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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72화 (72/259)

[72화]

그리고 곧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자, 역시 강추위에는 장사가 없는 건지 저택 주변에 알짱대는 첩자들의 숫자도 엄청 줄어들었다.

특히 밤에는 목숨 걸고 눈보라 속에서 버텨야 하는데, 이제는 절대 밖에서 버틸 수 있는 재간이 없기에 첩자들도 대부분 물러났고, 베오날드 일행도 지금은 가장 큰 방에서 넷, 아니 알테리오까지 다섯이 모두 모여 벽난로 앞에 앉아 따뜻하게 보내는 중이었다.

“근데 이거 뭔가 서러운데요.”

“뭐가 서럽다는 거지?”

“지금 이 풍경에서 뭔가 떠오르는 게 없나요?”

“으음……?”

현재 베오날드의 좌우엔 세인과 하이디가 앉아서 그의 어깨에 기대어 같이 모포를 덮고 있었고, 그의 등 뒤엔 알테리오가 엎드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만 그 모습과 반대로 셀리나는 반대편에 홀로 앉아서 모포를 덮은 채였다.

하이디는 이미 베오날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조는 반면, 세인은 이 시간도 아까운지 수도에서 사 온 책을 보면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 이건 가족과 동료의 차이라고 해야겠군. 왜, 부럽나?”

“네. 하지만 안 받아 주실 거죠?”

“그야 네겐 나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는 게 뻔히 보이거든. 마법사들이란 다 그래.”

그들은 이미 ‘세계의 진리’와 ‘지식’에 모든 것을 바친 존재다.

마탑과 어울리면서 연금술사 자격을 따고 진급하다 보니 여마법사들에게도 추파를 던진 적이 있는데, 그녀들은 대부분 자신과의 애정 관계보다는 권력과 자금을 노리는 자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진리와 지식이 더 중요하다면서 다들 떠났고 말이다.

‘…다 겪어 보고 하는 말이지.’

“마법사는 여태껏 저만 본 게 아니었나요?”

“대충 넘어가게. 아무튼 그 망할 황실 기사단 놈에게 속아서 시간을 헛되이 쓰게 되니 슬프군.”

“그런 것치곤 산과 도시를 오가면서 충실한 나날을 보내시던데요?”

셀리나의 말대로 감시가 있으면 있는 대로 베오날드는 수도와 산을 오가면서 별별 일을 다 했었다.

유리 공방에서 각종 실험 도구를 다시 주문해서 실험실을 차리고, 산에서 약초를 캐 오는가 하면 저택 앞에서 직접 키울 생각인지 약초밭을 만들 자리까지 직접 가꾸는 등등… 누가 보면 아카데미에 입학하러 온 게 아니라 귀농한 것으로 착각할 수준이었다.

“원래라면 지금 더 많은 시설과 인력을 둬야 했을 거다. 그리고 신나게 여러 상품을 찍어 내면서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한몫 제대로 잡았을 텐데…….”

“…전생에 상인이었어요?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해요?”

“푸하! 뭘 모르는군. 인간은 결국 탐욕의 동물. 그 모든 탐욕을 이거 하나로 교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가? 애초에 너희 마법사들도 이게 없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팅!

손으로 금화를 튕기면서 베오날드는 셀리나의 말에 반박했다.

고상하게 지혜니 진리니 추구하면서 결국 이 금화가 없으면 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시간 낭비할 자들이 무슨 말이 많냐는 것이었다.

“연금술 책을 읽더니 진짜 연금술사처럼 말하시네요.”

“너무나 감명이 깊어서 말이지. 그리고… 귀족들과 연이라도 맺으려면 이게 있을수록 좋거든. 환심을 사려면 이거저거 필요하니까.”

“그래서… ‘베노피스’를 찾으려는 건가요? 그 전설의 도시를?”

“그렇지.”

‘베노피스’. 자신이 가꾸고 만들어 낸 영지이자 도시. 500년 뒤엔 전설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고, 자신이 가꾼 모든 것이 파괴되고 약탈되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곳엔 이 별의 생명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그것만 있으면 그 자리에 베노피스의 영광을 다시 세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혹시나 약탈하고 남은 게 있을 수도 있지. 내가… 좀 많이(?) 해 먹었으니까 말이야.’

