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뒤처리는 비단 젤커드 자작과 베오날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캘러메인 백작가에서도 이번 일로 인해서 권력 구도라든가 서열 등등… 많은 것이 변하기에 렌겔 가주 대리가 해야 할 일도 아주 많았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하도록 하시오, 부인.”
메이라 부인은 현재 캘러메인 백작가 저택에 있는 지하 감옥에 수감된 채로 붕대 없는 얼굴을 보여 주기 싫은 듯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그리고 남편인 렌겔 가주 대리가 말을 걸자 그녀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그를 노려보면서 악을 썼다.
“나는… 나는 아무 잘못 없어! 이게 다! 그 잡종! 잡종 탓이야! 우리 랄트의 자리를 위협하는 걸! 아버님도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게다가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든 것도 그 잡종이 한 건데! 왜 내가! 왜 내가 여기 갇혀 있어야 하냔 말입니다! 나는 엄연히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를 낳은 몸이에요! 그러니 당장 풀어 주세요!”
“으음,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요?”
“…아니, 대체 무슨…….”
“아마 지금쯤이면 이 세상에 더 이상 로이엔 남작가는 존재하지 않을 거요. 젤커드 자작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주 엄격하게 후환 없이 끊어 낼 작정이더군.”
“……!”
남편인 렌겔 가주 대리의 말에 메이라 부인의 안색은 파래졌다.
지금 한 말의 의미, 로이엔 남작가가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그녀의 근본이 사라졌다는 말과 같다.
이는 한순간에 자신의 근본과 혈통, 정략결혼의 가치가 모조리 사라졌다는 뜻이다. 물론 로이엔 남작가의 이름은 역사서에 남지만, 실질적으로 메이라 부인은 이제 귀족가의 여식이 아니라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
“…자, 잠깐만! 잠깐만요. 그래도! 그래도 나는! 나는 랄트의 엄마예요. 캘러메인 가문의 후계자를 낳은…….”
“하나 이젠 그 베오날드와 똑같이 잡종이 되었지. 근본이 사라졌으니 말이오. 과거의 기록과 역사? 흥! 영지도, 가문도 없는 집안의 자식을 과연 누가 귀족이라고 할 수 있겠소?”
“…아, 아니… 아…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니야! 아니야! 나는 메이라 로이엔! 역사 깊은 로이엔 가문의 자랑스러운 장녀야! 감히 누구를!”
“그래 봐야 미치광이가 스스로 황제라고 부르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아무튼… 뛰어난 지혜와 무위, 품위,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잡종이면 후계자로 삼을 수 없는 게 우리 가문의 모토. 그렇다면 자신의 책임과 임무를 방기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잡종 또한 후계자가 될 수 없겠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 그아아아아아아악!”
졸지에 ‘잡종’으로 격하되어 버린 랄트에 대해 듣자 메이라 부인은 미치광이처럼 발광하면서 더더욱 날뛰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자신의 소중한 아들인 랄트가, 자신 때문에 그 처리하려던 ‘잡종’과 똑같은 위치로 떨어지다니.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어서 그녀는 정신을 놓고 발광했다.
“아름다울 때도 추악했는데, 그 모습이니 더 추악하군. 암흑신이 만든 악마가 바로 이런 모습이겠지.”
“아니야. 아니야. 우리 랄트는… 우리 랄트는 잡종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 모든 건 그 잡종 때문이야.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 아니야. 랄트, 랄트, 캘러메인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인데, 잡종이라니. 잡종이라니. 나 때문이라니 믿을 수 없어. 인정할 수 없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무튼 그 추악해진 모습도 그렇고, 이제 더 이상 귀족이 아닌 당신을 부인으로 둘 이유는 없지만, 비록 정략결혼이라고 할지라도 신전에서 결혼을 맹세했기에 이혼은 하지 않을 거고, 목숨도 빼앗지 않겠소. 하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인해 가문을 멸망시킨 점을 들어 신관이 되어 평생 노동과 기도를 하며 신께 속죄하시오.”
“내가 왜? 뭘 속죄하라고! 나는 아무 죄가 없어요!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잠깐! 그럼 우리 랄트는? 우리 랄트는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 랄트는 어떻게 할 거냐고!”
“어떻게 하긴. 당신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오? 아무튼… 이제 더 이상 볼 일 없겠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곧바로 신전으로 향하시오.”
