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다음 날.
베오날드가 눈을 뜬 것은 햇살이 너무 밝은 건 물론이고 뜨거워서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 된 시각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방 안에 있는 시계를 본 그는 ‘조금만 있으면 점심때구나.’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젯밤 하이디와 단둘이 보낸 흔적들이 역력했는데, 다 마신 술병들이 굴러다니는 건 물론 자신의 옷과 속옷, 하이디에게 선물로 한 드레스가 엉망으로 찢어진 채 정리되지 않고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너무 오랜만이라서… 나도 좀 거칠었군. 조금 취하기도 했고 말이지.’
“으으음… 음…….”
옆에서 작은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들려오자 이번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한 금발이 햇빛을 반사하는 가운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미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어깨 아래로 그녀가 덮은 이불이 몸매를 따라서 내려가면서 굴곡이 지고, 그 아래로 아주 긴 나신의 다리가 쭉 뻗어 있었다.
“베오날드… 님…….”
‘…뭐, 이 몸으로 첫 경험은 중요하다곤 했지만, 이 정도로 사랑스러우면 만족스럽지. 물론 그… 행위(?)도 만족스러웠고. 그럼 민망하지 않게… 먼저 치워 볼까?’
베오날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광란의 밤으로 어지러워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하이디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옷들과 술병과 잔 등등… 어젯밤 광란의 흔적을 지워 나간다.
그다음에 옷을 갈아입은 그가 아주 조용히 방을 나서자 문밖에서 세인이 그를 맞이했다.
“일어나셨습니까? 베오날드 님.”
“아,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나?”
“예.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그보다 하이디 경은?”
“아직 꿈나라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푹 자게 둬라. 휴식은 중요하니 말이다.”
“예.”
대답하는 세인의 목소리에 어딘가 힘이 없다는 것을 베오날드는 빠르게 눈치챘다.
전생에 부인을 두 자리, 세 자릿수로 두고 놀던 몸이다.
여성의 반응과 행동에 대한 눈치는 정치보다 더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필시 어젯밤 하이디와 잠자리를 가진 것 때문에 여러 가지 미묘한 감정이 든 것이리라.
“세인,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런 남녀 관계에 대한 선택권은 모두 너희에게 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정원에 들어온 모든 이들을 사랑해 줄 수 있다. 하이디가 전쟁에서 공을 세우긴 했지만 딱히 그것 때문에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게 아니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어서 나에게 말할 용기가 난 것뿐이지.”
“…….”
“귀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알다시피 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론 잔혹하고 무서운 짓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남녀의 관계에서 만약 내가 먼저 ‘선택’을 하게 될 경우 자칫하다가 상대의 의사를 무시해 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선택은 너희에게 맡기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후사를 위해서 아기로 세금까지 받던 미친 아버지인 벨릭스 폰 노이멀 때문에 그런 것이지만, 전생의 아버지였기에 지금 적용할 수 없어서 그가 했던 일과 행동을 에둘러서 설명하는 걸로 대신했다.
“아니면 너는 그런 내가 보고 싶은가? 자기 아집만 강요하고, 귀족 간의 권력 다툼처럼 나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보고 아무 선택권도 주지 않고, 상대를 소유하고 지배하며 감정을 이용하는 나를?”
“…아, 아닙니다! 이, 이해했습니다. 베오날드 님은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럼 됐다. 추가로~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한 사람만 사랑할 생각도 없으면서 너만을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한다. 아무튼 이걸로… 음?”
꾸욱~
세인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알자 그녀가 이해했다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다시 갈 길을 가려는데, 갑자기 오른팔에서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세인이 고개를 숙인 채로 베오날드의 옷소매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아래에 붉어진 얼굴을 보면 어떤 신호인지는 더 말할 필요 없이 눈치챌 수 있었다.
베오날드는 곧바로 세인과 함께 이 저택에 다른 누군가가 오지 않을 빈방으로 향했다.
***
이런 일, 저런 일을 하고 난 뒤 정오를 넘어서 오후가 되어서야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이 있는 집무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젤커드 자작은 미소를 띤 채 능글맞게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오셨군요, 베오날드 님. 어젯밤 꽤 격렬하셨으니 그럴 것 같았습니다만, 그래도 많이 늦으셨군요. 하하핫.”
“아~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사끼리라 역시 서로 그… 스태미나가 보통이 아니다 보니 말이죠.”
하이디를 푹 재워 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베오날드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사실 일어난 건 오전이지만 그 뒤로 한 타임 더(?) 뛰고 왔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아무튼 베오날드는 적당히 둘러대었고 젤커드 자작도 그쯤에서 이해를 마쳤다.
“아, 그거 이해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크흠! 아, 이거 이야기가 샐 뻔했군요.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는데…….”
“기다리는 분?”
“예. 아시다시피 캘러메인 백작님의 성 옆에서 싸울 때, 성벽 위에서 참관하신 분들이 있잖습니까?”
“그렇죠.”
“거기에 제국 수도에서 오신 분이 있는 것도 아시지요? 감찰관으로서 말이죠. 바로 그분입니다. 아마 곧 오실 겁니다. 그… 꼭 베오날드 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베오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작다곤 해도 엄연히 가문 대 가문의 분쟁이고 운이 없으면 확전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니 제국 수도에서도 파견을 온 거였다.
‘음, 하긴 날 만나는 것도 당연한가? 사실상 이번 전쟁의 조커였으니 말이지. 다만 어떤 인간이 오는 건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인데…….’
“실례합니다. 젤커드 자작님, 수도에서 오신 황실 기사단원 레파르트 경이 도착했습니다.”
