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70화 (70/259)

[70화]

‘정말 별천지 같군. 세상에… 500년간 아주 안 변한 것도 아니군.’

수도 성 내부로 들어가는 일은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아주 쉬웠다.

캘러메인 가문의 인장과 마부들이 지닌 젤커드 자작과 캘러메인 백작의 확인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통행료를 지불하고 무사히 통과.

입장료가 있는 것이 참 웃긴 일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세수를 확보해야 이 거대한 도시와 성벽, 도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틀림없으니 이해하는 베오날드였다.

“우선 어디로 갈깝쇼? 도련님?”

“일단 곧장 아카데미로 가 주게. 수속부터 마치고, 그다음 저택을 구매할 걸세.”

“알겠습니다, 도련님.”

마부는 베오날드의 명령대로 제국 아카데미로 향했다.

제국 아카데미는 이 제국 수도의 중심에 있는 성의 가장 동쪽 끝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앞엔 석재 타일로 잘 정비된 거대한 광장이 보였다.

교복을 입은 아카데미 학생들이 모여서 웃고 있는 모습이 가장 크게 눈에 띄었고, 수많은 마차와 수인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와아아아~”

“역시 수도… 네요.”

‘…여긴 좀 볼만하군. 교육 기관은 역시 가장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곳이지.’

베오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광장을 지나 점점 가까워져 오는 아카데미를 바라보았다.

캘러메인 백작 저택의 수십 배는 될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부지와 산에 걸쳐진 거대한 건물들이 아카데미의 위용을 자랑했으며 입구 너머 광장에는 포효하고 있는 거대한 와이번 석상이 보였다.

“안에는 걸어서 다녀올 테니 마차를 이 근처에 대기시켜 주게. 셀리나, 혹시나 누군가 올지 모르니 넌 남아서 알테리오를 지켜라. 마법사라는 신분이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지.”

“이럴 땐 부하 취급인가요? 흥!”

“네 소중한 연구 자료와 내 지식을 독점하는 것을 원한다면 그리하도록 해라. 세인, 하이디, 너희 둘은 나를 따라와라. 수속을 밟는 건 나 혼자면 되지만, 내부 구조를 익혀야 하니까.”

근처에 마차를 대고 베오날드는 세인, 하이디와 함께 아카데미로 들어갔다.

출입구에서 들어가는 절차를 밟고, 베오날드는 입학 수속을 위해 아카데미 본관으로 갔다.

내부는 아주 깨끗하고 화려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서 베오날드는 이 아카데미에 황제가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내심 또 한 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아카데미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로 찾아갔다.

“실례. 여기가 아카데미의 입학 및 학적을 관리하는 곳이 맞습니까?”

“예? 아, 예. 마, 맞습니다. 근데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

직원은 베오날드를 보고 깍듯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양옆엔 갑주로 완전 무장한 하이디와 메이드복을 입고 다소곳하게 서 있는 세인이 보였고, 베오날드의 눈빛과 풍기는 기품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일하다 보면 늘 보는 게 귀족이었기에 이 정도 처신은 기본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베오날드는 지금 ‘평민’으로 위장한 상태였기에 직원이 저 정도로 깍듯하게 대한다는 게 웃긴 일이었다.

“저기 멀리 캘러메인 영지에서 왔습니다. 황실 기사단 일원, 레파르트 경의 기밀 서찰과 제 추천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레, 레파르트 경의? 여, 여기에 주시는 거 맞습니까?”

“예. 여기로 주라고 하더군요.”

“이, 이건 특별 입학 추천서? 심지어 추천자가 불굴의 레파르트 경? 그 불굴의 레파르트 경이? 부장님! 부장님! 이거! 엄청난 게 왔습니다!”

직원은 호들갑을 떨면서 베오날드가 준 추천서를 가지고 자신의 상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서찰에 찍힌 황실 기사단의 인장과 레파르트 경의 인장을 확인하느라 난리를 피웠고, 약 10여 분이 지난 뒤에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하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상사가 직접 와서 머리를 숙이며 베오날드를 맞이했다.

