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며칠 뒤, 로이엔 남작가.
백작의 승인을 받았다곤 해도 젤커드 자작가의 영지 내에 있는 그들을 잡기 위해선 자작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하므로 로이엔 남작은 일단 곱게 그들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돌아온 건 내어 줄 수 없다는 메시지였다.
“뭐라고? 그 잡종 꼬맹이를 내줄 수 없다고? 제정신인가, 젤커드 자작은?”
“그야 딸도 같이 달라고 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겠죠, 남작님. 더구나 딸도 기사급으로 성장한 상태이니, 저 같아도 안 줍니다.”
“닥치게, 벤트 경. 지고 돌아온 주제에 말이 많군.”
“…예, 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전 남작님의 기사입니다. 실패의 오명을 씻는 건 둘째 치고, 섬기는 가문이 망하는 걸 어떻게 지켜봅니까? 그쪽 따님이 중급 기사인 저랑 맞먹고, 베오날드 도련님의 강함은 분명히 절 능가합니다. 그걸 알아주십시오.”
남작의 무례한 태도에도 익숙하다는 듯 받아치는 벤트 경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무례하다고 해도 이미 하급 기사 둘을 잃은 마당이니 중급 기사인 자신의 대우가 깎일 일도 없었다.
아무튼 젤커드 자작의 거부 전갈에 로이엔 남작은 자신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긁으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해 분을 터뜨렸다.
“끄으으으응! 이를 어쩌면 좋지? 그러면 젤커드 자작의 영지를 쳐들어가서 내놓으라고 하는 수밖에 없는데…….”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 젤커드 자작의 전력에 중급 기사급 둘이 더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아니면 다른 자들이랑 손잡아야겠죠. 가령 델마인 남작님이라든가?”
“으음, 그래야겠지. 기사들의 질로 안 되면 머릿수라도 많아야 하니 말이야. 용병들을 더 고용하려 해도… 결국 돈이 문제이니. 끄으응~ 일단… 아니, 내가 직접 남작님을 만나러 가야겠다. 즉시 말을 준비해라!”
도움을 받기 위해 직접 델마인 남작을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한 로이엔 남작은 즉시 그의 영지로 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군사 준비를 하고 용병을 고용하는 등등… 칼을 뽑은 이상 반드시 이겨야 하기에 상대보다 더 많은 군세와 기사를 준비하려면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남작님. 그렇게 되면 저쪽 젤커드 자작도 분명 주변 파벌에 있는 기사들과 군사를 끌어모으게 될 겁니다. 자칫하다간 내전 규모로 번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려해 보심이?”
나서려던 찰나, 다른 기사가 벌떡 일어나서 로이엔 남작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젤커드 자작이 일반 귀족이라면 모를까, 나름 캘러메인 백작 아래에서 델마인 남작과는 쌍두마차로서 백작 가문의 안건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 말을 들은 로이엔 남작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으음, 그대의 말도 틀린 건 아니군. 하긴 가문 간의 싸움은 가문 간의 싸움으로만 끝내야지. 하나 그러면 변수가 너무 많아지는데?”
“델마인 남작님의 기사들을 용병으로 위장시켜서 도와 달라고 하는 방법도 있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문과 가문 간의 정정당당한 전쟁으로 한정하자는 것입니다. 백작님에게 그것의 감시와 억제를 해 달라고 하고 말이죠. 상대는 자신들의 전력이 우세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지요.”
‘정정당당’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무색할 일이었지만, 아무튼 기사의 전략은 합당했다.
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건 캘러메인 백작가도 마찬가지였기에 가문 대 가문의 전쟁으로 한정시켜 달라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다음에 군사들 사이에 델마인 남작의 기사와 정예병들을 용병으로 위장시켜서 몰래 편성한다면 완벽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흐음, 나쁘지 않아. 하지만 문제는 델마인 남작님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용병 행세를 시켜야 한다는 점인데…….”
“어떻게 보면 정적을 처리할 찬스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쟁’의 방식으로 하면 들킬 염려가 훨씬 적지요. 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면 이 방법뿐입니다. 결투로 정하려고 해도 상대 기사 쪽 전력이 우세할 거고, 이미 군사들과 용병들을 모았는데… 돈이 또… 아깝지요.”
“그렇지. 그래, 돈값만큼 일은 시켜야 하니 말이야. 어쨌든 델마인 남작님에겐 가야 한다는 거군. 곧바로 출발하겠네. 나 없는 동안 영지 상황을 지켜봐 주게.”
“예, 남작님.”
로이엔 남작은 곧바로 말을 타고서 기사들과 함께 델마인 남작의 영지로 향했다.
