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며칠 뒤,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돌아온 베오날드는 수도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일행과 합류해서 곧바로 출발했다.
마차는 2대로 마부까지 고용되어 있어 수도까지 베오날드 일행을 운반해 줄 것이다.
2대가 된 이유는 한 대엔 식료품과 각종 짐을 실었고, 다른 한 대에는 알테리오를 가둔 철장을 싣기 위함이었다.
“그… 풀어 두면 가는 동안 각 성문 입구의 검문소를 통과하기 어려울 테고, 살아 있는 그리폰을 노리는 이들도 많을 거라 감추려면 이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알테리오가 안에 들어가서 난동을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그건 내가 해결하지. 자, 알테리오, 이리 오렴.”
삐이이익!
주인의 부름에 알테리오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다가왔다.
그러자 베오날드는 주저 없이 알테리오를 데리고 직접 철장 우리 안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알테리오의 깃털과 발톱을 다듬어 주고, 간식도 주면서 가볍게 놀아 주어 천천히 철장 우리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 나갔다.
“자, 이대로 출발해라.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당분간 여기서 먹고 자고 할 테니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드디어 떠나는군.’
짜악! 히이이히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베오날드 일행은 수도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젤커드 자작의 영지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드디어 이 시골구석을 떠나는 게 실감된 베오날드는 수도로 가자마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칼레움 제국의 역량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지.’
가는 길은 무작정 관광이 아니라, 사실상 제국의 상태를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도로의 상태, 도시의 행정력, 지방 귀족들의 발전 정도, 황제의 위상과 권력, 상업 상태, 농업 발전 정도와 생산량, 백성들의 상태, 수도로 가는 길의 영지에 있는 군사 조직과 병력의 대략적인 상황. 직접적인 데이터가 없으니 직접 살펴보고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흠, 생각하자니 끝이 없군. 아무튼 이런저런 걸 고려했을 때, 도저히 내가 권력 잡을 상황이 아니라면… 다른 나라로 건너가야겠지.’
6개의 나라 중에 꼭 이 제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하라는 법은 없었다.
난세,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면 그곳이 조국일 것이다.
어차피 500년 전엔 모두 하나의 뿌리였던 나라들인데, 나라 이름이 좀 다르면 어떠랴? 베오날드의 입장에선 모두 자기 땅이었던 곳인데 말이다.
‘다른 사람은 좀 다르려나? 그나마 셀리나는 나와 비슷하겠군.’
그나마 초국가적 집단인 마탑 아카데미의 마법사인 그녀는 국가 의식이 옅을 것이다.
반면 세인과 하이디의 경우 태어나서부터 칼레움 제국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베오날드의 이 생각을 이해 못하거나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지만, 아마 문제없을 것이다.
‘하이디는 이미 나에게 충성을 바친 몸이고, 세인은 이제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이 되었으니 말이지. 그나저나 나 없이도 여자 셋이서 잘 떠들고 있나 보군. 뭐, 좋은 일이지.’
베오날드가 알테리오를 돌보기 위해 같이 철장 안에 있는 동안, 다른 마차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다른 마차 쪽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는데, 분명 베오날드에 대해 떠들고 있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순조로이 떠났고, 베오날드는 알테리오를 돌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여행길 내내 정말 평화롭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지속되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 식사와 말의 휴식을 위해 멈춘 베오날드 일행은 마부들과 모여 식사를 준비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빵을 가져와서 따뜻하게 데우고, 작은 솥에 먼저 기름을 넣고 각종 야채와 고기를 넣고 볶다가 물과 곡물 가루,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춰서 간단한 식사를 만들었다.
“베오날드 님! 알테리오가 사냥에 성공했습니다! 사슴입니다.”
“호오, 그거 좋은 소식이군.”
“뭐, 사실상… 알테리오가 몰이를 해 주고 제가 잡은 거지만요. 지금 바로 손질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숙을 준비하면서 미리 알테리오를 하이디와 함께 보내서 사냥도 시도했는데, 무사히 성공했는지 하이디는 거대한 사슴을 들쳐 메고 있었다.
