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보병들끼리의 난전이 시작되자, 궁수들도 후방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아군의 사격을 막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쏘는 것은 적 궁병이나 혹은 보병 후방 진영 위주. 궁수의 숫자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양측은 서로 소모전을 벌이는 가운데 드디어 전쟁의 꽃들이 등장했다.
“로이엔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와아아아아!”
본격적으로 가속하는 양측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보병들의 난전이 진형 유지를 위한 방패라면 기사들이야말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창. 특히 오러를 사용하는 기병대 전열에 뭉친 기사들의 살상력은 이 시대 최고의 무기였고, 경우에 따라서 그들은 말에서 내려 보병의 진영을 지원해 줄 수도 있었다.
“적들이 온다! 우리도 간다! 젤커드 자작님에게 승리를 바친다!”
“와아아아아!”
그리고 마찬가지로 젤커드 자작 측의 기병들도 전진하기 시작. 하나 기사 숫자에서 밀린다는 걸 눈치챈 건지 젤커드 자작 측의 기병은 기병끼리의 돌격전을 피하고 상대 보병 쪽으로 향했다.
‘그런 속셈인가?’
그것을 본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 벤트 경은 어차피 똑같이 일반 병사들부터 잡는다면 숫자가 많은 자신들이 유리하며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들이 용병들과 함께 양 측면을 지키는 만큼 대처는 쉬울 것이었기에 먹잇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좋아, 이대로 적 궁수들부터 분쇄한 다음 보병의 후방을…….”
삐이이이에에에에엑!
궁수들의 진영이 본격적으로 보이려던 찰나, 조류의 높은 울음소리가 전장의 공기를 찢으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폰의 울음소리. 천적이 나타난 것에 말들은 질주하던 속도를 줄이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지만, 사전에 정보를 가지고 있던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태연하게 말들을 진정시키면서 속도를 다시 올리고자 했다.
‘이런 것쯤이야. 마법이 난무한 전쟁터에서 훈련한 우리 말들이 겁먹을 리 없지.’
‘저번에 당한 거야 어두운 밤인 데다 생각지도 못해서 그런 거지. 충분히 대비하고 훈련도 했으니 어림도 없다!’
“나타났습니다! 그리폰! 알테리오입니다! 측면으로 옵니다! 그리고 저걸 탄 자는… 젤커드 자작의 딸! 하이디입니다!”
말들을 진정시키면서 질주하는 사이, 측면의 수풀 속에서 갑자기 하이디와 알테리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 갑주로 완전 무장을 한 그리폰의 모습에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가장 전열에 있는 벤트 경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갑주의 무게로 인해 은근히 속도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는 계속 질주해서 떨어뜨리자는 판단을 내렸다.
“흥! 어차피 날개가 한쪽밖에 없어서 날지 못하는 그리폰 따위 아무리 달려 봐야 우리보다 느리다! 그러니 질주로 놈들을 떨어뜨린…….”
“날아라! 알테리오!”
“나, 날았다고?”
벤트 경은 경악한 표정으로 정말로 하늘 높이 떠오른 알테리오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높게 뛰어오른 것뿐이었지만, 그 높이가 상당했기에 기사들의 눈에는 하늘을 날아오른 것으로 보였다.
‘음, 질주 속도는 밀리지만 대신 튼튼한 몸과 근육량, 체구에 비해 가벼워. 괜히 하늘을 나는 게 아니지. 그리고 맹수의 특성을 가진 육체라서 탄력도 좋군. 조커 카드가 한 장 늘었어.’
‘역시 베오날드 님!’
단점을 해소하는 것만이 아닌 장점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 덕분에 알테리오는 뛰어난 점프력으로 로이엔 남작 기병대의 후방 3분의 2 지점을 덮칠 수 있었다.
