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래서 대충 이렇게 되었다.”
그날 저녁, 베오날드는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중요한 일인 만큼 모두의 동의가 필요했기에 그는 황실 기사단원인 레파르트 경에게 받은 제안을 세세하게 설명했고, 제국 수도로 갈 것이라고 했다.
“수도로… 말입니까?”
“그래, 여기서 할 일은 대강 끝났으니 말이야. 젤커드 자작의 세력은 확실히 커졌고, 이걸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그리고 여기 오래 있어 봐야 젤커드 자작의 아래에 있는 귀족들이 날 시샘할 거고, 또 내 태생을 언급하면서 잡음이 일어나겠지.”
“으음, 부인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평민 학부로 들어가려고 한다. 어차피 내 목적을 이루는 것엔 그거면 충분하다. 학비도 두둑이 받은 게 있고, 이번 전쟁으로 얻은 이익에 대한 사례도 받을 거니 말이다.”
베오날드의 목적은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하거나 학문을 익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평민 학부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끄는 일행은 어떻게 할지를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상단 주인의 자식으로 위장해서 입학할 생각이다. 평민이더라도 아무 배경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리고 세인, 너는 내게 고용된 고용인 입장으로 함께한다. 하이디, 마찬가지로 너는 기사임을 숨기고 내 경호원으로 위장해서 함께하겠지만 알테리오를 돌보는 일과 수련에 힘쓰도록 조치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알테리오는 내 애완동물로 해서 들어갈 예정이다. 이미 레파르트 경에게 승인서를 받아 놨다.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으니 제국 아카데미에서도 뭐라고 하진 않겠지. 그리고 아카데미 내부 숙소에 들이지 못할 경우 아예 제국 수도 내에 있는 저택을 하나 살 생각이다.”
“저기, 저는 그럼 어떻게 하죠?”
한참 두 사람에게 브리핑을 하던 찰나, 셀리나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은 왜 언급 안 하냐는 뾰로통한 시선을 보내는데, 베오날드는 전혀 생각을 안 했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아, 셀리나, 엄연히 넌 내… 아랫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침을 줄 수 없지. 오히려 내 계획을 듣고 어떻게 할지를 내가 들어야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아, 맞아. 그렇지. 으음~ 그렇지만 딱히 마탑에 돌아가도 지루한 연구만 할 뿐이고, 베오날드 님과 다니는 게 재미있고 배우는 것도 많으니 계속~ 따라다니죠.”
“그거 좋은 소식이군. 역시 마법사가 있어야 연금술에 도움이 되니까. 만약 떠난다고 했으면 아카데미에서 다시 구하거나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고 했었지.”
이번에 ‘베노피스 강’을 만들 때라든가, 용광로에서 이것저것 할 때 느낀 점은 확실히 실력이 모자라도 마법사가 있으면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전생에는 이미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백작가라서 따로 마법사를 고용할 필요 없이 그냥 마법 도구를 만들어서 직접 쓰면 되었고, 필요한 주문은 일일이 스크롤을 사서 해결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로 재정이 풍부한 게 아니었으니 그녀의 유용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기요, 절 무슨 편리한 마법 도구 취급하시는 건 아니죠?”
“아… 그건 아니다. 아마도…….”
“그 긴 침묵은 뭔가요? 게다가 아마도?”
“자, 그러면! 슬슬 갈 준비를 하지. 겨울이 오기 전에 수도에 도착하는 게 좋을 테니까.”
베오날드는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먼저 움직였고, 본격적으로 수도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젤커드 자작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마차를 비롯해서 수도로 갈 준비는 차곡차곡 되어 갔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수도까지 호위해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베오날드 님.”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뭔가 들려온 소식 있습니까?”
“아, 메이라 부인은 결국 신전으로 가서 평생 고된 노동과 속죄를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랄트 도련님은… 자살을 했다더군요. 이거저거 힘들었을 테니 말이죠. 결국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을 데릴사위로 들여서 임시로 후계자 문제에 대비하고, 렌겔 가주 대리가 새로운 후사를 낳으려고 노력 중이라고 합니다.”
“정석, 그 자체군요.”
