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입학식이 끝난 뒤, 각 학부는 자신들의 배움의 터로 향했고, 베오날드도 해방되었구나 싶어서 옳다구나 이동했다.
다른 검은 제복을 입은 학생들과 같이 평민 학부로 향하며 밖에서 기다리던 세인과 하이디와 합류했다.
귀족이 아니더라도 사용인이나 호위를 거느리는 건 부유한 상인 출신 집안의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기에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보자. 이제 남은 게… 전공 선택이군. 그나저나 하이디, 알테리오는 잘 가둬 놓았겠지?”
“예. 철창문도 단단히 잠가 놨습니다.”
알테리오는 말이 아니라서 이 아카데미에 들일 수 없기 때문에 현재 수도에 셀리나의 명의로 구매한 작은 집에다 보관 중이었다.
왜 굳이 셀리나의 명의였냐면 엄연히 그녀는 마탑 소속의 마법사였기에 연구 자료 및 지식을 보호받는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 절도와 연구 자료 탈취는 명분이 천지 차이이니 말이지.”
“이 정도로 사용하실 거면 셀리나 님에게 좀 더 신경 써 주셔도 되지 않을는지요?”
“받은 만큼은 쓰고 있다. 난 그렇게 양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 이거 미끼를 문 모양이군.”
평온히 대화를 나누면서 학부 건물에 거의 다 도달해 갈 즈음, 갑자기 하얀 제복을 입은 한 무리가 베오날드의 앞에 나타났다.
올 것이 왔다고 해야 좋을까? 아니면 베오날드가 불렀다고 해야 할까? 한 무리의 인파는 베오날드를 반쯤 둘러싸더니 그들 중 한 남성이 다가왔다.
‘이건 상당히 빠르군. 낚시터였으면 아마 집어넣으면 바로 무는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베오날드와 맞먹을 정도로 크고 건장한 체격에 안경을 쓴 까탈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학생이었다.
귀족 학부의 특징인 하얀 제복의 어깨엔 견장이 하나 더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높은 학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다음 가슴엔 검과 방패가 교차하는 문양이 하나, 그 옆에 3자루의 검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 문양이 하나 더 새겨져 있는 걸 봐선 ‘기사 전공’, 거기에 명문 무가 출신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 녀석인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애송이가 말이야.”
베오날드는 나서려는 하이디를 손으로 제지하면서 한 발 앞으로 나가 그 사내와 눈을 마주한 채 먼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면서 이에 따른 답변을 했다.
“제가 주제는 모를지라도 예의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한데 선배님께선 이름을 밝히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아, 지금 하는 일이 명예롭지 않다는 걸 알고 계신가 보군요.”
“…뭣이? 내가 누군지 모른… 아니지, 시골에서 뛰어놀던 잡종 개이니,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당연한가? 듣고 놀라지 마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칼레움 제국이 생기기 전부터 검의 명가였던 발데리안 가문의 일원, 케드론 발데리안이다.”
‘발데리안… 이라면?’
잘난 듯 자신을 소개하는 청년의 말에 순간 베오날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익숙한 가문명, 칼레움 제국이 생기기 전이라면 분열의 시대 이전, 통일 제국 시절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이름. 그 두 마디가 단서가 되어 베오날드는 기억 속에 정리된 자료를 빠르게 뒤지기 시작했고, 드디어 떠올릴 수 있었다.
‘케르베로스의 검. 검을 든 그들이 있는 곳은 지옥문이 되리라. 검과 방패를 든 지옥문의 맹견들. 검랑(劍狼) 케르웰 폰 발데리안의 가문인가?’
“하긴 너 같은 시골뜨기에게 말해 줘도 이해 못하겠지. 자, 봐라.”
‘그야 내가 키우던 맹견이었으니까!’
500년 전, 베오날드 폰 노이멀 공작 시절, 그는 자신의 가문만으로 대륙 전체의 지배를 유지하는 것은 힘들었고, 당연히 파벌이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발데리안 가문은 바로 노이멀 가문 아래의 파벌 중 하나, 즉 자신의 부하였던 것이다.
본디 용맹하지만 성격이 더러운 ‘개’ 같은 가문이라고 놀림을 받았었지만 베오날드와 함께한 덕분에 그래도 명문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아무튼 아는 집안이 나오니 뭔가 반갑군. 한데 본래 저 집안 문양은 케르베로스 머리가 문 검 3자루였을 텐데… 왜 바꾼 거지? 아~ 또 나 때문인가?’
“이 오러를! 우리 가문에 전해져 오는 비기를!”