말 하나를 쓰러뜨리고 곧바로 창으로 찔러 기수의 목숨을 끊은 하이디는 이 회심의 찬스를 살리기 위해 오러를 끌어 올려 기병대 전방을 향해 베오날드에게 배운 창법을 시전했다.
“황실 기사단의 무(武), 일식(一式)–사자분신(獅子分身) ‘Lion Clone’.”
황금빛 오러의 바람이 마치 사자의 포효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사방으로 기세를 뿜어내어 말과 기사들을 밀어내 버렸다.
그 기세는 앞서가던 기사들도 놀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고, 일반 기병은 물론 가까이 있는 하급 기사들도 오러를 끌어 올려 막으려 했지만 여지없이 밀려나 버렸다.
“무, 무슨 저런 괴물이…….”
“궁병대! 지금이다! 이쪽을 향해 쏴라! 나는 기사들을 맡겠다!”
“젠장할, 이 무슨!”
포효처럼 울리는 하이디의 외침에 기사들의 돌진에 쫓기던 궁병대는 즉시 시위에 화살을 걸고 사격을 시작, 그리고 하이디는 땅에 쓰러진 이들 중 기사들에게 창을 꽂아서 즉사시키면서 계속 후열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벤트 경은 명예를 되찾을 찬스가 왔다고 생각하며 기사들을 이끄는 대장에게 외쳤다.
“루튼 경! 제가 저년을 막겠습니다. 제 명예를 되찾을 기회를 주십시오. 하급 기사들로는 저 괴물을 막는 건 무리입니다.”
“음… 알겠네. 자네에게 맡기지. 하나 반드시 이기게!”
“예!”
허가를 얻은 벤트 경은 즉시 기수를 돌려 창을 치켜든 채 하이디를 향해 질주했다.
기사들을 처리하며 전진하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벤트 경을 발견하고는 마찬가지로 창을 고쳐 잡은 채 알테리오와 함께 돌진했다.
기사들의 마상 전투. 이제 다 자라서 말에 맞먹는 체고(體高)를 지닌 알테리오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말을 노려보면서 포효와 함께 질주했다.
삐이이이이잇!
“와라! 이 괴물아!”
“하아아아아앗!”
정오쯤임에도 황금빛 오러와 푸른빛 오러가 깃든 무기가 격돌하며 생긴 불꽃이 번쩍이면서 전장을 비추었다.
괴물 같은 힘을 가진 하이디였지만, 벤트 경은 노련한 기량과 경험으로 그녀의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말을 노리는 알테리오를 기마술로 능숙하게 피했다.
“큭!”
‘역시! 그 괴물 같은 꼬맹이면 몰라도 이 계집은 상대할 만하다! 게다가 지금 그놈은 이 근처에 없으니! 반드시 죽인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엔 그 호랑이가 없기에 벤트 경은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하이디를 없애기 위해 자신 있게 창을 휘둘렀다.
그리고 하이디 또한 무기를 휘두르는 감각과 오러의 느낌으로 저번에 쓰러뜨리지 못한 적임을 눈치챘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명예를 위해 벤트 경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결의했다.
‘이번에야말로 내 손으로 이긴다!’
푸른빛 오러와 황금빛 오러가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전투는 갈수록 격해졌다.
시간상으로는 약 한 시간가량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사상자가 양측 합쳐서 수백. 용병들도 슬슬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전투 상황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예상 이상으로 잘 버티는 젤커드 자작 군대의 모습에 메이라 부인은 답답하다는 듯 옆에 있는 제드 경에게 물었다.
“어째서 전투 상황이 대등한 거죠? 1.5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 대체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제드 경! 설명해 보세요.”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님. 지금 저희 병력은 보다시피 예비대를 구성해서 체력을 온존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 상대는 전 병력이 전투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보시면 저기 예비로 놔둔 용병대들이 기사들로부터 궁병대를 지키기 위해서 뛰고 있죠. 하지만 반면 저희는 양 날개 쪽에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와 병력들이 온존해 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무리 적이 날고 긴다고 해도 결국 전쟁은 전쟁입니다. 이 평야에서의 전면전은 정직합니다.”