자신이 렌겔 가주 대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깔끔한 조치였다.
굳이 메이라 부인을 죽이지 않은 것은 아직도 과거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였던 자들이 일부 살아 있는 상황이고, 죽임으로써 동정받거나 혹은 다른 사태의 기폭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른 시점으로 보면 그녀는 그저 아들의 안위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어머니이기에 숭고하게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신전으로 보내는 게 베스트였다.
“그러면 그… 메이라 부인의 곁에 딱 붙어 있던 제드 경이라는 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지를 떠났습니까? 아니면 다르게 처벌받거나 처형을?”
“아, 그는 그러니까…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일단 전쟁에 직접 참여한 게 아니라 본래 임무인 메이라 부인의 경호에만 신경을 썼고, 다른 행위를 일절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다른 죄목을 얹으려고 해도… 주군을 잘못 만난 걸 죄라고 할 순 없고, 또 캘러메인 영지에선 나름 명망이 높았거든요.”
“그가요?”
“예. 수도에서 중급 기사 인증에 합격하고,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공훈을 세운 기사라, 수많은 귀족들이 러브콜을 했지만 결국 로이엔 남작가로 가서 메이라 부인의 기사가 되어 평생을 바쳤잖습니까? 젊을 때야 아름다운 레이디여서 섬겼다곤 하지만 정략결혼 후, 자식까지 낳고도 그의 충성은 변하지 않았으니… 기사의 귀감 중 하나로서 명망이 높을 만하지요.”
“흐음, 그래서 결국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설마 메이라 부인을 따라서 신전으로 간 건……?”
“맞습니다. 메이라 부인의 처분을 듣자 그는 즉시 스스로 머리를 밀고 검과 갑옷을 벗고 메이라 부인을 따라 신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정말… 지고지순한 기사의 귀감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귀감은 무슨! 미친놈이지!’
감정이 치밀어 오른 베오날드는 표정을 감출 순 없었지만 그래도 입단속은 할 수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제드 경의 그 모습을 생각하자 그는 불쾌감이 온몸을 기어다니는 느낌이었다.
신념에 미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광신도 같은 인간. 계산과 이론, 합리를 좋아하는 베오날드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그렇지요. 후우~”
“아, 그리고 저희 영지의 대장장이가 전에 말한 비법을 알려 달라고 베오날드 님에게 전해 달랍니다.”
“아~! 그것도 있었죠. 그건 뭐 전갈 한 장이면 충분하니 걱정 없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부모님에게도 전갈을 보내야겠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직접 찾아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그분들도 좋아하실 겁니다.”
“음, 그게 좋겠군요.”
이제 캘러메인 영지를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베오날드는 여기서 떠나기 전에 친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자 더스티클록 영지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로이엔 남작의 영지에서 거리가 꽤 되었지만, 혼자서 말 3마리와 알테리오를 교대로 타면서 가니 보통 속도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음, 여전하네. 하긴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변할 게 없지.’
그래도 나고 자랐던 곳이라서 그런지 촌구석 같은 시골의 작은 저택을 보니 살짝 그리움이 솟아났다.
베오날드는 들어가면서 곧바로 시종을 지나치고 큰 소리로 부모님을 불렀다.
“저 왔습니다! 어머님!”
“어, 어머! 이게 누구야? 베오날드니? 세상에나! 갑자기 어쩐 일이니?”
“얼굴 뵈러 왔지요. 그보다 아버님이랑 동생들은?”
“늘 있는 영지 순찰이지. 그리고 동생들은 영지 아이들이랑 지금 뛰어놀고 있단다. 아무튼 정말~ 정말 늠름해졌구나.”
캘러메인 백작가에 들어간 이후 약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한창 성장기인 베오날드의 겉모습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말과 알테리오를 격리시켜 둔 베오날드는 모친과 인사를 나눈 뒤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저녁엔 부친과 동생들까지 돌아와서 다 같이 식사를 하며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특히 가장 경악한 사람은 부친인 더스티클록 자작으로, 드문드문 그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었는데 사실이라는 것에 더더욱 놀란 것이었다.