당시에 존재하는 대륙의 모든 보물을 모았다고 자부해도 좋을 정도로 전성기의 베노피스엔 엄청난 양의 재보가 모여들었었다.

연금술을 활용한 각종 제품들은 불티나게 팔렸고, 번영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베오날드는 정말로 일주일에 몇 시간도 못 잘 정도로 수많은 공사와 작업을 관리했다.

그리고 쌓이는 돈을 어떻게든 써서 돌리기 위해서 미친 짓도 많이 했었다.

‘보물을 보관하는 창고랑… 던전을 몇 개나 만들었더라? 다 세지 못해서 나중엔 보고서만 대충 보고 보관했을 정도이니……. 뭐가 털리고 뭐가 남았는지를 모르겠네.’

“그나저나 정말 찾으면 좋겠네요. 베노피스, 500년 전에 존재한 전설의 도시. 기록상으로도 남아 있어서 존재는 확인되지만 신성국(神聖國)에서 언급하는 것부터 금기로 정해서 대놓고 뭘 하진 못하죠.”

“공식적으론 금기인데도 다들 많이 찾아다닌다던데…….”

“인간의 욕망은 헤아릴 수 없고, 들리는 전설도 대박이잖아요? 황금이 흐르는 도시! 대륙 모든 재보가 모였던 땅! 이름이 사라진 대륙의 지배자! 주지육림의 왕! 심지어 최고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영지 내의 여성들을 범하고, 아이들을 세금으로 받았다는 기록까지 있던데…….”

‘그건 내가 아니야! 벨릭스! 벨릭스라고! 그 망할 아버지!’

역사 자료의 경우, 시간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기록이 혼재되는 일은 매우 흔한 것이었다.

백작가에서 베오날드와 아버지 벨릭스는 부자지간, 심지어 이름이 기록 말살이 되었다고 한다면 명성이 더 높은 쪽으로 흡수될 법한 것이었다.

물론 그 당사자인 베오날드로서는 정말 억울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심지어 아예 없었던 일도 아니고, 발굴되는 기록에는 확실히 존재하니까요. 물론 지금까지 계속되는 분열의 원인이라고 해서 온갖 욕을 다 먹지만요. 이름이 사라져서 오히려 다행이라니까요.”

‘내가 분열시켰냐? 내 재산 노리고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분열한 거지! …뭐, 과하게 모으긴 했지만, 자기들도 내 자리에 앉았으면 다 나처럼 했을 거면서!’

“…왜 갑자기 말이 없어요? 졸린 눈도 아니고… 무섭게.”

“잠깐 생각을 하느라 그랬다. 아, 그리고 이거 한번 써 보지 않겠나?”

이야기가 슬쩍 지나갔을 때, 베오날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금속으로 된 작은 용기로 셀리나가 그것을 열자 안에는 새하얀 고형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베오날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뭔데 써 보라는 거예요? 냄새가 독한 걸 보니… 먹는 건 아닌 것 같고…….”

“화장품이다. 피부에 윤기를 돌게 하는 건 물론 겨울바람에 메마르는 것을 막아 주지. 물론 아직 실험용이지만 말이야.”

“아하~! 귀족가 여성분들이 쓰는 거라고 들었어요. 근데… 실험을 하려면 거기 양옆의 두 분이 있지 않나요?”

“원래는 그러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이 화장품 실험에 적합한 건 오직 너뿐이라서 말이지.”

“으음? 그거 무슨 의미죠?”

베오날드가 직접 제작한 화장품을 만져 보고 향도 맡아 보며 이야기하던 중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셀리나는 그를 노려보면서 질문을 했다.

실험에 적합하다? 뭔가 특별해서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러자 베오날드는 좀 껄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도 되나? 화낼 거라고 생각한다만?”

“기탄없이 이야기해 보시죠.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로서 진실에서 고개 돌리지 않습니다.”

당당히 따지는 셀리나의 말을 들은 베오날드는 그녀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조심스럽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이디는 연령도 적고, 마나 호흡법까지 익혀서 그런지 하루 종일 저 밖의 칼바람을 맞으며 수련을 하고 와도 이렇게 피부가 탱탱하고 보드랍다.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

“우우음… 베오날드… 님…….”

“그리고 세인도 마찬가지로… 연령도 어리면서 식사, 수면을 비롯한 여러 관리를 하지.”

