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봄이 온 어느 날 아침.
올해 드디어 18세가 된 베오날드는 아카데미에서 지급해 준 제복을 입고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고 있었다.
검은색 바탕으로 된 제복은 아카데미 학생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세련된 멋을 자랑했고, 바지와 구두 또한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베오날드의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와 너무 잘 어울려서 원래부터 짜 맞춘 것 같은 멋이 났다.
“정말 멋지십니다, 베오날드 님.”
“그럼, 누구 주인인데? 너도 잘 어울리는구나.”
“제 옷까지 새로 해 주실 필요는 없는데…….”
“아니. 기사에게 검과 갑주, 말이 필요하다면 메이드에겐 당연히 계절에 맞는 메이드복이 필요하지. 나중에 여름이 다가오면 그때 또 한 벌 맞춰 주지. 봄가을용, 하복, 동복 이렇게 기본으로 세 종류는 필요할 테니 말이야.”
세인 또한 기존에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입던 메이드복이 아닌 깔끔하고 움직이기 쉬운 것으로 새로이 맞추었다.
거기에 신발도 구두뿐만 아니라 부츠까지 여러 켤레 구비해 두는 건 기본. 옷도 요리할 때라든가 다른 일을 할 때 입을 수 있도록 맞춰 줄 생각을 하는 베오날드였다.
‘음~ 조금 더 기틀이 잡히면 마나 호흡법이라도 알려 줘 볼까? 재능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베오날드 님!”
“아니다, 하이디. 잘 왔다. 음~ 역시 너도 잘 어울리는구나.”
“감사합니다.”
하이디의 경우, 역시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수도 내부로 들어가는데 갑옷을 입긴 곤란했기에 경호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검은색의 정장으로 맞춰 주었다.
큰 키와 건장한 체구 덕에 웬만한 남성보다도 위압감이 넘치는 모습이 된 그녀는 한 마리의 맹수 같은 예리함을 뿜어내었지만, 베오날드의 앞에서는 순식간에 부끄러움을 타는 한 마리 순한 고양이가 되어 버렸다.
“옷은 마음에 드느냐?”
“예. 움직이기도 편합니다.”
“찢어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써서 주문을 넣은 거다. 아, 그리고 네가 원하던 투구는 대장간에서 찾아가라고 하더구나. 평소에도 훈련하는 게 좋고, 시선을 감추는 것도 좋지.”
갑주는 착용하지 않으나 투구는 그래도 패션의 영역으로 취급할 수 있으며 기사로서 훈련에도 좋고, 시선을 감춰서 경호원 일을 하기도 좋으며,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얕보는 상대와 기 싸움을 할 때도 도움이 되는 등등 이점이 많았다.
‘거기에 이 사랑스러운 모습도 독점할 수 있다는 점이 좋지.’
“아, 그리고 셀리나 님은 자고 계십니다. 어제 밤새도록 연구하시다가 늦게 잠들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수면 시간은 일정하게 조율하라고 했는데. 하지만 나 스스로도 그 말을 안 지키는 경우가 있어서 뭐라고 말 못하겠군.”
마법사든 연금술사든 연구를 한번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하기 때문에 날밤을 새우는 건 물론이고, 어쩔 때는 아예 먹고 마시는 것까지 잊어버린 채 연구하다가 쓰러지는 자들도 있었다.
물론 베오날드는 그렇게까지 몰두하진 않지만, 아무튼 셀리나는 이대로 자게 내버려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본격적으로 집을 나섰다.
“알테리오, 잘 부탁한다!”
삐이이이이이!
이제 완전히 성체가 된 알테리오는 무장을 벗은 상태라면 베오날드, 세인, 하이디 셋을 모두 태우고도 거뜬히 뛰어다닐 정도로 거대한 그리핀이 되었다.
하이디가 고삐를 잡고 알테리오를 조종하는 동안, 베오날드는 빠르게 달리는 알테리오의 속도에 혹시나 세인이 튕겨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끌어안고 질주하여 금방 수도에 도착했다.
