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도 쓸데가 있다-63화 (63/259)

[63화]

비록 한나절 만에 끝난 전쟁이지만, 그래도 엄연히 가문과 가문이 명운을 걸고 벌인 전쟁이었고 캘러메인 백작가의 중재 아래 이루어진 만큼 승자와 패자의 처분은 냉혹하게 이루어졌다.

평야를 정리하는 가운데 대표인 젤커드 자작이 캘러메인 백작가로 가서 패자들에게서 대가를 받기 위한 회의와 과정을 이어 갔고, 결국 승자 인증과 함께 로이엔 남작가의 운명은 젤커드 자작의 것이 되었다.

“…우리 군사도 내어 줄 테니 우선 로이엔 남작가를 접수하게. 말데로브 경이 같이 가 줄 걸세. 그리고 곧… 중앙으로 보낸 서신이 돌아오면 그땐 아마 젤커드 남작이 되어 있을 걸세. 그리고 그의 신병도 넘기겠네.”

그리고 당연히 작위 또한 받게 되었으므로 제국 수도에 보낸 서찰에 대한 답장이 돌아오면 젤커드 자작은 남작으로 승작하게 되리라.

“정말 감사합니다, 가주 대리님.”

혹시라도 로이엔 남작가의 남은 병력과 가솔들이 반항을 할지 몰라서 백작가의 병력도 대동하는 것을 허가했다.

젤커드 자작은 모든 서류와 로이엔 남작에게서 빼앗은 인장을 들고나가려는데, 렌겔 가주 대리가 그를 잠시 불렀다.

“한데… 베오날드는 어째서 안 들어온 건가? 이 전투에 분명 참여했을 터인데…….”

“베오날드 도련님은 백작님과의 약조가 있는 터라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흠, 아버님과의 약조라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조언을 하시더군요. 집안 상황 잘 처리 안 하면… 큰일 날 거라고 말이죠.”

“크흠! 잘 알고 있네.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게. 아주 확실하게 할 걸세. 자네도…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하게나.”

“예, 백작 대리님. 그리고 다시금 정말로 감사합니다.”

젤커드 자작의 마지막 말엔 ‘베오날드 님을 집안에서 내보내시고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라는 긴 말이 빠져 있었고, 그 의도를 렌겔 가주 대리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정말로 죽 쒀서 남 주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를 뜻하는 것이리라.

렌겔 가주 대리는 젤커드 자작의 사람됨과 한계를 잘 알기에 이번 전쟁의 승리 요인이 베오날드라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후우~ 정말… 아깝기 짝이 없군. 아무튼 우선은 나부터 가문을 위한 일을 해야겠지.’

그렇게 렌겔 가주 대리는 한숨을 푹 쉬면서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가문을 지키고 영지를 키우며 자기 다음 대의 미래를 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베오날드 일행과 젤커드 자작의 군대는 전장을 정리한 뒤 전리품을 가득 챙겨서 돌아갔다.

죽은 기사와 병사들의 무기와 장비 모든 것이 돈이었기에 수레에 잔뜩 실어서 무거운 손으로 돌아가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베오날드 님은 어떻게 델마인 남작의 군대가 배신할 거라는 걸 아셨습니까?”

“음? 아~ 그거 말입니까? 내가 전에 전갈을 보냈잖습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그것만 가지곤 델마인 남작이 배신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없잖습니까?”

“확신하진 않았지요. 배신하지 않았으면 그건 그거대로 싸워서 이길 생각이었습니다. 아마 해가 질 때까지 싸우고도 모자라서 수일간 더 싸워야 했겠지만 말이죠. 다만 배신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젤커드 자작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베오날드는 속으론 ‘그것도 모르나?’라고 생각했지만, 순수 무가의 가장인 그라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는 천천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귀족 간의 파벌이라는 건 말입니다. 일단 겉으로는 서로를 죽일 놈이라고 욕하며 없어지길 바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젤커드 자작님의 파벌이 있기에 델마인 남작님의 파벌이 결속력을 지니게 되고, 그중 세력이 가장 좋은 델마인 남작이 그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지요.”

“아, 그건 대강 이해할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전쟁 때로 돌아가 봅시다. 만약에 오늘 전쟁에서 로이엔 남작이 승리하고 자작님의 가문이 멸망하고 그 아래의 세력들이 모두 흡수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 떻게 됩니까?”

“별로 어렵진 않습니다. 자, 메이라 부인이라는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 어미를 가진 외가, 거기다 이번에 델마인 남작님의 강력한 경쟁 파벌인 젤커드 자작님의 가문을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흡수하면 이제 델마인 남작님에겐 강력한 라이벌이 새로이 생기게 되겠지요.”