그렇게 말한 뒤, 렌겔 가주 대리는 메이라 부인을 뒤로하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메이라 부인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캘러메인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곧바로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던 랄트 캘러메인은 그나마 캘러메인 백작의 노력 덕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긴 했지만, 아직도 방에서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무겁고 힘들던 업무의 공포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서류 같은 것을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거부감을 호소한 것이다.
아무튼 며칠 동안 저택이 엄청 시끄러웠던 것을 떠올리며 드디어 오늘은 조용해졌구나 생각한 그가 잠들기 위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랄트 도련님, 계십니까?”
“누군가? 이 시간에?”
“란테로 경입니다. 백작님의 전갈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할아버님이? 아, 그렇군. 문 앞에 두고 가게.”
“백작님께서 직접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백작인 할아버님이 자신을 각별히 생각하는 것을 아는 랄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고 기사들에게서 전갈을 받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린 순간 갑자기 한 기사가 맹수처럼 자신을 덮쳤다.
“이게 무… 으읍! 으으읍! 으읍! 으음!”
“도련님, 죄송합니다. 이게 모두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란테로 경이라 불린 기사는 그대로 랄트의 입에 천을 물리고는 제압해서 이불로 둘러싸 두었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다른 기사 2명이 방에 있는 의자와 책상을 옮기고, 랄트가 올라갈 수 있을 만한 침대 외곽 기둥에 밧줄을 묶은 다음 끝부분을 동그랗게 마치 교수형에 쓰는 것처럼 매듭을 짓기 시작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게다가 저… 저건? 설마?’
그것을 본 랄트는 싸늘한 느낌과 함께 이 기사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할 건지 대충 예감했다.
목적과 이유는 모르지만 이들은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자살로 위장해서 죽일 생각인 것이다.
“필적은 어떻나?”
“이 정도면 비슷하겠지요. 더불어 모친의 사정을 알린 전갈도 짜 맞춰 놨습니다.”
“그래, 잘했어. 그럼 마무리하지. 도련님, 다시금… 정말 죄송합니다.”
‘안 돼! 안 돼! 난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어어어!’
열심히 발버둥 치지만 이불만 살짝 들썩거릴 뿐, 기사의 제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 상태 그대로 기사 2명에게 들려서 아주 천천히 자살을 위해 묶은 밧줄로 옮겨져 갔다.
랄트는 계속해서 발버둥을 쳤지만 기사들의 동체 시력과 운동 능력을 압도할 순 없었고, 아주 가볍게 목이 밧줄에 걸리면서 체중이 실렸다.
‘안 돼! 나는! 나는 살고 싶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안 돼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정말 이 방식은 너무 번거롭다니까요. 그냥 칼로 베는 게 훨씬 빠른데, 꼭 자살로 위장해야 한다니…….”
“어머님의 실각으로 인한 실망과 후계자로서의 부담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라는 시나리오로 만들어야 가문의 명예가 상처 입지 않는다. 멍청한 놈이 후계자 자리에 앉는 것보단 낫지.”
발버둥 칠수록 체내의 산소가 점점 고갈되고, 서서히 죽음이 랄트를 감싸 안는 사이에 들리는 기사들의 말.
왜 자신이 죽는지에 대해서 알아 두라는 이야기 같았다.
“그럼 후계자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은 렌겔 가주 대리님께서 다른 부인과 다시 힘써 본다고 하는군. 다만 그 전까진 제시 아가씨랑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 도련님을 혼인시키고, 에라솔 도련님을 데릴사위로 들여서 가문을 운영하게 한다더군.”
“어? 저는 베오날드 도련님이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현재의 백작님이 돌아가신 뒤에 돌아오면 약속 따위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이미… 베오날드 도련님의 마음이 떠난 모양이야. 아무튼 정말… 죽 쒀서 남 준 격이지. 쯧쯔쯔… 아, 드디어 멈췄군. 확인해 봐.”
“예. 음… 죽었습니다.”
이야기하는 사이 결국 랄트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캘러메인 백작가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결국 성인이 되고 2년도 못 되어 가문의 미래를 위해 자살로 위장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메이라 부인이 베오날드를 처리하고자 하는 욕심만 덜 부렸거나 아니면 랄트, 그가 후계자의 일에서 도망치지 않고 계속 버텼더라면 이런 일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이 자기 응보이자, 귀족가의 자제로 태어나 패배자가 된 이들의 숙명이었다.
***
며칠 뒤.