이젠 너무 거대해져서 나무가 우거진 숲에선 사냥이 불가능한 알테리오였지만, 그리폰의 포효와 존재감으로 숲의 야생동물들을 몰아넣어서 하이디가 잡는 방법으로 훌륭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먼저 알테리오에게 배불리 먹인 다음 베오날드 일행은 곧바로 사슴을 본격적으로 해체했다.
“수사슴이라 더 마음에 드는군. 이 뿔은 약재로 쓸 수 있겠어.”
“잘됐네요. 근데 가죽은 좀 아깝네요. 알테리오가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그건 어쩔 수 없지.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알테리오의 배를 채우지 않으면 곤란하니 말이야.”
그렇게 사슴 고기와 가죽이라는 부수입을 챙긴 일행은 마차 안에서 야숙을 하고 난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여정을 시작, 정오쯤 되어서 브란텐 영지라는 작은 도시에 들러서 식량과 물자 보충을 하고, 지친 말을 돈을 주고 교체한 뒤 여관에서 하루 쉬어 가기로 한다.
“아으으! 이제야 살 것 같네요. 마차에서 자는 것도 힘든 일이라.”
“여행의 피로라는 게 우습게 볼 게 절대 아닙니다.”
“세인의 말이 맞다. 그럼 방은 너희 셋이 하나를 쓰고, 내가 하나, 마부들이 하나면 충분하겠군. 아무튼 나는 혼자서 도시를 좀 둘러볼 테니 알테리오의 관리를 부탁한다.”
알테리오를 일행에게 맡기고 베오날드는 우선적으로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았다.
작은 도시이지만 일단 있을 것은 다 있었는데, 골동품 상점 같은 건 영 보이지 않았다.
대충 도시의 분위기를 파악한 그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이 도시의 부랑자 거리를 알아내었다.
“뭐야? 복장을 보니 못 보던 놈인데, 여긴 너희 같은 놈이 올 곳이 아니니 썩…….”
“길 좀 묻지.”
징이 박힌 가죽 갑옷을 걸친 인상이 험악한 불량배 하나가 베오날드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려 하자 경고했다.
그러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눈앞에 은은한 보랏빛의 오러가 흐르는 검날이 들이대어지자 그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안색이 파래졌다.
“기, 기사님이셨습니까? 그, 그러면 진작 말씀하시지.”
“여기 혹시 장물아비나 골동품상 아니면 암시장 같은 게 있나? 안내만 확실히 해 주면 이걸 주도록 하지.”
“그, 금화! 곧장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불량배는 즉시 베오날드를 슬럼가에 위치한 장물아비의 가게로 안내했다.
장물아비의 가게는 슬럼가 외곽이지만 일반인 구역과 가까운 곳이었는데, 훔친 물건을 싸게 구매해서 일반 상점인 척하고서 되파는 일을 하는 건지 겉보기엔 그냥 일반 잡화상처럼 보였다.
“영감! 있어?”
“음? 뭐냐? 쥐털 놈아. 또 뭔가를 훔쳐 왔느냐?”
“아니, 당신 찾는 외지 손님이 있어서 그래. 장물이랑 그런 거 보고 싶나 봐.”
“껄껄, 그런 거라면 나야 좋지. 호구를 물어 와 준 거로구먼.”
“일단 기사 양반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기사님! 여기입니다.”
“이놈아! 그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불량배를 지칭하는 말은 쥐털인 것 같았다.
베오날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약속한 대가인 금화를 장물아비가 잘 보도록 던져 주었다.
그리고 상점으로 들어간 그는 자신의 말소리가 들렸을 것을 예상해서 굽실거리는 장물아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보관하고 있는 물건들을 보고 싶네. 쓸 만해 보이는 것은 다 사들이도록 하지.”
“예, 예에~ 아, 알겠습니다, 기사님.”
‘큰 기대는 안 하지만, 뭐라도 있었으면 좋겠군.’
“이리로 오십시오, 기사님.”
