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으으으음…….”
“어머, 어딜 다녀오셨나 했더니 책을 구하러 간 거였어요? 학구열이 상당하시네요?”
“노크 정도는 하지? 마법사들도 예의를 알아야 할 텐데?”
“이미 저인 걸 눈치채셨으면서~ 너무 섭섭하네요. 그보다 무슨 책을 보는 거예요? 고서라는 건 표지만 보고도 알겠는데… 내용은 모르겠네.”
능청스럽게 들어온 셀리나는 베오날드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보는 책을 슬쩍 살펴봤지만 베오날드와 달리 그녀는 이 시대의 사람이라 500년 전의 필체와 문장을 알아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아앙~ 좋은 거 있으면 같이 좀 공유해요~ 혼자만 좋은 거 보고~”
“그야 난 아직 너를 신뢰하지 않고, 우린 서로 거래하는 대등한 입장이니 그렇지. 그리고 나도 이제 막 이것들을 보기 시작해서 좋은 것인지 모른다. 이제부터 밝혀내야 하는 것이지.”
“그러면 제가 도울 수 있게 저에게도 과거의 문자에 대한 지혜를 전수해 주시면 안 될까요?”
“거절한다. 너의 스승이 다른 학파나 연구팀의 마법사가 너희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달라고 하면 주라고 하던가?”
“…대체 마탑의 문화에 대해서 어디까지 아는 거예요? 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아니, 그 연금술 책이라는 거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었던 거예요?”
투정 부리는 셀리나의 반응을 무시하고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책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처음 잡은 책은 500년 전 사람, ‘라슈텔 폰 푸르매니아’라는 남자의 일기장이었다.
시대는 대략 자신이 죽고 난 이후의 기록인 것 같았다.
“역시… 개판 났군.”
베오날드는 영양가 있는 내용이 있는지 빠르게 훑어보았다.
잠시 후 세인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고 셀리나의 투덜거림에 적당히 맞춰 주면서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탐독해 나갔다.
베오날드는 시간 진행을 보기 위해 다시 열몇 장을 넘겼다.
“무슨 내용인데 표정이 그리 어두워요?”
“아…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니라서 말이지. 모르는 게 좋을 거다.”
“금지된 지식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아니야. 아무튼 이건 나중에 다시 봐야겠군.”
캘러메인 백작가의 가정교사에게 배웠지만 그래도 역시 그 시대의 사람이 적은 생생한 기록이 더 와닿았다.
그렇게 훑어본 기록은 대부분 전쟁에 대한 투덜거림이었고, 이젠 신전까지 끼어서 아주 개판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신전 새끼들은 뭔데 끼어서 더 개판을 만든 거야?’
그렇게 별다른 내용이 없는 기록들을 쭈욱 훑어보다가 기록이 끊어지는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다.
마른 핏자국과 글자가 많이 엉클어진 걸 봐선 많이 다급한 상황인 것 같았다.
‘악마? 무슨 의미지? 잘 모르겠군. 뭔가 의미가 있었다면 여신이 알려 줬을 텐데…….’
기묘한 내용에 베오날드는 다른 부분에 뭔가 더 단서가 있을까 싶어 살펴봤지만, 기록은 거기서 끝이었다.
찜찜해지기만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자, 베오날드는 한숨을 쉬며 고서를 가차 없이 화로에 던져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지,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쓸모없는 책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지식의 요람을!”
“개인 일기장이라서 의미 없어. 금화 한 개 날렸군. 쳇, 역시 쉽게 되는 게 없군.”
그리고 계속해서 책들을 넘겨 보았지만 고서들이라고 해서 유용한 지식이나 정보가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셀리나의 고성을 들으며 베오날드는 책들을 화로 더미로 쭉쭉 던져 넣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12번째 책에서 그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매도당하는 걸 좋아하는 여마왕님 1권-‘마왕이지만 인간님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책에서 그는 두꺼운 하드커버를 넘겼는데, 거기엔 전생, 현생 합쳐서 생전 처음 보는 말도 안 되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일단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서 책 내용을 추측해 보려고 노력한 결과, 전생의 자식들 중 한 명이 시시덕거리면서 읽던 상업 소설과 같은 종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껏 종이를 양산하는 법을 연구해서 많이 만들어 내니 이런 거나 만든 거냐고 한 소리 했지만… 백성들에게 엔터테인먼트도 중요하다고 해서 납득하긴 했지. 아무튼 대체 뭘 만들었…….’
<이대로 죽으면 네게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어져! 그래! 네가 죽인 숫자만큼 반인반마 노예를 끝없이 낳게 해서 인류에게 봉사하게 해 주마! 마왕! 메뤼네리스! 받아라! 나의 성(性)검을!
“안 돼에에에에!”
라고 외치지만 사실 딱 이 시추에이션을 바란 그녀는 불타는 증오를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용사의 시선에 가슴과 하복부에 짜릿한 쾌감을 느끼기 시작…….>
“음… 으으음… 으으으음… 으으으으으음… 으으으으으음… 으으으으으으음…….”
“어머? 베오날드 님, 이번엔 그래도 상당히 가치 있는 책인가 봐요? 엄청 심취해서 읽으시네요?”
“음? 아… 아아… 아아아… 조금 어렵게 쓰여 있어서 말이지.”
<“마왕 메뤼네리스는 이제 인간님들의 똥개예요. 멍멍! 멍멍멍! 노예 이하랍니다!”>
“오오, 대체 얼마나 엄청난 지식이 잠든 책이죠? 혹시 마탑의 유산이 아닌가요? 아니면 설마? 전설로 내려오는 베노피스의 유산일지도?”
