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아무리 그래도 그런 허무맹랑한 내용은 소문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 그저 평민 학부에 레파르트 경이 추천한 학생이 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만 퍼졌고, 베오날드라는 이름을 조사하려고 캘러메인 영지에 사람을 보낸다는 정도뿐입니다.”
“흐음, 그런가? 하긴 레파르트 경이 보통 친구가 아니니……. 허허허.”
황실 기사단원 ‘불굴의 레파르트’. 황제가 죽으라고 하면 곧바로 검을 들어서 자신의 목을 칠 것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바치는 황실 기사단의 귀감.
개인의 무위도 상급 기사의 경지라 막강하기 짝이 없으며 약 5년 전의 전쟁 때 황제가 있는 본진을 기습한 적의 대군을 홀로 막아 내고 귀환까지 하여, ‘불굴’이라는 이명을 선사받은 황실 기사단의 영웅이었다.
“심지어 ‘평민 학부’로 갔다고 해서 더더욱 화제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귀족 자제들도 레파르트 경의 기준을 통과하기 힘든데… 대체 어떤 평민이 통과했는지 궁금할 법도 하지.”
적어도 체계적인 교육 방침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귀족 출신이라면 모를까?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힘들다는 말도 있고, 명망이 있는 레파르트 경의 기준을 통과한 베오날드라는 소년에 대해 다들 궁금할 터였다.
“흠, 거주지는 수도 외곽으로 잡았군. 조용한 걸 선호하는 성격이군.”
“예. 몸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행으로는 여성만 셋이라고 하더군요. 말을 모는 마부들은 제외하고 말이죠.”
“벌써 사람을 붙인 게냐?”
“저만 붙였겠습니까? 레파르트 경의 추천이라는 걸 알자마자 수도에 있는 웬만한 대귀족들은 다 붙였을 겁니다. 이미 슈퍼스타죠.”
“아주 먹이를 발견한 고블린처럼 달라붙는구나. 간악한 놈들… 같으니!”
약 500년 동안 싸우고 싸우면서 분열되고, 혼란이 지속된 난세. 혼란스러운 세상에 믿을 것은 결국 힘과 권력뿐. 그리고 그것은 남들보다 뛰어난 인재의 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황권을 강화하려는 황제와 귀족들 간의 다툼과 경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 적에게 뛰어난 인재를 주지 않고 자신들의 곁에 두기만 해도 +1수, -1수 합쳐서 2수를 앞서는 것이 되기에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저희가 먼저 손을 씁니까?”
“아니, 일단 관망해 보자꾸나. 다른 것보다도 우선 레파르트 경이 오판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보는 게 우선이지 않느냐?”
“오판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 어떤 자인지 신중하게 확인하는 건 중요하겠죠.”
“나도 동감한다. 그러니 절대 시야에서 놓쳐선 안 된다. 알았느냐?”
“예, 아버님. 그럼 저는 그것을 지시하러 가 보겠습니다.”
조엔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곤 그대로 물러났다.
남아 있던 황제는 아들에게 말하지 않은 내용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바로 베오날드가 캘러메인 백작가의 혈통이지만 아버지가 용병 출신이라서 정통 귀족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래서 캘러메인 영지에선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군. 그리고 레파르트 경에게 발견된 게 천만다행이기도 하고 말이지.’
이런 인재가 레파르트 경에게 발견되어 왜 수도까지 흘러들어 온 것인지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된 황제는 일부러 그것을 조엔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자신의 다음 대에 황제의 자리에 오를 황태자의 자질에 대해서 또 한 번 검사하고, 그가 인재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도 판별해 볼 찬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레파르트 경의 서찰을 서랍에 넣은 황제는 다른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제국 수도 외곽, 베오날드의 저택.
새로운 보금자리를 가꾸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을이 거의 끝나 가고, 서서히 차가워지는 공기가 곧 겨울이 올 거라는 걸 알렸다.
입학은 내년 봄이었기에 베오날드 일행은 그동안 겨울을 날 준비를 하거나 각자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역시 수도가 옆에 있으니 편리한 게 많군.”
“편리한 것… 말씀이십니까?”
“각종 물건을 직접 만들 필요 없이 이 화폐 하나로 해결되잖나. 역시 나는 도시 체질이야. 으음~ 이것도 저기서 산 건데… 어때? 예쁘지 않은가?”