다 사들이겠다는 말에 장물아비는 꼼지락거리면서 자신의 발아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지하실이 개방되었고, 베오날드는 그를 따라서 아래로 내려갔다.
초에 불을 피우고 내려간 그는 다시 횃불에 불을 옮겨서 지하실을 밝혔다. 안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상자나 책장에 보관된 채로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거 기대하던 것 이상이군.”
“헤헤, 이 도시가 좀 작아 보여도 여기저기서 물건은 잘 들어옵니다요. 그럼 전 올라가 있을 테니 느긋하게 보시고 오십시오.”
“그러지.”
장물아비가 먼저 올라가자, 베오날드는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기나 갑주 같은 건 일절 없었고, 목걸이나 반지류 같은 귀금속들도 진작 팔려 간 지 오래라서 남아 있는 것은 조각 같은 예술품과 해독이 되지 않는 고서(古書)들뿐이었다.
게다가 해독이 되는 서적 또한 마찬가지로 진작 팔려 나갔거나 처분이 되었을 것이므로 남은 것은 읽을 수 없어 혹시나 싶어서 남겨 둔 것들이었다.
‘예술품은 쓸모없지만 고서만 해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
수십 년, 백 년 단위를 넘어서 지식을 보전한 고서들. 그 안에 어떤 지식과 내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 문법과 내용으로 대강 연도를 짐작할 수 있는 베오날드는 지체 없이 분류해 나갔다.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면 분명 500년 전 자신의 지배하에 있던 시대의 것일 테니 말이다.
‘…어떻게 시간을 견딘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몇 권 건질 수 있으니 다행이군.’
500년 전의 기록을 담은 이 책들이 이 자리에 있는 데는 아마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옮겨 적었을 수도 있고, 다른 보존 방법을 동원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던전이나 밀폐된 창고 같은 곳에 있다가 모험가의 손에 의해 이곳의 장물아비에게 팔렸을 수도 있고… 등등이 있겠지만, 베오날드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게 중요할 뿐. 그나저나 지도 같은 건… 전혀 없군. 제길!’
척척.
일단 자세한 내용은 여행하면서 보면 된다는 생각으로 베오날드는 책을 분류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먼지를 마시고 기침을 하면서도 빠르게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약 2시간 뒤, 베오날드는 이곳에서 찾아낸 고서 12권을 들고 지하실 위로 올라가서 장물아비에게 내밀었다.
“음, 책만… 사 가시는 겁니까?”
“좀 화려한 장신구 같은 건 일절 없지 않은가? 남은 건 죄다 오래된 쓸모없는 예술품이고 말이지. 그나마 책은 장식하기가 좋아서 괜찮을 것 같더군. 아무튼 얼마지?”
“오래된 책들이라~ 그럼 금화 12개 주십시오.”
“알았네. 그리고 서비스로 지도 한 장만 줄 수 있나?”
“그 정도야. 히히히.”
말도 안 되는 폭리. 아무리 이 시대가 책이 비싸다고 해도 권당 금화 1개는 말도 안 되는 액수였다.
하나 이 책에 담긴 것들이 500년 전, 통일 제국 당시의 기록과 지식이라는 것을 아는 베오날드는 굳이 실랑이할 거 없이 얌전히 금화 12개를 건네주었다.
지하실에서 먼지만 먹던 책들이 금화 12개로 변한 것에 행복해하는 장물아비였지만, 오히려 행복한 쪽은 베오날드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기사 나리! 좋은 물건 사신 겁니다!”
‘뭐, 좋은 물건은 맞지. 이 안에 천금보다 더 귀한 지식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야. 그나저나 이 지도도 역시 개판이군. 제길!’
설사 그런 지식이 없어도 베오날드에겐 500년 전의 기록을 볼 수 있는 것이니 만큼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그리고 장물아비에게서 받은 지도는 역시나 퀄리티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그것을 찢어서 버렸다.
그는 12권의 책을 가지고 돌아가자마자 일단 씻은 뒤 세인에게 차를 부탁하고는 자신의 방에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