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나직이 중얼거린 베오날드의 말에 놀란 젤커드 자작이 그를 바라보는데, 베오날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정정했다.
“아, 이거 말을 잘못했네요. 쉽게 이기겠네요, 라고 말해야 했는데 말이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시면 압니다.”
그리고 눈앞에선 믿기지 않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쪽에 퍼져 있던 로이엔 남작가의 용병들이 갑자기 배신을 해서 같은 로이엔 남작가 보병의 후방을 유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다시피 그들은 용병으로 위장한 델마인 남작가의 군사들로 본래는 로이엔 남작가와 손을 잡았던 그들이 배신을 때린 것이었다.
‘음, 역시 500년 전이나 후나 귀족들의 정치 감각은 비슷하다니까…….’
“하… 설마 이걸 베오날드 님이 하신 겁니까?”
“예, 뭐~ 전 그저… 델마인 남작에게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대체 어떤 제안을 하신 겁니까? 무리한 제안을 하신 건 아닙니까?”
“전혀요. 나름 합당한 상식선의 제안을 했습니다. 보장할게요. 아무튼 이걸로 쉽게 이기게 되었으니 열심히 승리를 향해 걸어갑시다.”
서걱!
베오날드는 눈앞의 기사를 베어 내고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면서 계속해서 진군했다.
젤커드 자작가의 병사와 기사들은 난데없는 용병들의 배신에 의아해하면서도 아무튼 자신들이 이긴다는 것에 힘을 내고 있었지만, 반대로 로이엔 남작가의 병사와 기사들은 그 배신에 충격을 먹고 전선이 시시각각 붕괴되기 시작했고, 열심히 싸우던 기사들도 충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알룬 경이 왜 갑자기 우리를?”
“젠장! 이게 무슨!”
전선을 유지하는 보병들이 앞뒤로 공격당하는 상황이니 즉각 베오날드는 후방으로 가서 기사들을 제압하는 데 힘을 보탰다.
후방에 고립된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가장 상급자인 루튼 경에게 몰려들어 방침을 물었지만, 그라고 해서 이미 패배한 전쟁에 더 이상 방도가 떠오를 리 없었다.
“…루튼 경!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젠장! 델마인 남작 놈이 배신을 하다니! 같은 파벌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루튼 경!”
“루튼 경! 적들이 몰려옵니다.”
“루튼 경! 적 기사들이 포위망을 구성합니다. 빠져나가려면 지금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죠?”
“…항복한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루튼 경은 더 이상 이 작은 전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알고 포기하기로 한다.
비록 기사로서의 명예는 떨어지고, 오명이 남을지 몰라도 이 이상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 걸고 달려들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모든 기사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후우… 후우…….”
“젠장! 망할 델마인 남작가 놈들이 설마 배신을 하다니! 아니지, 처음부터 그 보랏빛 도련님의 계획이었으려나? 씁, 이 망할 전쟁… 졌군. 대체… 너희 도련님은 뭐 하는 괴물인 거냐?”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감쪽같이 모두를 속이고 델마인 남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일까?
그것은 오직 베오날드만이 알 일이었다.
결국 처음부터 이 전쟁판은 모두 베오날드의 손아귀에서 움직이는 거나 다름없었고,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 놓고 시작한 것인데… 어리석은 주인이 그것도 모르고 결국 사기도박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베오날드 님은 괴물이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무조건 괴물이라고! 후우~ 그래, 실력 많이 늘었더라? 아무튼… 너도 기사 가문의 따님이니까 내가 항복할 입장이 아니라는 건 알지?”
“…예.”
아무리 무의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항복한다곤 하지만 이미 그는 한 번 포로로 잡히고 대금까지 지불한 뒤 돌아온 불명예스러운 자였다.
그 명예를 되찾기 위해 지금 하이디와 싸우고 있었는데, 여기서 또다시 항복하게 되면 한번 낙인찍힌 불명예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과 집안에게까지 번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벤트 경은 이곳에서 하이디를 쓰러뜨리든 아니든 결국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주군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만이 최소한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가족과 자식들에게도 불명예를 물려주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오오오오오오!”