그러면 캘러메인 가문의 힘을 빌려서 로이엔 가문의 입지는 압도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델마인 남작 아래에서 기죽어 지내던 생활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럼에도 젤커드 자작은 아직 의문이 있는 건지 다시금 의문을 제기했다.

“…하나 그렇게 치면 저도 델마인 남작과 대립하는 입장입니다. 결국 다를 게 없지 않나요?”

“아뇨. 젤커드 자작님은 파벌로 있어도 괜찮습니다. 파벌의 성향이 완전 다르니까요. 젤커드 자작님과 따르는 귀족분들은 대부분 캘러메인 백작군에서 종군한 기사이자 전장에서 공훈을 세워서 작위를 얻은 귀족분들, 흔한 말로 하자면 벼락출세 혹은 역사가 짧은 귀족들이지요. 반면 로이엔 남작가는 어떻습니까?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정략결혼을 시킬 정도로 역사가 깊은 정통 귀족 가문이죠. 거기가 파벌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됩니까?”

“델마인 남작과 로이엔 남작이 대립하는 가운데 아래에 있는 귀족들이 누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제대로 확인을 못하게 됩니다. 그나마 혼약 관계나 혈연으로 이어지는 건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게 안 되는 귀족들은 아주 골치가 아파지죠. 그리고 누군가는 그 위치를 이용해서 양측에 양다리를 걸치고 박쥐처럼 행동하는 자도 있을 테고 말이죠.”

“…아아아아아! 그것참!”

“상상만 해도 머리 아프죠? 지금 내 아래에 있는 이 귀족이, 이 기사가 누구 편인지 확신할 수도 없고, 경쟁자는 캘러메인 백작가에 후계자의 외할아버지와 메이라 부인이라는 든든한 뒷배까지 있는데… 이러면 누가 제일 머리 아프겠습니까?”

“델마인 남작이군요! 과연, 그 능구렁이는 결국 자신의 권력과 입지를 강화하는 걸 선택할 테니… 배신할 만하군요. 아니, 저라도 배신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걸 어떻게 계산하시고…….”

드디어 완벽히 이해가 되었다는 듯 젤커드 자작은 박수를 치면서 베오날드의 선구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귀족 간의 정치 관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이 선구안. 괜히 대귀족으로서 제국의 2인자로 군림했던 게 아니었다.

“하하하, 별거 아닙니다. 귀족의 천성이라는 게… 결국 다 같기 마련이거든요.”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베오날드 님.”

‘그렇겠지. 검토해야 할 게 몇 개나 되는데…….’

만약 로이엔 남작이 델마인 남작이 아니라 다른 귀족 가문에 기사와 병력을 빌렸을 때라든가? 만약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예상외의 행동을 했을 때라든가? 만약 델마인 남작의 정치 감각이 예상보다 떨어져서 진심으로 로이엔 남작을 배신 안 하고 밀어줬을 때라든가? 등등… 가정을 따지고 모든 선택지가 나쁘지 않을 행동을 연결해서 하는 게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계산과 예상에 따라서 주판을 무수히 두드리고, 여차하면 현실적, 물리적 수단까지 강구해야 하는 만큼 베오날드가 한 일은 오직 베오날드만이 할 수 있는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무튼… 로이엔 남작가를 제압하는 대로 제가 말한 것들을 델마인 남작가로 보내 주십시오. 뭔지 기억하시는지요?”

“누구 말인데 기억을 못할까요? 우선 로이엔 남작가에 있는 금은보화와 미술품 등등 현물을 확보하고, 로이엔 남작의 가솔들은 수레바퀴보다 큰 자는 모두 죽이고, 작은 아이들만 살리고, 다른 기사들의 가솔들은 건드리지 말라. 다 알고 있습니다.”

“참혹하다는 생각은 안 하시죠?”

“지금은 엄연히 난세이니까요. 후환은 없애 둬야 배신을 안 당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륙 전체가 6개의 나라로 나뉜 난세. 서로 칼부림까지 난 상황에서 적 가문, 그것도 전통이 있는 명문가의 핏줄을 완전히 끊어 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히 후환이 생긴다.

‘제대로 안 치우면 정말 단단히 골칫거리가 되니 말이지. 나도 교훈을 얻었고…….’

당장 베오날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요소로는 우선 안 해도 될 전쟁의 명분이 되는 것도 있고, 사내놈이 외국으로 빠져나가서 갑자기 승진해서 걸림돌이 되거나, 귀족 출신인 계집이면 귀족이나 상류층의 첩이나 후처로 들어가서 갑자기 권력 관계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근데 왜 굳이 수레바퀴보다 작은 아이는 살려 두시는 겁니까?”

“그 정도로 작은 아이들이라면 그리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고, 또 교육이 잘 되지 않아서 아직 자신이 어디 가문의 아이라는 걸 자각 못하는 때이니 충분히 덮어씌울 수 있습니다. 다만 노예로 팔진 마시고 철저히 자작님 가문의 하인으로 교육시켜서 관리하십시오. 최악의 적은 멀리 보내는 것보다 시야에 두고 관리하는 게 더 안심이 됩니다.”