“오, 도착했군. 안으로 모셔라.”
문을 열자 거기엔 한 마리의 야수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대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하이디보다도 머리 하나가 클 정도로 거대한 그는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하고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였다.
하나 그런 거대한 덩치임에도 걷는 데 발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고, 뿜어내는 예기와 위압감이 상당한 걸로 봐선 과연 ‘황실 기사단원’이라고 칭할 무력이 있음을 짐작케 했다.
‘…이거 상당한 걸물이 납셨군. 이런 곳에 올 인물이 아닌데?’
“황실 기사단 소속 레파르트라고 합니다. 베오날드 캘러메인 도련님이 맞으신지요?”
“예, 맞습니다. 레파르트 경,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파르트 경과 인사를 나누며 눈을 마주친 베오날드. 위압감이 상당했지만 그래 봐야 단 한 사람의 무인이다.
제국의 군사 회의장에서 수많은 장군과 무인들의 시선을 일제히 받고도 멀쩡했던 베오날드로서는 아무런 프레셔가 느껴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좀 덩치가 큰 고릴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아직도 재 보는 건가? 그만 좀 해라. 너 따위에게 쫄아 붙을 내가 아니다. 흥, 날 얼어붙게 하려면 적어도 황실 기사단장 정도는 데려와야지.’
“음, 실제로 보니 소문 이상이시군요, 베오날드 도련님.”
“소문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절 만나고 싶다고 하셨는데… 만나는 것으로 끝이신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베오날드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은 레파르트 경이었다.
베오날드도 지지 않겠다는 듯 앉아서 그를 바라보는데, 여전히 무슨 조각상인 양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파르트 경은 베오날드에게 다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곳에 온 건 젤커드 자작님과 로이엔 남작님 간의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감시하고, 캘러메인 백작이 중재를 잘하나 보기 위해서 온 것이었습니다. 한데 베오날드 도련님을 보니 놀라운 일의 연속이더군요. 전장에서 직접 보병의 전열에서 활약하신 점도 그것이지만, 가장 놀라운 건 이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이 베오날드 도련님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었다는 것.”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과한 칭찬이시군요.”
“젤커드 자작님에게 일의 전말을 들었는데… 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캘러메인 백작가의 어리석음에 안도해야 했죠. 이런 인재가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중앙으로서는 상당히 골치 아팠을 테니 말입니다.”
‘설마… 불안의 싹을 제거하러 온 건가? 제길! 무장을 안 했는데……! 게다가 하이디는 아직!’
레파르트 경의 말에 베오날드의 경계심은 최대로 올라갔고, 무기가 없는 이 상황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장 상태도 무장 상태지만, 저 황실 기사단원의 무력은 딱 봐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내 개인 기량을 올리질 못했어. 젠장할! 만약 여기서 싸운다면… 젤커드 자작을 미끼로 해서 도망을 쳐야 하나?’
“그래서 말입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혹시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아카데미?”
“예. 6개의 나라가 서로 경쟁을 하는 이 난세, 베오날드 도련님 같은 인재가 이 제국엔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합니다. 제가 직접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연령도 마침 올해 17살이시니 충분히 입학이 가능합니다. 본래 15세부터 20세까지 모아서 교육시키는 곳이니 말입니다.”
‘…오, 이건 꽤…….’
어차피 제국 수도로 갈 생각이었던 베오날드에게는 엄청 반가운 소식이었다.
젤커드 자작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제국 수도로 가서 자신의 영지였던 ‘베노피스’를 찾는 일과 어떻게든 영지를 가지거나 아니면 제국의 상층부로 입신양명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꼴에 여신이라고 이런 부분에서 챙겨 주는군. 이게 신의 인도라는 건가? 아주 다행이군.’
“장래에 관한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더 큰 세상을 보실 것이고 배움의 기회도 많을 것을 보장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정하기 전에 제국 아카데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들어갈 곳에 대해서 모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말입니다.”
“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럼 알려 드리지요. 또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
사실 승낙할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이 황실 기사단원에게 얻어 낼 수 있는 정보는 모조리 얻어 내자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슬쩍슬쩍 레파르트 경에게 질문하고 대답을 들으면서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에 대한 정보는 물론 현재 황실의 상황까지도 윤곽을 잡아낼 수 있었다.
“혹시 더 질문이 있으신지요?”
“아뇨. 이제 됐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제국 아카데미… 입학하겠습니다.”
베오날드가 확실한 대답을 내놓자 레파르트 경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물론 그래도 기존의 무서운 인상은 그대로라서 긴장을 놓을 수 없었지만, 그는 곧바로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추천서를 쓰고자 했다.
“그럴 거라 믿었습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그럼 바로 추천서를 쓰겠습니다.”
“그… 추천을 해 주시는 건 좋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말씀이십니까?”
“예. 제국 아카데미는 말해 주신 대로 귀족들이 입학하는 학부와 평민들이 입학하는 학부가 따로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어차피 저는 귀족으로서는 반푼이라서, 이곳에서도 그랬지만 저는 이대로 귀족 학부로 가 봐야 분란의 씨앗밖에 되질 않으니 평민 학부로 들어가서 조용히 지내고 싶습니다.”
레파르트 경은 베오날드의 부탁에 순간 놀랐지만 잠시 생각해 본 결과 그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하다고 생각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곳에서 일어난 전쟁도 그의 혈통 문제가 시발점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제국 수도에 있는 아카데미로 가면 이보다 더 심한 차별과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레파르트 경은 베오날드를 평민 학부로 입학시키라는 추천서를 써 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