“가자! 알테리오!”
챙강!
하이디의 창과 벤트 경의 창이 또다시 부딪쳤지만 오러의 압력과 창 자체의 강도가 차이 나서인지 드디어 벤트 경의 것이 부러져 버렸다.
하나 이를 악문 벤트 경은 부러진 창 자루를 버리고 검을 들었고,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말을 버리고 그대로 하이디에게 뛰어들어 그녀를 알테리오에서 내리게 했다.
“어차피 죽을 놈이니까… 좀 비겁해도 뭐라 하지 말라고!”
“커억!”
퍼억! 터어엉!
기사라고 할 수 없는 자세로 하이디에게 올라탄 채로 얼굴에 주먹질을 하고 검에 오러를 실어서 갑주의 틈새를 찌르려고 하는데, 검날은 갑옷 틈으로 들어가는 듯했으나 오러끼리 상쇄가 되면서 쇳소리와 함께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할… 무기뿐만 아니라 갑주까지 무슨… 커억!”
벤트 경이 당황하는 틈을 타서 하이디가 주먹으로 그의 턱주가리를 그대로 올려쳐서 뒤로 넘기고는 벌떡 일어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큰 키와 신체 조건이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그대로 창을 휘두르면서 벤트 경에게 찔러 들어갔다.
“받은 대로 되갚은 겁니다!”
“큭! 되갚긴! 여긴 전장이야! 기사든 뭐든 일단 살고 봐야 한다고! 오히려 감사를 들어야겠는데? 차앗!”
채앵!
찔러 들어오는 창을 쳐 내면서 둘은 땅에서 다시 격전을 벌였다.
하이디는 벤트 경의 끈질김에 놀라움을 넘어서 감탄할 지경이었다.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끝에 기다리는 건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끈질기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대단해 보인 것이었다.
하나 그것도 이윽고 한계가 찾아오게 된다.
“커억!”
“…어라?”
한데, 그 회심의 일격은 거창한 황실 기사단의 무예가 아니라 하이디가 눈속임으로 찔러 넣은 허무한 찌르기였다.
어떻게 그런 것에 당했냐 하면 벤트 경의 몸을 둘러싼 푸른 오러가 아주 희미해졌고, 더 이상 싸울 체력과 기력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하이디의 몸을 둘러싼 황금빛 오러는 여전히 찬란했다.
결국 승패를 가른 것은 마나 호흡법의 차이였던 것이다.
“젠장할… 10년만 더 젊었어도… 쿨럭! 쿨럭!”
“…정말 대단한 무용이셨습니다.”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쿨럭! 하아… 아무튼… 이걸로 난… 명예와 의무를 다했…….”
털썩.
끝내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벤트 경은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하이디는 노련한 중급 기사에게서 드디어 승리했지만 실력으로가 아닌 부전승으로 이긴 것 같은 찝찝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승리는 승리이며, 명성 높은 로이엔 남작가의 중급 기사 벤트 경을 쓰러뜨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알테리오!”
삐이이이잇?
뭘 하나 했더니 벤트 경의 말을 잡아먹고 있던 알테리오는 하이디의 부름에 냉큼 달려와서 그녀를 태우고, 하이디는 벤트 경의 시신도 같이 실어서 우선 본진으로 향했다.
명망 있는 기사의 시신을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점과 엄연히 자신의 전과이기도 했고, 그의 죽음을 알리면 이 전쟁의 끝이 더 빨리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이엔 남작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보며 안색이 파래진 채로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델마인 남작의 기사와 병사들의 배신부터 모든 게 무너졌고, 영지의 정예 병사들은 모두 초죽음이 되는가 하면 적들의 후방으로 달려간 기사들과 기병대들은 항복하기 시작해서 전쟁의 패색이 매우 확실해진 것이었다.
“아, 안 돼. 이러면… 이러면 우리 가문은…….”
