런지 너무나 세세하게 잘 알았고, 결국 그들은 베오날드의 말대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장소는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대련장으로 오늘은 입학식이 있어서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

“승리 조건은 뭘로? 퍼스트 블러드가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시시한 결투를 누가 하나? 당연히 한쪽이 더 이상 못 싸우거나 항복할 때까지지!”

‘하여간 헛바람만 가득 차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계속하는군. 후우~ 대체 집안에서 어떻게 교육시킨 건지.’

아무리 귀족끼리 결투가 많다곤 하지만 저렇게 노빠꾸 같은 조건을 거는 건 정말로 가문의 비밀을 건드리거나 심한 모욕을 당했을 때나 하는 거였다.

지금 이런 사사로운 시비는 그냥 피만 살짝 보고 우열을 가리는 퍼스트 블러드 정도만 하면 되는 건데 일을 키우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하이디, 상대의 기량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이건 너에게 좋은 기회다. 이것도 기사로서 실전 경험을 쌓는 거니 마음껏 해 보거라.”

“예.”

“조언을 해 주자면 결투는 전쟁과 다르다. 전쟁은 보병을 밀어 넣거나 정찰을 통해 상대의 역량을 알아볼 수 있지만, 결투는 일대일로 하는 것이다. 상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 때문에 처음엔 무리하지 말고 상대의 수준을 알아본다고 생각하고 싸워라.”

“예!”

하이디는 베오날드의 말에 대답을 하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무뚝뚝한 스렌 경이 먼저 검을 뽑자, 하이디도 검을 뽑은 상태로 서로를 보며 대기, 그다음 베오날드와 유리스가 승리했을 때와 패배했을 때의 요구 조건을 정하고 마무리했다.

“내가 이기면 너는 곧바로 아카데미를 떠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마라.”

“그럼 제가 이긴다면 어떻게 할까요? 으으음… 그렇군요. 황녀 전하의 명예를 걸고 한 싸움이니 그만큼 금화로 받으면 되겠군요. 유리스 경이 생각하시는 황녀 전하의 명예만큼의 액수를 받겠습니다.”

“흥! 스렌 경이 질 일은 없지만 좋다! 그리하도록 하지. 그럼 스렌 경! 시작해도 좋다!”

“하이디! 시작해라!”

챙!

주인들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침묵을 지키던 스렌 경이 먼저 오러를 끌어 올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하이디는 순간 놀랐지만 막아 낼 수 있었고, 이어서 둘 사이에 치열한 검격전이 시작됐다.

스렌 경이라는 기사는 확실히 유리스라는 귀족 도련님이 대(對) 기사전을 상정해서 데려온 기사인 만큼 매우 노련하고 민첩한 검술을 보여 주고 있었다.

“…….”

“좋아! 바로 그거야! 스렌 경, 밀어붙여!”

‘으음, 이거 하이디에게 좋은 양식이 되겠군.’

챙! 차아앙!

베오날드의 말대로 하이디는 오러를 끌어 올려 스렌 경의 공격을 맞받아치는 방식 위주로 싸우며 상대의 역량을 판단하고 있었다.

저번 전쟁을 겪은 뒤에도 끝없이 마나 호흡법과 검술을 단련했지만 그녀의 약점은 여전히 부족한 경험이었는데, 그녀보다 신체 능력과 오러는 약하면서 경험이 풍부한 상대와 싸우는 것은 아주 좋은 수련이었다.

“…으음!”

‘속도가… 달라졌! 아니, 이건! 큭!’

‘역시 노련하군. 오러의 양이라든가 힘, 속도에선 밀리는데… 기술만으로 하이디를 밀어붙일 줄이야. 특히 검의 속도 조절과 페인트를 넣는 게 예술이군.’

베오날드가 감탄할 정도로 스렌이라는 기사는 느리다가도 빠른 검을 휘두르거나, 빠르다가 느린 검을 휘둘러 하이디의 방어를 넘어서 그녀를 위기에 빠뜨렸다.

하지만 하이디는 자신을 바로잡으면서 바닥에 구르는 수모도 견디며 그것을 피한다.

“꽤… 제법.”

“후우…….”

하이디는 일대일 결투, 심지어 주군의 명예를 걸고 하는 결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대는 딱 봐도 일대일 결투가 전문인 기사라서 기교와 기술이 너무나 뛰어났다.

예전 중급 기사 벤트 경과 맞서기도 했지만 그땐 전장이라는 요소가 변수가 되었는데, 이번엔 순수한 일대일에 아무것도 없는 평탄한 지형이라 변수도 창출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하이디는 마음을 굳게 먹고, 계속해서 스렌 경의 검을 받아 내면서 틈을 찾기 위해 애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