믿을 구석을 만들어 두고 가문 간의 정정당당한 전쟁을 포장해서 승리하는 것. 겉으론 화려하게 포장하지만 비열한 귀족 사회에 딱 어울리는 계략이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달린 로이엔 남작은 곧바로 델마인 남작가의 응접실에서 여전히 노예들을 의자로 사용하는 델마인 남작을 만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델마인 남작님.”
“하하, 무슨 소리인가? 우리 사이에……. 로이엔 남작이야말로 오히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지 않았나?”
“중요한 부탁이 하나 있어서 말입니다.”
“음, 그렇겠지.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델마인 남작이 운을 띄우자, 로이엔 남작은 속사포처럼 빠르게 사정을 설명해 나갔다.
자신의 딸인 메이라 부인이 베오날드에게 모욕을 당했고, 외손자인 랄트가 그에 의해 방구석에 처박히는 건 물론 자신의 기사까지 죽였기에 그를 없애야 하는데, 젤커드 자작이 그를 보호하고 있어서 손을 대지 못한다는 정보를 쏜살같이 전한 것이다.
“그래서? 젤커드 자작에게 전갈은 보냈나?”
“물론입니다. 진작 보냈지요. 한데 거절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놈의 딸년이 베오날드에게 붙어 있고, 또… 받아들일 거라면 진작 저희에게 놈들을 건네줬을 테니까요. 아무튼 어떻습니까? 델마인 남작님의 기사들과 병사 일부를 빌려 주십시오. 물론 대가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흐음…….”
“젤커드 자작에게 한 방 먹이는 건 물론 그의 기사들을 다수 처리할 수 있다면 분명 손해는 아니지 않습니까? 또 혹시나 젤커드 자작을 쓰러뜨리거나 포로로 잡으면 그의 땅이 손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 지긋지긋한 근본도 없는 놈이 칼에 망하는 걸 봐야지 않겠습니까?”
가문 간 전쟁의 메리트와 대가에 대해 열심히 늘어놓으면서 힘을 빌리려는 로이엔 남작이었다.
설득력은 충분히 있는 이야기였고, 반대파인 젤커드 자작의 세력을 깎을 정당한 명분이 있는 찬스인 만큼 델마인 남작은 잠시 생각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알았네. 듣고 보니 역시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 순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곧바로 그 일을 맡아 줄 병사 200명과 기사 10명을 빌려 주겠네. 자네는 위장 계약서를 준비하게나.”
“감사합니다! 델마인 남작님!”
“뭘, 감사할 것까지야. 이런 일이 있을 때 협력하기 위해서 손을 잡은 게 파벌 아닌가. 하나,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걸 잊지 말게.”
“예! 전쟁 날짜가 정해지는 대로 곧바로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전 준비하러 가 보겠습니다.”
“허허허, 그러게. 하긴 전쟁 준비가 손쉬운 게 아니니 말이지.”
델마인 남작은 미소를 지으면서 로이엔 남작의 제안을 승낙했고, 로이엔 남작은 매우 기뻐하면서 예를 갖춘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질적으로 모자라면 기사의 숫자, 그리고 병력으로 압도하면 된다. 그리고 전략과 전술에 따라서 꼭 베오날드 놈을 직접 잡는 게 아니라 젤커드 자작을 노리는 것 등등… 실전은 상상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그는 돌아가면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의지를 한 번 더 다졌다.
***
며칠 뒤, 젤커드 자작 영지.
전쟁의 기운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베오날드는 거점에서 열심히 금속 제련에 힘쓰고 있었다.
귀족 간의 전쟁은 금방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일에 열중했다.
‘전쟁 한 번에 밑작업이 엄청 들어가거든… 특히 가문과 가문의 패싸움 같은 전쟁이라면 더욱 그렇지.’
그래서 웬만한 일의 무력 분쟁은 결투로 큰 피해 없이 깔끔하게 해결하는 게 보통이지만, 지금 같은 경우 벤트 경이라는 기사를 제압해서 보내 놓았기 때문에 승산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면전을 하면 내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캘러메인 백작가의 허락 아래에서 가문끼리만의 전쟁을 하는 방향으로 흐름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귀족 가문 간의 싸움은 마치 육식 동물의 싸움처럼 아주 치열한 눈치 싸움과 기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일단 이길 전략을 세우는 것도 문제였지만 ‘어떻게 이길 것이냐?’를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골치 아픈 문제라 꽤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정말 도련님의 예측은 무엇 하나 빗나가는 게 없군요.”
“빗나갈 게 아니니까 빗나가지 않는 거지. 아무튼… 읏챠, 이제야 제대로 된 게 나왔군.”