“예. 확실히 예쁘긴 합니다만 깨뜨릴까 무서워서…….”
수도의 인프라와 경제 규모에 만족한 베오날드는 새로이 구입한 꽃무늬가 그려진 우아한 찻잔에 대해 세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과회를 여는 중이었다.
저택 내에 새로이 꾸며진 그의 방은 여러 책장이 있고 한쪽엔 간단한 실험 도구가 놓여 있었는데, 생전 자신의 방과 최대한 유사하게 꾸민 것이었다.
“아무튼 내 수업은 끝났으니 복습과 예습하는 걸 잊지 말게. 그 외의 일은 모두 내가 맡을 테니.”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아니, 무슨 말을~ 이미 너는 내 일부나 마찬가지이잖나. 일에 대해선 최대한 부담을 줄여 주도록 하겠다. 빈말이 아니라, 식사를 제외한 일은 직접 하도록 하지.”
전생에부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지 잘 아는 베오날드는 세인이 공부에 열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티타임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자 다음 일과를 위해서 자신의 방을 나섰다.
“음, 이제 하이디의 방으로 가야 하는데… 또인가?”
다음에 할 일을 생각하며 저택을 걷는데, 바람도 없는데 창문 밖의 풀숲이 들썩이는 걸 발견한 베오날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래, 이곳에 온 날부터 시작해서 아예 저택 주변에 살고 있는 첩자들의 존재였다.
‘…그 오우거 기사 놈, 내 계획을 이딴 식으로 망쳐?’
명망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무슨 동물원의 희귀 동물이나 몬스터도 아니고, 이렇게나 많은 인간들이 주목할 줄은 상상도 못한 베오날드였다.
자신의 시대에도 이런 첩보 활동은 있었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젠장할, 뭘 하질 못하겠어. 저기 또 있군!’
그래서 본래라면 봄에 입학할 때까지 이 저택에서 하고 싶어 하던 일들을 대부분 하지 못하고, 몸을 사리면서 일단 캘러메인 영지 내에서 있었던 일 정도나 하는 게 전부였다.
저 첩자들이 어디서 온 건지는 대강 감을 잡고 있었다.
수도에 체류 중인 대귀족들과 황실에서 ‘레파르트 경의 추천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보낸 것이리라.
‘…어지간히 있었으면 좀 나갈 것이지! 젠장!’
처음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하이디와 다른 사람들에게 감시하는 이들이 있다고 조용히 알려 준 다음 조금만 버티면 나갈 거라고 했지만, 실상은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이곳에 머무는 중이었다.
‘조금 있으면 겨울인데… 그때도 버틸 생각인가? 어느 정도 보여 줬는데, 적당히 먹고 떨어질 것이지.’
그냥 감추기만 하면 저 첩자들도 납득하지 못할 테니, 베오날드는 그들을 돌아가게 할 생각으로 어느 정도 선에서 자신의 검술 실력과 연금술 능력을 공개했는데도 아직도 뭉개고 있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되면 그나마 나으려나? 저것들 때문에 노예나 고용인도 못 사들이니 짜증 날 지경이야.’
세인을 공부시키고, 이 저택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과 자신의 다른 일들을 위해선 인력이 필수불가결인데, 혹시라도 그 안에 첩자들이 들어올까 무섭기도 하고, 주변에 저 망할 것들이 쫘악 깔려 있어서 사지도 못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현 상황을 개선할 좋은 비책도 없기에 베오날드는 우선 일과를 계속 소화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이디 있느냐?”
“예! 있습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천천히 해도 된다.”
베오날드가 부르자 잠시 후 하이디가 방에서 나왔다.
추워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오늘은 늘 입는 갑주가 아니라 셔츠와 바지, 가죽 부츠 위로 거친 털이 잔뜩 달린 따뜻해 보이는 무장을 하고 있었다.
특징적인 것은 곰의 머리로 만든 가죽 투구로, 하이디의 키와 체구까지 있으니 영락없는 곰, 북방에 산다는 용맹한 전사가 떠오르는 차림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다. 근데 쌀쌀해지긴 했지만… 그 차림은 아직 이르지 않느냐? 상당히 더울 것 같다만?”
“아, 그게… 전에 잡은 곰으로 만든 거라서 어떤지 보여 드리려고 한 겁니다. 하하… 어떠십니까?”