“아! 예. 정말이지 베오날드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백작님 혹은 그 위의 분에게 조언을 듣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듭니다. 하하하, 역시 캘러메인 가문의 교육이 남다른 건지…….”

전생에 공작까지 오른 대귀족이니 젤커드 자작의 느낌은 100퍼센트 정확한 것이었다.

아무튼 로이엔 남작 가문으로 간 그들은 패전 소식과 함께 앞으로 로이엔 남작 가문의 명운은 젤커드 자작가에 있음을 알리고 로이엔 남작을 처형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미 로이엔 남작가의 주요 가솔과 기사들은 모두 이들에게 잡혀 있었기에 혹시나 예상했던 저항은 전혀 없었고, 무혈 입성한 다음 로이엔 영지를 봉쇄하고 남작가 저택의 가솔을 깡그리 잡아들였다.

“봉쇄를 유지하고 작은 꼬맹이 하나까지! 모조리 다 잡아들여라! 영지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가산을 챙기는 것도 잊지 말도록! 창고가 있을 만한 곳은 싹 다 털어라.”

“하이디, 잘 봐 둬라. 이게 패배한 귀족의 운명이다. 아름다운 꽃 아래의 흙속엔 이 같은 추잡스럽고 야만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 베오날드 님.”

로이엔 남작가의 가솔들이 모조리 잡혀 나오고, 수레바퀴보다 큰 자들은 즉시 처형되었다.

그나마 이 시대는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단숨에 검으로 무 베듯이 목을 숭덩숭덩 벨 수 있어서 신속하고 깔끔하게 처형을 했다.

이곳까지 끌려온 영지의 주인인 로이엔 남작은 가장 마지막에 처형해야 했으므로 그는 구속된 채로 자신의 가족과 아이들이 죽는 것을 처절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베오날드 님, 돈과 보물 및 현물의 확보가 대강 끝났습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할까요?”

“10퍼센트만 지금 같이 온 말데로브 경에게 줘서 캘러메인 백작가로 보내고, 나머지는 델마인 남작님에게 보내세요. 그래도~ 도움을 주신 분인데 이 정도는 보내야죠.”

“으음, 저희 기사들에게 보상도 줘야 하는데 말입니다. 너무 많이 보내는 것 같습니다만?”

“기사들의 보상은 이곳의 땅으로 주면 그만이죠. 만약 봉토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자산으로 주면 됩니다. 내년이면 세수가 2배 이상으로 뛸 건데,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보내 놔야 젤커드 자작님의 아래에 있는 귀족들이 시샘을 안 하고 자작님의 영향력이 유지가 됩니다.”

“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기 마련. 파벌의 수장인 젤커드 자작이 로이엔 남작의 영지와 재산을 모두 흡수한 것을 알면 파벌의 결속력이 흔들릴 수 있다.

물론 젤커드 자작이 로이엔 남작의 재산에서 일부씩 떼어 나누어 주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적게 받는 자와 많이 받는 자 간에 감정의 굴곡이 생기게 된다.

하나 델마인 남작과 캘러메인 백작에게 이런 식으로 던져 버리면 그쪽에 생색도 낼 수 있고, 적대 파벌인 델마인 남작에게 줄 수밖에 없었다는 언론 플레이도 되며, 델마인 남작은 델마인 남작대로 거액의 돈을 받으니 손해는 없는 거였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땅과 영지민, 그리고… 저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을 거둘 수 있게 되는 거지요. 봉토와 대우를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새로이 서약할 자들은 거두시고, 거절하는 자는 노자랑 식량을 챙겨 줘서 가족들과 함께 영지에서 내보내면 됩니다.”

“그래도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인데… 혹시라도 충성심에 공격해 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충성스러운 기사도 있긴 하지만~ 그건 대부분 기사도와 명예 때문에 강요받는 거죠. 아무튼 그렇게 보내 주면 알아서 젤커드 자작님의 휘하 귀족들이나 다른 지방으로 가서 몸을 의탁하게 될 겁니다. 용병 하기엔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가족들은 먹여 살려야 하고, 그렇다고 주군을 배신한 델마인 남작 측 파벌엔 절대 붙진 않을 거고~ 하하.”

“과연…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요.”

젤커드 자작은 베오날드의 뜻을 순순히 이행했다.

신기할 정도로 너무 순순해서 오히려 베오날드가 혹시 다른 꿍꿍이속이 있나?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렇게 젤커드 자작은 마치 오랜 기간 함께한 신하처럼 그의 말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완수하여 로이엔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 모든 영토와 영지민은 젤커드 자작이 흡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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