불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오러. 케드론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진한 붉은 오러를 본 베오날드는 역시 그가 자신이 아는 발데리안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본래 목적은 일단 이 아카데미에서 난리 치는 것을 통해 귀족 세력들을 확인하고자 한 건데 자신이 아는 가문, 그것도 옛 부하의 가문이 나타나자 기분이 묘해진 것이다.
‘본래는 대립각 세우면서 정보를 얻으려 한 건데, 하필 발데리안 가문이라니.’
자신이 키우던 개, 그것도 매우 충성스럽고 용맹했던 가문을 상대로 대립하기엔 껄끄러웠던 베오날드는 원래의 계획을 수정해서 사죄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은 몰라뵈었습니다, 하면서 머리를 땅에 박으면 되겠…….’
“여기서 무슨 소란인 거죠? 케드론 경?”
“젤시 황녀 전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일을 심플하게 해결하려고 머리를 썼는데, 난데없이 추가적인 인물이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하얀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한 무더기 더 나타나서 베오날드의 뒤쪽에 자리 잡고는 그중 누군가가 나선 것이다.
푸른빛이 진하게 감도는 은빛의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강단 있어 보이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소녀가 당당히 걸어 나와 케드론 경을 질타했다.
케드론 경의 반응과 제복에 칼레움 제국 황실을 뜻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로 봐선 황녀인 게 사실이리라.
“어쩐 일이긴요. 당신이 이런 짓을 할까 봐서 왔지요.”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황녀 전하. 전 엄연히 아카데미의 규칙을 비롯해서 세상의 질서와 기강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황녀 전하라고 존대하긴 했지만 자신의 의지는 굽히지 않는 뻔뻔함이 담겨 있는 말.
발데리안 정도의 가문이라면 명문 무가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 제국의 군사력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황실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는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본래 노리던 거였지만, 이건 좀 난감하군.’
이 상황 자체는 베오날드가 반기는 것이 맞았다.
귀찮게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어디로 찾아갈 필요 없이 이렇게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면 각 세력이나 가문의 대립 구도와 상황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고, 주요 인물들을 파악하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과 인연이 있는 가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하긴 발데리안 가문은 맹견. 길들이면 확실히 쓸 만한 카드이고, 정통 무가인 만큼 저항도 거세니까 협상으로 타협했겠지. 끄으으응… 아무튼 그렇게 보니까 이게 또 감정이 미묘해지는군.’
자신의 충견이었던 발데리안 가문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니 아까까지만 해도 오만하고 깐깐해 보였던 저 얼굴이 그냥 귀여운 조카가 투정 부리는 걸로 보이는 베오날드였다.
게다가 주제넘은 평민을 짓밟아서 기강과 권위를 바로잡는 것 또한 ‘귀족’으로서의 사명이었기에 오히려 큰집 삼촌 입장에선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대견한 일이었다.
“질서와 기강? 이자는 그저 자신의 그리폰을 타고 조심히 등교해서 입학식을 한 게 전부일 터입니다. 심지어 그는 안전을 위해 그리폰을 철저히 구속까지 했었죠. 그런 그가 어느 부분에서 질서와 기강을 흩트린 게 있습니까?”
“그, 그건…….”
‘하지만 역시 머리가 안 좋은 건 유전인가? 아니면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덜 확립된 건가?’
황녀의 정론에 어쩔 줄 모르고 밀리는 케드론 경이었다.
일부러 시선을 끌려고 좀 오버해서 그리폰으로 온 건 맞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안전이나 교칙은 신경 썼기에 반박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귀여운 조카가 난감해하는 것을 본 베오날드가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나섰다.
“황녀 전하, 무례하게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이건 제가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무릇 세상엔 법전에 올라와 있지 않아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저는 그것에 익숙지 않아 몰랐던 것이고, 케드론 경은 제게 그것을 알려 주고자 하신 것뿐입니다.”
“네? 하, 하지만…….”
“그,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베오날드가 탈출구를 만들어 주자 케드론은 잽싸게 거기에 편승해서 뻔뻔하게 긍정했고, 오히려 도와주러 왔다가 역습을 당한 젤시 황녀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베오날드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 하는 인간인가? 하는 듯한 얼굴. 그리고 반대로 케드론은 황녀에게 한 방 먹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준 베오날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말이다.
“아무튼 제가 처신을 잘못하여 지탄을 받은 것입니다. 케드론 경에겐 감사를 표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녀 전하.”
“…그, 그래요. 그러면 됐습니다.”
결국 베오날드의 배신에 당황한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며 물러났다.