“아… 으으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라. 좀 더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 그래, 심도 깊은 연구가 말이지.”
<“멍멍! 멍멍멍! 멍멍멍멍! 멍멍멍멍멍! 헥헥헥! 멍멍멍!”>
나중에 혼자 몰래 읽을 생각에 베오날드는 마지막 책을 화로에 집어넣지 않고 자신의 짐 안 깊숙이 감춰 두었다.
그래도 뭐라도 하나(?) 건졌으니 오늘의 탐방은 소득이 있었다. 그는 해독이 끝나면 알려 주겠다고 하고는 셀리나를 내보냈다.
그러자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듯 세인이 새로이 차를 내주며 말을 걸어왔다.
“셀리나 마법사님과 있으면 정말로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베오날드 님.”
“뭐, 저 아가씨는 저 아가씨 나름 마법사의 본분에 충실한 거겠지. 아, 맞아. 더스티클록에서 오자마자 바로 출발하는 바람에 이제야 생각이 났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세인, 혹시 글자는 아느냐?”
난데없는 질문에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곧바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 예. 메이라 마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럼 그 외에 따로 배운 학문은?”
“없습니다. 간단한 덧셈, 뺄셈 정도밖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세인. 이 시대의 메이드라면 당연한 것이리라.
대부분 청소와 수발 같은 육체노동이 주 업무이기에 배움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나마 글자도 메이라 부인이 자신의 일을 위해서 가르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쭉 문맹이었을지도 모른다.
“좋아. 세인,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너는 이제 내 정원에 들어온 자다. 너의 능력으로 나를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이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배움. 가능한 한 배워라. 가는 동안부터 시작해서 도착해서도 일반 학과 과정은 모두 수업받게 할 것이다.”
“예?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저기… 그…….”
설마 자신이 제국 아카데미에서 배움의 기회가 생길 줄 꿈에도 몰랐던 세인은 눈을 크게 뜨며 어쩔 줄 몰라 한다.
베오날드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 계속해서 설명해 주었다.
“예법이나 검술 같은 실기 부분이 있는 과목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배우게 해 주마. 밤에 이런저런 일을 하고 수업은 너에게 맡겨 두고 자는 설정이면 충분하겠지.”
“제, 제게 그런 은혜를 베푸신단 말씀이십니까?”
“너는 이제 내 정원의 꽃이다. 그렇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기를 뿐. 아무튼 메이드로서의 업무는 그동안 중단하는 걸로 하겠다. 지금은 우선 배우고 또 배워라. 그에 따른 모든 지원을 해 줄 테니, 너는 배움에만 힘써라. 가는 동안 배워야 할 것들을 알려 주겠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레파르트 경에게 아카데미에 대해 세세히 들어 둔 것이 도움이 되었다.
필요한 과목에 대한 예비지식과 수학, 철학 기초 강의 등등 자기 전 몇 시간을 쪼개서 그녀에게 알려 주고 내일 또 여행 중에 할 과제를 내준 뒤에야 베오날드는 드디어 잠이 들 수 있었다.
***
베오날드 일행의 수도로 향하는 길은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마차로 이동을 하고, 도시나 마을에 머무는 동안 골동품상이나 장물아비에게 가서 고서나 골동품을 사들여서 판별하고 화로에 태워 버리는 일의 반복.
추가된 거라면 도시나 마을에 도착해서 하는 일의 과정 사이사이에 세인을 위한 도서 구매와 하이디와의 대련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타인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도시에 도착했음에도 도시를 나가서 대련을 한 두 사람이었다.
대련을 마치고 땀으로 범벅이 된 베오날드와 하이디는 서로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머리카락에 흐르는 땀을 털어 내면서 슬쩍 그녀를 쳐다봤다.
‘…진짜 재능은 확실한가 보군.’
역시 무가의 자식인지, 하이디의 기량은 정말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오러의 질과 양은 자신보다 약했지만 타고난 용력(勇力)과 기사로서의 재능이 대련을 하는 베오날드도 이렇게 지치게 만들 정도였다.
‘게다가 검술… 또다시 정체기이고 말이지. 하이디는 저렇게 쭉쭉 성장하는데. 뭔가 갑갑하군.’
“베오날드 님, 안 들어가십니까?”
“아, 잠깐 생각할 게 있으니 먼저 돌아가서 씻어도 좋다.”
“예!”
‘이래서야 언제 3대 오의를 익힌다?’
베오날드가 연마하고 있는 검술,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식’에서 남은 것은 3대 오의뿐인데, 또다시 정체 중이었다.
‘쌍두사’를 익힐 때처럼 검에도 변형을 주면서 여러 시도를 하고, 계속해서 수련하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형(形)에서 또 이해가 잘 안 돼서 막혔고, 체질도 안 맞아서 이리저리 고민이 많았다.
‘형(形)도 정확하고, 마나도 호흡법으로 충분히 익혔어. 근데 왜 안 되는 거지? 또 내가 모르는 게 있나? ‘10식-쌍두사’ 때와 다른 건가? 흐으음… 그럼 나도 어디 목표를 만들어 볼까? 수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3대 오의 중 하나를 성공하기!’
베오날드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서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식’을 익히기 위해 다시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필시 수도에 도착하면 또 여러 복잡한 일들이 있을 거고, 그러면 지금처럼 여유 있게 수련할 시간이 부족할 거라는 예상이 들었기에 그는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검을 멈추지 않고 휘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