어둡고 더러운 청소일과 각종 정리가 모두 끝난 뒤에야 드디어 젤커드 자작은 승리의 연회를 열 수 있었다.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로이엔 남작가의 저택에서 젤커드 자작은 자신의 파벌 귀족들을 모두 초대해서 성대한 잔치를 열고 전쟁의 성과를 자랑하는 동시에 이번 전쟁에서 힘쓴 기사들에 대한 논공행상도 해야 했다.
“젤튼 경, 후방 궁병대를 전멸시킨 그대의 지휘와 용맹은 아주 훌륭했소. 봉토와 자금, 어느 쪽을 원하시오? 원하는 걸로 주겠소.”
“감사합니다, 자작님. 그럼 저는 자금으로 받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봉토를 원하는 기사에겐 봉토를 배분하고, 자금을 원하는 기사들에겐 자금으로 보상을 내렸다.
양쪽 다 장단이 있는 보상으로, 봉토를 받으면 그 땅에서 나오는 세금과 산물, 노동력 등을 지속적으로 받거나 이용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직접 머물러야 하고 여차할 경우 외적의 침략을 막아야만 했다.
반대로 금전을 받을 경우 봉토에서 나오는 수입보단 적지만 젤커드 자작의 영지에 거처를 두고서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고 할 일만 하며 가족들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음 공훈 대상자는 젤커드 자작가의 딸, 하이디 양입니다.”
“예!”
그리고 다음으론 하이디의 이름이 불렸다. 그녀는 전장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갑주를 입은 채로 포상을 받기 위해 젤커드 자작의 앞에 가서 예를 갖추었다.
연회인 만큼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자신의 외양도 외양이고, 전장에서 공을 세운 것이 있기에 그것을 축하받기 위해선 이 갑주 차림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이디! 너는 그리폰 알테리오를 타고 전장에 나가 아군의 후방을 노리는 적 기병대의 측면을 덮쳐서 진형을 부수어 큰 피해를 입히고, 적 기사들의 목숨을 끊었다. 거기에 로이엔 가문의 명성이 높은 중급 기사 벤트 경과 일대일로 싸워 승리하여 용맹으로써 우리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이로써 너의 무위는 ‘기사’급에 속하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며 ‘하급 기사’로 인정하겠다.”
“가, 감사합니다.”
중급 기사를 잡았는데 왜 하급이냐?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중급 기사 이상부터는 공훈을 세우고 난 뒤 제국 수도로 가서 심사를 거쳐서 통과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그녀가 중급 기사를 이길 정도로 강하더라도 곧바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전투에서 네가 없었더라면 아마 아군에 더 큰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말하거라. 금전? 봉토? 뭘 원하느냐?”
“실은…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금전으로 받겠으나 그것을 제가 아닌 벤트 경의 남은 가족들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비록 적으로 전장에서 만나 싸웠지만 그는 용맹했고,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답례를 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저는 앞으로도 베오날드 님을 따라갈 것이라서 말입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하이디는 예를 갖추고 물러나서 베오날드에게로 복귀했다.
베오날드는 현재 세인의 시중을 받으며, 셀리나와 마주 앉아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연회를 즐기는 중이었다.
“어, 돌아왔어? 그나저나 보상은 받아 두지. 그래도 괜찮겠어?”
“그… 받을 걸 그랬습니까?”
“아니, 네 뜻이 그러하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다. 네 노력으로 얻은 것을 좀 더 널 위해 썼으면 하는 생각으로 말한 것뿐이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런데… 베오날드 님, 저기… 그…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그… 이번에 공을 세운 건… 맞잖습니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베오날드 님에게 보상을 받… 싶은데… 그… 그… 전에… 전쟁터에서… 개전하기 전에 했던 그것의 다음을… 다음을…….”
방금 전까지 젤커드 자작 앞에서 위풍당당하게 포상을 받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갈수록 조그맣게 되는 목소리로 베오날드에게 말하는 그녀였다.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는 하이디는 괜히 말했나 싶어 눈을 꼭 감고 쩔쩔맸지만, 다행히 베오날드는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기에 술잔을 잠시 내려놓고 일어나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네 방에 네 몸에 맞춘 드레스와 구두, 액세서리들을 마련해 두었다. 대충 저 논공행상이 끝나면… 그것을 입고 내 방에서 밤새도록 두 사람만의 연회를 하도록 하지.”
“……!”
베오날드는 그렇게 말하곤 태연히 다시 술잔을 들이켜며 무슨 말을 했는지 묻는 셀리나와 세인에게 농담으로 둘러댔다.
그런 베오날드에겐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한 하이디는 잠시 후, 그와 함께할 밤을 기대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