“몰라뵈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베오날드 님. 설마 레파르트 경의 추천서를 받으신 분이라니, 너무나 놀라워서 그만 허둥대고 말았습니다.”

“흠, 흔한 경우가 아닌가 보군요.”

“예. 오히려 ‘불굴의 레파르트’ 경에 대해서 모르시는 게 저희로선 위화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아, 아무튼 따라오십시오. 곧바로 수속을…….”

‘…그 무뚝뚝 고릴라가 이명과 명성을 가진 인간이었을 줄이야. 한 방 먹었군.’

황실 기사단이라면 누구라도 대단한 자겠지만, ‘이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큰 경우라면 특히 더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보통 황궁에서 근무하며 황실을 지키는 게 황실 기사단인데, 그 특성상 전쟁터에 나가도 황제 근처에 있거나 귀족을 감시하고 지키기에 용맹을 떨칠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대부분 전장의 상황이 좋지 않으면 먼저 물러나는 게 그들의 일. 더더욱 명성이나 이름을 떨치긴 어려울 텐데…….’

“보통 황실 기사단원들이 각 지방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인재들을 찾아서 돌아다니곤 했지만 ‘불굴의 레파르트 경’의 추천은 정말… 보기 드문 것이거든요. 하나 그분에게 추천받은 분들은 정말로 뛰어난 인재인 게 확실해서 황제 폐하께서도 주목하실 정도입니다. 하하하핫.”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었군. 그 오우거 같은 놈이 그런 수를 썼을 줄이야. 내 불찰이다.’

한 방 먹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당할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명성이 높은 황실 기사단원이 자신이 있는 시골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별종의 일은 그저 별종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법. 일일이 변수에 넣으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입학 수속은 이걸로 끝났습니다. 베오날드 님은 내년 봄부터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십니다. 그리고 숙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카데미 내에 있는 기숙사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십니다. 베오날드 님의 경우 레파르트 경의 추천이 있기에 귀족분들이 머무는 S클래스 기숙사도 이용이 가능합니다만…….”

“아뇨. 바깥의 저택으로 하고 싶습니다. 가능한 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말이죠.”

“그러시다면 자택을 구매하실 지원금을 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아카데미 제복, 학생 수첩과 배지는 신원 확인을 위한 것이니 절대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아, 자택을 구매하실 거면 저희가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

‘대우가 아주 후하군. 하긴… 황실 기사단원이 추천한 보물 같은 인재인데 어련하겠어?’

기껏 황실 기사단원들이 지방을 뒤지면서 찾아내서 수도로 올려 보냈는데, 경제적인 문제로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학업을 이어 가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코미디일 것이다.

그것만이면 또 모를까? 기껏 제국 황실이 자신들을 위해서 모은 인재가 귀족들의 손에 들어가면?

‘죽 쒀서 개 줘 버린 격이 되겠지.’

“여기 원하시는 저택의 서류입니다. 이걸로 모든 수속이 끝났습니다. 내년 봄에 다시 뵙도록 하지요.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베오날드 님.”

끄덕.

거기에 ‘특별 입학 대우’라서 그런지 저택 구입까지 이 자리에서 해결해 주고 열쇠와 지도, 집문서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이 편하고 빠르게 진행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레파르트 경의 뒤통수침으로 인해서 앞으로 피곤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아 베오날드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새 보금자리 문제가 먼저였기에 도착한 곳을 바라보았다.

“도착했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여긴가? 오… 역시 추천자가 추천자이니 만큼 확실한 물건이 손에 들어왔군.”

저택은 베오날드의 요구 그 자체였다.

성벽 너머 외곽의 한적한 곳, 사람의 행보가 적은 근처 숲 안에 위치한 3층짜리 꽤 커다란 저택. 옆엔 강줄기도 있어서 식수와 세탁 걱정도 없는 만큼 수도와 거리가 조금 있는 것 빼곤 최상의 매물이었다.

“그나저나 좀 멀지 않나요? 물건 살 때라든가……?”

“뭐,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

아카데미와의 거리는 좀 멀었지만, 어차피 알테리오나 말을 타면 되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앞으로 몇 년간 지낼지 모르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한 그들은 곧바로 마차에서 짐과 알테리오를 내린 다음 각자 머물 거처를 정했다.