“아버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왜 우리가 패배하는 겁니까? 왜?”
“그, 그게! 그게 다 델마인 남작이 배신한 것 때문에… 대체 왜? 왜 그분이 배신을 한 거지? 아니, 아니, 아무튼!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다. 일단 여기서 도망을 쳐야…….”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는 이대로 가문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빼앗길 순 없다고 생각하고는 남은 병사와 기사들을 이끌고 천막을 빠져나가 도망치려고 하지만, 이미 그들의 후방엔 말데로브 경을 비롯한 캘러메인 백작가의 군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전쟁의 성패가 갈린 시점에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배치한 것이리라.
“어딜 가십니까? 로이엔 남작님.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망치시겠다는 건 곧 패배를 의미합니다만, 그러면 패자의 대가를 치르셔야지요.”
“자, 잠깐, 말데로브 경! 이건 아닐세! 이 전쟁은 처음부터 사기였던 거야! 무효라고! 델마인 남작이 멋대로 배신을……!”
“델마인 남작이 왜 이 전쟁에서 나옵니까? 엄연히 가문 대 가문의 전쟁인데 말이죠. 설마? 로이엔 남작님, 군대 안에…….”
감정에 휩쓸려서 절대 비밀로 해야 할 말을 꺼낸 그는 순간 움찔하며 말데로브 경의 눈빛을 살폈다.
이 가문과 가문의 전쟁은 엄연히 캘러메인 백작의 중재하에 치러지는 것인데, 그 안에 부정한 행위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의 명예에도 큰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델마인 남작가의 명예도 손상을 입히기에 이다음 곧바로 델마인 남작가와 전쟁이 이어질까 그는 얼른 부정했다.
“헉! 아, 아닐세. 아니야. 내가 말을 잘못한 거지. 아무튼 요, 용병들이 갑자기 배신을 하는 바람에…….”
“그것도 엄연히 전쟁의 일부입니다. 애초부터 800 대 1,200의 전쟁을 받아 준 상대가 그럼 아무 생각 없이 전쟁을 하자고 했겠습니까?”
“아무튼 이건! 이건 무효야! 무효! 나, 나는 돌아가겠네. 그러니 제발 길을 열어 주게!”
“안 됩니다, 로이엔 남작님. 그럼 패배하신 걸로 하고 신병을 구속하겠습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길을 여세요! 말데로브 경!”
그렇게 로이엔 남작과 그 부하들을 제압하려 하자, 이번엔 메이라 부인이 나서서 말데로브 경에게 길을 비키라고 엄포를 놓았다.
비록 로이엔 남작가 사람이었지만 캘러메인 가문의 안주인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자신이 명령하면 그들이 들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안 됩니다. 이 사안은 엄연히 저희 캘러메인 가문의 명예와 권위가 달린 일입니다. 그러니 절대 비켜 드릴 수 없습니다. 빠져나가려고 하신다면 마님이라고 할지라도 저희의 검을 상대해야 할 겁니다.”
“말데로브 경!”
“아니면 어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시고 대가를 치르십시오. 남작님, 메이라 부인, 당신들이 무책임하게 도망치려는 이 추악한 순간에도 병사와 백성들이 무의미하게 죽고 있습니다. 귀족으로서, 영주로서의 책임과 긍지가 있다면 어서!”
“크으으… 으으으윽! 그래. 내가… 졌다.”
결국 로이엔 남작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사실상 강요된 패배 선언을 하게 되었다.
확실히 패배 선언을 들은 말데로브 경은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급히 병사들을 투입했고, 그리고 이곳에 있는 로이엔 가문의 사람들과 메이라 부인까지 모두 합쳐서 밧줄로 구속했다.
그렇게 정오에 시작한 전쟁이 끝난 것은 저녁노을이 서서히 지기 시작할 즈음, 시간으로 보면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정도면 사실 전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분쟁이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승리는 승리. 로이엔 남작가의 항복과 동시에 젤커드 자작가의 병사와 기사들의 승리의 함성이 평야와 성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