“오, 오늘 드디어 입학하십니까?”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경비대장님.”
“축하드립니다, 베오날드 님. 제국의 미래가 되시길!”
“하하, 열심히 하지요.”
지난 가을, 겨울 동안 열심히 수도를 오가면서 눈도장을 찍어 둔 덕분에 베오날드 일행은 따로 제지를 받지 않고 관문을 통과해 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대장간에 들러서 하이디가 쓸 투구를 챙긴 다음 아카데미로 향했다.
“슬슬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하는군. 하이디, 조심해서 몰아라. 그리고 되도록 마차엔 가까이 가지 말고.”
“예, 예!”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기에 기존에 다니던 학생은 물론 이번에 새로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수많은 학생들과 부모까지 몰려서 엄청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광장을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특이하게 그리폰을 타고 오는 베오날드 일행에게도 수많은 시선이 몰렸다.
“와, 저거 뭐야? 그리폰?”
“근래 수도에 그리폰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대단한데? 저건 어디서 길들인 걸까? 저거 하늘을 날 수 있지 않을까?”
웅성웅성…….
사람들의 시선에 하이디와 세인은 좀 부담스러워했지만 베오날드는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빼앗고 주목받는 이것이야말로 귀족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남들보다 뛰어나며 특별하다는 자부심에서 나오는 자아도취.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부러움, 우러러봄! 이것을 싫어하는 귀족은 귀족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자식, 돈 거 아니야? ‘검은 제복’ 주제에…….”
“대체 어디서 온 놈이야?”
“검은 제복이면 평민 학과일 텐데… 건방진 놈 같으니!”
그리고 우러러보는 시선이 있으면 질투와 열등감 등등에 휩싸여 부정적인 감정으로 보는 시선도 있는 법.
‘하얀 제복’을 입은 학생들은 위풍당당하게 그리폰을 타고 행차하는 베오날드를 심히 불쾌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아카데미는 제복 색깔로 평민 학부와 귀족 학부를 구별하고 있었는데, 하얀 제복이 귀족 학부이며 검은 제복이 평민 학부였다.
‘으음, 그렇지. 이래야지. 옛날 생각이 나는군.’
정점에 있던 귀족인 자신을 바라보는 이 시샘과 분노, 열등감 어린 시선들!
오랜만에 아주 그리운 자극을 받은 베오날드는 그 시선을 보내오는 하얀 제복의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감히 ‘검은 제복’ 주제에 나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다는 저 노골적인 시선들. 분명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재미있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걸로 쓸모없는 놈들을 꽤 많이 걸러 냈군.’
확 구별되는 하얀 제복에서 느껴지는 저 시선, 평민이 주제넘게 나대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저 노골적인 시선. 귀족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기량을 살피지 않고 분노만 담아선 안 된다.
설사 불쾌하고 기분 나쁘더라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웅성거리면서 그저 모멸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며 열심히 자신을 씹어 대고 있는 놈들은 그냥 흔해 빠진 귀족이었다.
‘후손을 보면 부모를 안다. 그리고 혈통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음, 그래도… 역시 좋은 눈빛이 몇 개 있긴 하군.’
그렇게 시선들 중에서 건질 것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베오날드는 그리폰을 하이디에게 맡겨 대기시킨 다음 자신은 세인과 함께 입학식장으로 향했다.
입학식은 별도의 강당에서 열렸는데, 입학 행사는 귀족 학부와 평민 학부의 신입생들 모두 모여서 진행되었다.
입학하는 학생 수는 두 학부 다 합쳐서 약 240여 명. 귀족 학부가 100명 정도이고 평민 학부가 140명 정도였다.
‘수도의 인구치곤 적은데. 정말 치열하게 옥석을 가려냈다는 건가? 흐음~’
어차피 자신은 특별 추천 입학이라 상관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가리고 가린 것들 중에서 진짜 옥석이 있을지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학장이라 불리는 노인네를 비롯해서 각 학부에서 어떤 수업을 할지 알려 주고 거기서 일할 교수들의 소개 및 커리큘럼 소개 등등… 지루한 과정이 계속되었다.