“예, 메이드이니까요.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 셀리나 너는 연령도 연령이지만 불규칙한 수면과 식사, 생활 패턴, 운동 부족 등등… 복합적인 요소가 너무 많다. 게다가 이 겨울의 추운 바람과 건조함까지 합쳐져서 마치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피부가 퍼석퍼… 커억!”

철퍽!

베오날드의 가혹하고 치명적인 팩트 폭력에 셀리나는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화장품을 베오날드에게 던져 버렸고, 그것은 파이인 양 그의 얼굴에 철퍽 박혔다.

엄연히 중급 기사급 기량을 가진 베오날드가 피하지 않고 맞아 버리자 당황한 셀리나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왜 안 피해요?”

“피하면 애써 만든 게 날아가지 않느냐? 아무튼 이럴 것 같아서 굳이 말 안 하려 했던 건데… 진실을 견디지 못했군.”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니 그렇죠. 흥!”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아무튼 이 아까운 걸……. 아무리 실험용이라지만 이걸 만드는 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던질 줄이야. 너무하지 않은가? 결국 내가 실험해 봐야겠군. 남성과 여성의 피부는 엄연히 다르지만… 뭐, 데이터는 나오겠지.”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순간… 그만.”

“순순히 뉘우치니 됐다. 이제라도 그 좋은 소재를 썩히지 말고 가꿔 나가길 바란다. 아깝지 않은가… 다듬으면 보석이 될 원석을 썩히면 안 되는 법이지.”

이리저리 휘두르다가 갑자기 훅 들어오는 베오날드의 자상한 말에 셀리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러모로 도저히 자신이 당해 낼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한 그녀는 유일하게 남은 베오날드의 앞쪽 다리로 다가가 강제로 무릎베개를 하고는 눈을 감은 채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확실히 이거 따스하네요. 체온이 높으신가 봐요.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나는 어쩌고?”

“그건~ 모르겠네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그러곤 순식간에 잠들어 버리는 셀리나였다.

또 어느새 세인도 책을 놓고서 그대로 잠들어 버리자 꼼짝도 못하게 된 베오날드는 조금 불편하지만 자신에게 기댄 그녀들을 위해 ‘오늘은 날을 새우자.’라고 생각하며 벽난로에 피어오르는 불을 바라보았다.

***

자신을 주목하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고, 겨울이라는 계절의 특성상 이곳에 정착하고 세 달째 되는 달, 이제 자신들을 주목하는 시선은 더 이상 없었다.

이미 다들 조사할 만큼 조사하기도 했고, 베오날드 일행이 뭔가 더 특별한 것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조사해도 성과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철수한 것이다.

“여기에 이제 노예와 인부만 구할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눈에 띄겠지?”

“그렇죠?”

“이거 참~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는 아이템들이 있는데, 쓰질 못하니 갑갑하군.”

하나 그동안에도 베오날드는 산과 야생, 그리고 도시를 오가며 재료를 구해서 여러 가지 상품들을 만들어 냈다.

우선적으로 만든 것이 화장품 종류들로 저가형과 고급형 레시피들을 새롭게 정립했다.

이것들은 절대로 ‘제국 수도’에서 안 팔리려야 안 팔릴 수가 없는 것들. 초기 홍보에만 성공해서 제품의 이름만 알리면 그냥 돈 방석에 앉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고금동서 어디든 같고… 특히 제국 수도라면 귀족들끼리의 경쟁과 혼란 속에서 그게 더 심하기 마련이지.’

정치판이 귀족 남성의 전쟁터라면 여성의 전쟁터는 바로 각종 사교회를 비롯한 사교계 전반의 모든 행사들. 혼약으로 세력 간에 손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곤 하지만 미모와 지략을 통해서 오히려 상대 가문의 남성을 휘어잡는 것도 가능하고, 또 좋은 집안의 남성에게 시집가기 위해선 경쟁자보다 더 아름답게 보여야 하는 것도 진리였다.

‘전생에도 이걸로 꿀 좀 많이 빨았었지. 후후후…….’

베오날드 폰 노이멀 백작 시절에도 이걸로 자금을 불리고 정치적으로도 재미를 많이 보았었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아마 다를 바 없으리라. 그렇게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다양한 시제품의 레시피를 재정립하고 그 외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겨울을 보냈고,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흘러가 드디어 아카데미 입학의 날이 찾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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