베오날드는 자신의 눈앞에 빛을 반사하며 영롱하게 빛나는 철괴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설비가 저열한 데다, 직접 제련에 참여하는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기도 했고, 철광석과 각종 재료의 질의 차이와 불순물들의 첨가 유무 등등… 각종 변수를 수정하는 것 때문에 시간이 꽤 걸렸지만 드디어 완성한 것이었다.
‘베노피스 강(鋼) A타입. …질은 좀 떨어지지만, 이만하면 충분해.’
“음… 겉보기에는 다른 철 주괴랑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만.”
“그야 근본은 결국 강철이니까. 자, 받아 봐라, 하이디. 그리고 이것도~ 이건 젤커드 영지에서 사 온 철 주괴다.”
베오날드는 의문을 제기하는 하이디에게 베노피스 강(鋼)의 주괴와 일반 철 주괴를 동시에 던져 주었다.
그것을 받은 그녀는 눈이 커졌는데, 같은 크기임에도 베오날드가 만든 것이 더 가벼웠기 때문이다.
“예. 어? 이건 대체……. 크기는 완전히 같은데?”
“불순물이 더 빠져서 그런 거다. 거기에 추가로 연금술적 의미로 조치를 취했고, 그걸로 갑주를 만들면~ 아마 강철로 된 갑옷 중에선 걸작이 나오겠지. 아무튼 제조법과 비율을 확정했으니 이제 그걸로 주괴를 더 만들어야겠군. 네 갑옷을 만들기에 충분한 양이 되면 넌 곧바로 대장간으로 가서 그걸로 갑옷 제작을 의뢰해라.”
“예? 예? 베오날드 님의 것이 아니라?”
“하이디, 네가 나의 검이자 창인데… 당연히 너부터 가장 좋은 갑주로 무장해야지 않겠느냐? 갑옷을 만들기에 적당한 양이 충족되면 바로 내려가서 네 갑주부터 만들어라. 그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랑 갑옷을 보니 썩 나쁘지 않더구나.”
“하나 곧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데, 시간이 맞을지는…….”
“충분한 돈과 철 주괴의 출처를 빌미로 삼아라. 결국 대장장이도 기술자다. 좋은 재료를 보면 출처를 묻고 싶어 하는 게 정상일 거다.”
어떤 한 분야의 전문가라면 그것과 연관되는 좋은 것을 봤을 때 자연히 눈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같은 것이었다. 베오날드 자신 또한 연금술을 할 때 더 좋은 약초, 마석, 매개물 같은 걸 보면 어떻게든 사들이려고 발악하거나 여차할 경우 전쟁까지 일으킨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 맞다. 그 대장장이도 이걸 사용하는 방법을 연습하려면 좀 더 만들어야겠군. 장인이라고 해도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으니 말이야. 흐음~ 그럼 생산량을 더 넉넉히 잡아야겠군. 음, 무기용 철 주괴는 그럼 포기해야 하나?”
“무기용… 철 주괴도… 따로 만든단 말씀이십니까?”
“이상할 게 어디 있느냐? 검과 갑주의 제조법도 발전하는데, 재료의 제조법과 개량도 발전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더냐? 그게 연금술사로서의 내… 크, 크흠! 아무튼 그렇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가면서 연금술사라는 걸 밝힐 뻔한 것을 간신히 멈춘 베오날드였다.
귀족의 일에는 평소 스스로를 제어하곤 하는데, 유독 연금술사에 관련된 문제만 되면 전문가 모드로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나도 알고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없었으면 애초에 나는 노이멀 가문의 후계자도 되지 못했을 테니까.’
시작은 벨릭스 폰 노이멀의 자식들 간의 잔인한 사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것이지만, 결국 죽음의 경쟁에서 자신을 살려 주고, 대귀족으로서의 미래를 열어 준 지혜와 기술이 바로 연금술이었다.
가문의 감옥에 유폐된 수수께끼의 연금술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미래는 찾아오지 못했을 테니, 베오날드에게 있어 연금술은 정말 각별한 것이었다.
“저기, 도련님… 부탁이 있는데… 조금 쉬었다가 하면 안 될까요? 제가 무슨 마력 제어 기구도 아니고… 헤엑…….”
“…지금까지 쉬지 않았는가? 그리고 아까 들었다시피 우린 지금 시간에 쫓기고 있네. 그러니 자, 계속해서 지맥의 컨트롤 부탁하네.”
히이이이잉!
그리고 지금 생에도 이렇게 잘 써먹고 있지 않은가? 베오날드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지맥의 마력과 새로운 용광로의 온도를 조절하느라 지친 셀리나를 채근하며 계속해서 작업을 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