‘과정은 일단 전공이… 기본이 3년인가? 그리고 이제 쓸 만한 녀석들은 수도의 관료라든가, 귀족 가문 밑으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아카데미에서 계속 연구를 한다든가, 등등 길이 나뉘는데… 뭘 할지…….’
[다음은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생각하던 중 음성 증폭 마법이 걸린 것 같은 마도구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웅장한 음악대의 연주와 함께 황제가 이곳에 온 것을 알렸다.
무대 뒤에서부터 황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단상 위로 걸어 올라가는 이 칼레움 제국의 황제. 65세인데 벌써 새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칼과 수염이 이 난세 속에서 고생한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나 그래도 눈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고, 강렬한 의지로 타오르는 것을 보아 일단 폭군이나 암군의 걱정은 없을 듯했다.
‘그게 좋은 건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지만…….’
전생이었다면 상당히 성가신 황제라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은 엄연히 ‘귀족파’ 성향이라서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권력까지 강력한 황제가 자리 잡고 있으면 상당히 귀찮고 성가시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번엔 여신이 시킨 일도 있으니 ‘난세의 능신’이 되어서 칼레움 제국을 기반으로 국력을 키우고 난 뒤, 용사를 보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용사가 어디 있는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때 되면 사인을 주겠지. 아무튼 황제는 제정신 박힌 인간이라는 거군.’
[우선 입학을 축하하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여. 이곳까지 치열한 경쟁과 자신의 증명을 통해서 도달했겠지만 아쉽게도 여기는 그저 새로운 시작점에 지나지 않네. 지금 세계는…….]
베오날드가 생각하는 동안 황제는 축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하는 호흡 사이사이에 올해 입학한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기준에선 매년 보아 온 학생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구성이었다.
늘 그렇듯 황제인 자신을 보고 일생의 행복을 다 쓴 것처럼 기뻐하며 우는 평민 학생들이라든가, 여러 행사를 통해 얼굴을 익힌 귀족 학생들은 동네 할아버지를 보는 양 빨리 끝내 줬으면 하는 지루한 시선들을 보였다.
‘하나 아직 그 누구도 모른다. 이 안에 갈고닦으면 찬란히 빛날 보석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야.’
아카데미를 세운 지 십수 년. 부유하고 강성해진 황도와 그 직할령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힘은 이곳에서 극소수의 인재들을 발굴해 내어 적재적소에 썼기에 이룰 수 있던 일이었다.
그렇게 장차 빛날 원석들을 눈에 새기면서 연설을 이어 나가던 황제는 베오날드를 발견하고 시선을 멈췄다.
‘저 아이가… 레파르트 경이 말한 아이로군.’
동년배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큰 키와 탄탄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 특히나 대부분 황제를 알현하는 게 처음이라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거나 황송해하는 평민 학부 학생들 사이에 있으니 그야말로 군계일학처럼 눈에 띄었다.
‘…직접 보니 레파르트 경이 왜 추천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군.’
황제의 머릿속엔 지금 ‘때로는 땅에서 다듬어야 빛이 나는 원석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체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가진 보석이 기적처럼 나오기도 하는 법.’이라는 오래전에 들은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검은 제복을 입은 소년에게서 도저히 18세의 소년에게 있을 수 없는 예기와 기품, 그리고 무게감을 느낀 황제는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참느라 애써야만 했다.
‘역시 사람은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하는군. 허허.’
대단한 보물도 그것을 쓰고 판별할 줄 아는 사람에게 들려야 판별이 가능한 법. 그동안 올라왔던 각종 목격담과 보고서 속 베오날드의 모습은 그저 부수적인 것.
직접 보니 레파르트 경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던 황제는 그의 모습과 얼굴을 머릿속에 단단히 집어넣고는 축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