“그렇지만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들과 병력들이 아직 안 움직이는데? 저기 궁병들이 쫓기고 있지 않나요?”
“음……?”
메이라 부인의 말대로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이 후방으로 파고들어서 전투를 격렬히 벌이는 것처럼 젤커드 자작가의 기병들도 후방으로 파고들어 궁병들을 신나게 유린하고 있었다.
본래 이런 상황이 되면 양 측면에 대기시켜 둔 델마인 남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여서 완전히 제압하고, 모자랄 경우 본대의 예비대까지 투입할 예정이었다.
“…뭐지? 알룬 경은 왜 안 움직이지? 이 정도 판단도 안 될 사람이 아닐 텐데?”
델마인 남작가 최고의 기사인 알룬 경의 전략적 식견이라면 지금 움직이지 않는 건 말이 안 되는 일. 제드 경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쪽 진영을 바라보는데, 알룬 경은 돌입 타이밍을 재려는 듯 전군을 진군시키고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궁병들을 희생시키고 적진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리해서 얻는 이득은 별로 크지 않았다.
“마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상황이 이상합니다.”
“제드 경?”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제드 경은 빠르게 본대로 뛰어갔다.
그리고 다시 보병들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전장 중앙. 젤커드 자작군은 매우 잘 싸우고 있었지만 역시 힘든 건 마찬가지였고, 기본적으로 병력 숫자가 더 적었기에 보병들은 싸우는 게 너무 힘들었다.
“베오날드 님, 한 번 물러나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이디의 기습으로 낙마한 기사와 보병 쪽을 지원하기 위해서 예비대로 있던 상대편 기사까지 투입해 들어오자, 이젠 총지휘관인 젤커드 자작까지 직접 전장에 들어와서 베오날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검과 방패를 휘두르며 적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개전부터 싸우기 시작한 베오날드를 걱정하며 일단 한 번 물러나라고 권고했지만, 베오날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랏빛 오러를 일으킨 채로 적 기사의 목을 베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후우~ 저 때문에 시작한 전쟁입니다. 그러니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싸워야지 않겠습니까? 하앗!”
“체력 분배도 전쟁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베오날드 님.”
“아직 여유 있습니다.”
“하긴… 승리의 빛이 서서히 보이니 없던 힘도 솟아나시겠지요. 흠!”
콰득!
젤커드 자작의 말대로 적 기병대는 이미 하이디에 의해 와해되었고, 적 기사들은 아직 남았지만 머릿수가 부족해서 파괴력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궁병들과 용병들은 살육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흩어지고 도망치면서 버텨 주었기에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가 느린 것이었다.
사실상 적군의 기사와 기병대의 창이 부러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적 진영에 들어간 우리 기사들은 지금 열심히 활약하고 있다.’
젤커드 자작의 기병들은 열심히 궁병들을 유린하고, 짓밟고 난 다음 도우러 온 델마인 남작의 본대까지 깨부수며 압도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 기사와 기병대의 차이. 이미 이 전쟁의 승패는 자신들에게 기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들에게 아직 용병과 기병들이 남아 있어서 조금 힘들 수 있지만, 그래도 주력인 보병들과 기사들을 잃은 시점에서 로이엔 남작은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군. 왜 우리 기병들과 기사들이 궁병대를 유린하는데 용병들이 가만히 있지?’
제드 경이 품었던 의문을 젤커드 자작도 똑같이 느꼈다.
적 예비대가 왜 투입 안 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다.
이 작은 평야라면 언제든 보병진 아니면 자신들의 기병에게서 궁병대를 지키든지 해야 했을 텐데, 마치 방치한 것처럼 지켜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의아해하면서도 적 병사의 목을 치는 그였는데, 옆에 있던 베오날드가 멀리서 무언가를 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