‘…영락없는 곰이다만?’
마치 금발 여인을 먹고 있는 듯한 곰의 머리가 그대로 보이니 베오날드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이디의 눈빛은 마치 자신이 새로이 만든 장난감을 아빠에게 자랑하는 것 같은 순진무구함을 가득 담고 있었기에 진실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고, 아빠 경험이 있는 그는 여기서 말해야 할 정답을 정확하게 고를 수 있었다.
“으음, 꽤 귀엽구나.”
“정말이십니까?”
“그래. 다만 이빨은 좀 빼 두는 게 좋겠구나. 네 아름다운 머리칼에 혹시나 걸려서 손상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예정대로 약초를 채집하러 가야 하니 갈아입고 오거라.”
“예!”
역시 정답이었던 건지 기쁨의 미소를 띤 채 들어가는 하이디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는 베오날드도 저절로 미소가 나올 정도로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무(武)의 재능도 재능이고, 다른 속셈이나 편린이 안 보이는 저 순수한 성격. 감성 부분이 좀 묘하긴 했지만 귀여운 애교로 봐 줄 수 있었다.
‘특히 침대에서 내 가슴 쪽에 안겨 오는 것도 귀엽고… 아직도 어리광 부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너무 빨리 성장한 탓에 그동안 누구도 받아 주지 않았을 테니. 아무튼 그건 그것대로 그녀의 매력이겠지.’
“나왔습니다.”
“그래, 얼른 가자. 알테리오도 데리고~ 밖에 저것들이 있어 놔서, 할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니 어쩔 수 없지.”
“저는 베오날드 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그렇게 하이디와 함께 베오날드는 사냥과 약초 채집을 하러 숲으로 향했다.
첩자들에게 웬만큼 정보를 줬는데도 안 물러나면 이젠 그저 가치 없는 정보를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그들이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완성하길 바라면서 지금도 사람이 있는 티를 잔뜩 내고 있는 수풀을 슬쩍 쳐다보곤 무시했다.
“…….”
그리고 베오날드가 슬쩍 본 수풀 안엔 딱 봐도 수상한 검은 복면을 두르고 가벼운 경무장을 한 사내 둘이 있었는데, 좀 더 어려 보이는 남성이 한참 나무판에 무언가를 적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만하면 다 된 거 아닙니까? 형님? 대체 얼마나 더 지켜보려고요? 이미 견적 다 나온 것 같은데 말입니다. 캘러메인에서 온 자료랑 대조해 본 결과, 충분히 레파르트 경의 추천을 받을 만하다는 각이 나왔잖습니까? 검술은 기사급, 연금술 지식 있음, 그리폰 길들임, 용병의 피가 섞여 있지만 귀족 혈통 등등… 더 볼 게 없어 보이는데요?”
“그래서야 첩자 짓 오래 못한다, 자식아. 경쟁자들보다 한발 앞설 수 있는 정보를 찾아야 하는 법이야. 회심의 한 수! 그걸로 크게 한 건 해야 도적 길드원으로서의 가치도 커진다고!”
“…아니, 올해 17살짜리가 지금 여기 쓰여 있는 거 다 하는 것도 어차피 말도 안 된다고요. 신의 축복을 혼자서 다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거 이상으로 더 있다고요? 어휴! 형님! 제발 좀!”
한숨을 쉬는 부하 도적의 말에 형님이라 불린 남성은 솔직히 반박하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과 캘러메인 영지에서 온 소식까지 합쳐 보면 충분히 ‘레파르트 경’이 추천할 만한 인재였다.
게다가 캘러메인 영지에서 떠난 이유와 평민 학부 지원은 귀족으로서 순수하지 않은 혈통 때문이라는 점도 파악하기 쉬웠다.
‘…근데도 뭔가 꺼림칙하단 말이지.’
형님이라 불린 쪽은 산으로 올라가는 베오날드를 보면서 그에게서 ‘거물의 냄새’가 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다른 증거를 찾아낼 것이 지금 드러나지 않아서 증명을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결국 이대로 겨울이 되면 첩자 일도 제대로 못할 것이기에 그는 한숨을 쉬며 조사한 나무판에 ‘위험한 냄새가 남.’이라는 한 줄을 더 적어 놓고 부하와 함께 수풀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