그리고 사용할 곳들 위주로 청소를 시작, 역시 사람 수가 적어서 오래 걸릴 일이었지만 마법사인 셀리나가 나섰다.

“윈드 블래스트!”

순간, 아무것도 없는 저택 안에 바람이 불어오면서 먼지를 한 번에 쓸어버렸다.

주문 하나만 썼는데도 손이 많이 가는 청소 과정의 하나가 날아갔다.

“역시 마법은 대단하군. 편리해 보여.”

“그럼 익히시는 건 어떤가요?”

“뭐, 소질과 지능 같은 걸 제외하고도…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처지라서 말이지. 주문(呪文)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하면 피곤해져.”

마법사들의 마법이란 주문을 통해서 시전되는 것이기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그 유용성을 알면서도 베오날드는 익힐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귀족으로서 앞으로 수없이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자였고, 마법이라는 것도 결국 그가 연금술로 만드는 포션이나 각종 도구와 마찬가지라 생각했기에 굳이 자신이 직접 마법을 익히려 하지 않은 것.

“아무튼 해가 지기 전에 얼른 청소를 마무리하지. 어두워지면 이것저것 귀찮아질 테니까.”

그렇게 말한 베오날드는 다시 물걸레를 들고 빠르게 움직였다.

오러와 단련을 통한 육체적 능력 상승 덕분에 보랏빛 잔상을 남기면서 물걸레질을 하는 그였다.

다른 층에선 하이디가 황금빛 잔상을 남기며 똑같이 청소하고 있었고, 세인은 초인적인 그들의 청소 능력에 감탄하며 마지막 정리를 해 나갔다.

***

칼레움 제국 황궁, 황제의 집무실.

제국 수도 중심에 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황궁의 내부. 오늘의 일정을 끝내고도 황제 제라도 칼레움은 집무실에서 수십 장의 서류와 한창 씨름하는 중이었다.

올해 64세로 새하얀 머리칼과 수염을 길게 기른 노령의 그였지만 6개의 나라로 나뉜 이 난세에 단 하루도 편히 쉴 수 없었다.

이미 후계자가 될 자식들에게 많은 일을 분배해 두었지만 그래도 직접 보는 주요 업무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나라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제국 아카데미’에 대한 서류들이었다.

“그 ‘불굴의 레파르트 경’이 추천한 인재라니, 이거 놀랍군. 그 친구… 웬만한 인재가 아니고선 추천하지 않는데.”

그리고 현재 그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 장의 서류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 특별 추천 전형으로 아카데미에 등록하게 된 베오날드에 대한 자료였다.

제국의 최변방에 있는 캘러메인 영지에서 온 올해 17세의 소년. 하지만 거기 나와 있는 내용은 황제로서는 믿기 힘든 것들이었다.

“17세의 나이에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라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작은 규모이지만 전쟁에서 승리하는 지휘력’, 거기에 ‘귀족으로서 뛰어난 정치 감각’까지 겸비했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구나. 게다가 평민 학부로 위장해서 들어가려 한다는 게 참 기묘하구나.”

레파르트 경은 베오날드를 위한 추천서를 준비하면서 그의 부탁은 들어주되, 역시 황실 기사단의 일원인 만큼 내용에서는 진실을 전하고 있었다.

약속한 것은 어디까지나 ‘평민 학부’에 들어간다는 것뿐이었지,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에 진실을 담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기밀 서찰에 적힌 내용을 본 황제는 눈앞에 서 있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엔. 레파르트 경이 추천한 인재라면… 이미 소문이 돌아서 어느 정도는 들었지 않느냐?”

베오날드는 자신의 대단함이 어차피 황실 일부에게만 전해질 비밀 내용이기에 크게 상관 안 한 것이지만, 예상외로 레파르트 경의 명성이 너무 높은 탓에 비밀이 아니게 되어 버린 점이 너무 뼈아팠다.

조엔이라 불린 화려한 옷을 입은 진한 갈색 머리의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인 황제의 질문에 답했다.

그는 바로 이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후계자, 조엔 칼레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