여기서 황녀와의 관계를 악화시켜서 좋을 건 없지만 그래도 역시 귀여운 조카뻘이 곤란해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고, 베오날드는 전생에 귀족파여서 그런지 그쪽으로 기울어 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케드론 경. 제가 제대로 처신을 못한 탓에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앞으론 신분에 맞게 처신을 잘 하도록 하지요.”
“…그, 그렇게 하도록. 알면 됐네. 알면…….”
그리고 졸지에 자신이 한 소리 하려던 자에게 구출받은 케드론 경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다가 일단은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여기서 계속해서 역정을 내 봐야 자신의 평판만 깎이게 될 테니 말이다.
아무튼 혼란은 그렇게 끝나고, 베오날드 일행은 무사히 평민 학부 건물로 향했다.
“둘 다 아주 잘 가만히 있어 줬다.”
“하마터면 어떻게 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베오날드 님. 어째서 황녀님이 아니라 저 케드론 경을 두둔해 주신 겁니까?”
“그러게요. 저도 그게 너무 궁금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핍박받는 자신을 구하러 와 주신 저 아름다운 황녀 전하의 편을 들거나 그녀의 뒤에 숨었을 텐데 말이죠.”
세인과 하이디가 한마디씩 하는 사이에 갑자기 누군가의 말이 하나 쏘옥 하고 끼어들어 왔다.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옆으로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끼어들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진한 갈색 피부를 가진 베오날드보다 약간 작은 남성이 호기심 가득한 반짝반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오날드와 마찬가지로 검은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봐선 분명 평민 학부. 한데 베오날드는 그의 진한 갈색 피부색을 보곤 머릿속에 있던 익숙한 단어를 꺼냈다.
“샤남인… 인가?”
“오! 샤남을 아십니까? 그거 저희 할아버지나 쓰는 상당히 오래된 단어인데 말이죠. 예, 저희 영혼의 고향이라곤 합니다만, 이젠 그저 제국인일 뿐이죠. 하하하, 물론 알게 모르게 차별은 있긴 해도요.”
자신도 모르게 500년 전에 구분하던 인종에 대해 언급하고는 아차 한 베오날드였지만,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받아 주었다.
덕분에 대답하기 쉬워진 베오날드는 적당한 변명을 대면서 남자의 정체를 물었다.
“아, 그냥 우연히 책에서 봤지요. 그래서 누구신지?”
“이거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데런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상인의 아들이죠.”
“베오날드 캘러메인입니다. 일단 혈통은 귀족이긴 하지만 잡종이라서 귀족 학부엔 지원 안 했습니다. 그런데 소개도 없이 왜 달라붙은 것인지?”
“아, 역시! 자태라든가 기품이 남다르더니 평민이 아니시군요. 말씀 놓으셔도 됩니다. 귀족의 피를 받은 고귀하신 분 아닙니까? 아무튼 아까 전 이야기 말입니다만, 정말 궁금해서 말이죠. 다시금 여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황녀 전하를 따랐을 텐데… 어째서 케드론 경을 도우신 겁니까?”
귀여운 조카뻘 아이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 없었던 베오날드는 적당히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논리적으로 봐도 사실 케드론 경을 도울 이유는 없었기에 그것을 설명하려다간 오히려 자기 말에 자기가 넘어지는 꼴이 되고 만다.
“가장 빨리 불을 끌 방법이라서 그런 것이지. 그대로 그 아가씨의 편을 들었다면 소란이 더 커졌을 거다. 아무튼 이걸로 되었지? 그럼 이제 서로 갈 길을 가지.”
“아아, 잠시만요, 베오날드 님. 같은 신입생인데 이러지 마시고, 서로 친교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예? 나름 상인의 인맥이니 결코 나쁘시지 않을 겁니다.”
‘상인이니까 싫은 거다.’
전생에 베오날드는 상인에게 피해를 본 적이 상당히 많았다.
일단 귀족이라서 상인들의 상술과 재간, 계략을 쉽게 알아채지 못하고 신뢰 하나로 일을 맡긴다든가, 자신이 특출한 아이디어로 만든 상품의 레시피를 멋대로 복제해 간다든가, 마탑의 의뢰를 받아서 본래 주기로 한 연금술용 재료들의 공급을 끊어 놓는다든가.
‘워낙 당한 게 많아서 내가 직접 상업이랑 경제학을 공부했지. 그리고 빚쟁이 상인들의 빚을 대납해 주고, 노하우도 전수받고 말이지.’
그래서 베오날드에게 있어 상인이라는 존재는 돈을 갉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벌레 같은 존재로 각인되어 철저히 데런이라는 남자를 무시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할 생각을 안 하고 계속해서 베오날드 일행을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