“네가 활약하는 이야기는 드문드문 들었다만 설마… 전쟁까지 참여했을 줄이야. 역시 넌…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아이였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그래도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확실히 여기입니다.”
벨릭스 폰 노이멀에게서 태어났던 전생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자리를 빼앗고, 경쟁하고, 암살하고, 독살하고, 서로 패를 이루는 등등… 지옥 같은 과정을 통해서 살아남았던 그때에 비하면 온전히 가족의 사랑을 누리고 자란 지금의 생은 천국이었다.
‘…이제 좀 신의 뜻이라는 걸 알 것 같군.’
여신이 왜 굳이 이런 곳에 자신을 태어나게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베오날드였다.
다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분명 자신은 전생처럼 헤쳐 나갔겠지만, 이 따뜻하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커, 커억! 우웨에에엑! 베, 베오날드 이 새끼! 내, 내 음식에 독을! 커어어억!’
‘쿨럭! 쿨럭! 베… 베오날드 오빠, 갑자기… 왜?’
“와… 예쁘다아아. 이런 거 처음 봐요, 오라버니. 고맙습니다!”
“나는? 나는? 와! 멋진 투구다. 고맙습니다, 형님.”
전생에선 살아남기 위해서 여동생과 형제에게 칼을 꽂고 독을 선물했는데, 이번 생엔 그런 걱정 없이 순수한 호의를 담아서 선물을 줄 수 있고, 그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들을 수 있으니 훨씬 나은 삶이었다.
“베오날드? 괜찮니?”
“아, 예. 동생들이 좋아하니까 저도 기분이 좋아서… 하하.”
“그나저나 아까 전에 제국 수도에 간다고 했었지? 그러면 다음엔 이제…….”
“아마… 못 돌아올 가능성이 커요. 그래서 이번에 굳이 온 거예요.”
“그렇… 구나. 하긴 너는… 이 작은 물에서 놀기엔 너무나 뛰어난 아이니까…….”
서글픈 표정을 하는 모친. 베오날드의 마음도 조금 무거워졌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다시 태어난 것엔 이유가 있고, 숙명이 있었다.
그래도 따스한 가정과 성장 과정을 선물해 준 모친을 위해 끌어안고 위로해 주었다.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못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꼭 살아 계실 때 한 번은 더 올게요.”
“그래, 그러렴. 그 말만이라도 고맙구나.”
“울지 마세요, 어머님.”
졸지에 식사 자리가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고, 부친인 더스티클록 자작은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일단 쌍둥이 동생들을 데리고 빠지는 걸 택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도 베오날드는 이번 생의 가족들과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쌍둥이 동생들에게도 그랬듯이 부모님에게도 선물을 건네었다.
“짠~ 아이들 것만 있으면 섭섭하겠죠?”
“아니, 오히려 우리가 줘야 하는데… 어쩜…….”
선물이 든 상자를 열자 안에는 일단 금은보화가 가득했고, 별도의 칸에 따로 나눠져 있는 상자를 열자 안에는 고급스럽게 포장이 된 포션병들이 여럿 보였다.
베오날드의 부모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눈으로 베오날드를 살펴보는데, 그는 미소 지으며 그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덕에 포상을 받았어요. 영지 재정에 보태시라고 금화랑 백금화, 보석 좀 챙겨 왔고, 또 건강 챙기시라고 포션도 몇 개 가져왔어요. 거울에 인부들 좀 더 고용해서 공사하세요. 큰 비가 내리면 다 쓸려 나갈 것 같아서 늘 걱정했단 말이에요. 포션은 두 분이 각각 하루 한 개씩만 드시면 돼요. 기운이 난다고 막 2개씩 먹지 마시고, 하루 한 개씩 나눠서 드세요. 아셨죠?”
“그, 그래, 알았다. 세상에… 어쩜…….”
“정말로… 대단해졌구나… 우리 아들.”
전생이 있기에 이미 태어날 때부터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베오날드는 부모의 기쁨을 깨지 않기 위해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전생에도 안 해 본 마음 따뜻해지는 효도에 이제 더 이상의 후회는 없을 거라 생각한 베오날드는 그날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다음 날 새벽 일찍 부모님의 슬픈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몰래 더스티클록 영지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