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얼마 뒤, 젤커드 자작 영지.
베오날드는 곧장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가기보다는 주변 상황이나 소문을 들으면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 며칠 시간의 여유를 두고서 일부러 주변 마을을 돌아서 천천히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향했다.
그리고 젤커드 자작의 딸인 하이디가 함께한 덕분에 베오날드 일행은 딱히 그리폰 알테리오에 대한 경계나 제재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리 소식을 들은 건지 저택에 가자마자 젤커드 자작이 베오날드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알테리오는 하이디와 세인에게 맡기고, 베오날드는 우선 자작의 응접실로 가면서 계속해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반갑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작님. 하나 전 이젠 도련님이 아닙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그냥 베오날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하하,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혈통이 다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러는 편이 제가 더 편합니다, 베오날드 님.”
“그럼 그렇게 하지요. 그나저나 대충 사정은 아실 것 같은데…….”
“예. 대강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캘러메인 백작가와 로이엔 남작가에 아주 큰일을 벌이셨더군요.”
끄덕.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의 말을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 계속 들었다.
젤커드 자작은 현재 로이엔 남작가에서 베오날드를 잡아 죽이기 위해 이를 갈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가문의 소중한 인재인 기사를 둘이나 죽인 데다 그들이 가진 로이엔 남작가의 재산은 물론 메이라 부인이 가진 재산도 거의 갈취하다시피 기사들의 몸값으로 가져갔기에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혹시 군사 행동의 기미는?”
“이미 보이고 있습니다. 로이엔 남작 영지에 상주하는 병력 5백 전원 소집. 치안은 촌장들과 영지의 각 영역에 있는 민병대 수비 체제로 전환, 용병들까지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이 근방 영지를 나가기 전에 잡아 죽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요.”
“예상대로군요. 혹시 자작님에겐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제가 하이디를 맡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올 가능성을 생각했을 텐데…….”
“물론 왔습니다. 베오날드 님과 일행이 오면 반드시 잡아서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그러면 딸은 봐주겠다고, 만약 편을 들 시엔 자신의 가문의 적이 되는 걸 각오하라고 하면서…….”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군요. 그래서? 자작님은 절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잡아서 로이엔 남작에게 바칠 겁니까?”
“하하핫, 그럴 거라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지요. 왜냐면 베오날드 님은 이미 이런 사태를 모두 대비해 둔 게 아닙니까?”
젤커드 자작의 예상에 베오날드는 기분이 좋은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사실 대비했다고 하는 건 말이 이상하지만, 아무튼 젤커드 자작의 말대로 지금 이 상황이 온 것에 대해서 베오날드는 유기적으로 곧바로 대응할 수 있게 준비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대비라……. 그건 과찬입니다. 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우선은… 델마인 남작님에게 편지 한 통 쓸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그리고 저는 당연히 베오날드 님의 편에 설 겁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 주십시오.”
‘뭐랄까? 너무 눈치가 좋고 배려가 좋아서 뭐라 할 말이 없군. 막 우려라든가, 책임이라든가, 아니면 위험하니 나가 주셔야 할 것 같다든가? 반박이 올 것 같았는데 말이지.’
‘역사는 결국 소수의 천재의 손에 굴러간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분명! 그 역사를 주무르게 될 큰 손. 투자할 가치는 있다.’
지금만 해도 어떤가? 보통 귀족이라면 집안에서 쫓겨나고 남작가에서 군대까지 동원해서 쫓아다닌다고 하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당장이라도 헐레벌떡 도망치려고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 베오날드라는 자는 어떤가? 압박이나 불안은커녕 태연히 자신이 준 용지에 편지를 써 나가고 있었다.
‘도저히 갓 성인이 된 아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저 기품. 수도의 황자님들이나 수많은 천재 귀족들을 보는 것 같아. 그러니 이건 얌전히 따라가기만 하면 무조건 큰 이익이 생길 싸움이다. 하이디만 봐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몰라보게 성장하지 않았던가?’
베오날드를 신뢰하는 근거에 추가된 것은 바로 하이디의 변화였다.
젤커드 자작은 자신의 딸인 하이디를 보았을 때 정말 크게 놀랄 뻔했다. 예전엔 그저 여자답지 않은 허우대만 가진 채 어설픈 느낌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막강한 오러의 느낌부터 시작해서 강하게 자리 잡은 예기(銳氣). 베오날드가 그렇게 성장시킨 게 틀림없었다.
그런 만큼 젤커드 자작은 이전 테알 슬럼가의 일과 마찬가지로 얌전히 베오날드를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좋아, 편지는 이 정도면 되겠군요. 곧바로 델마인 남작에게 보내 주시죠. 그리고 이제부터 할 일이 아주 많을 겁니다.”
“그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베오날드 님.”
“그럼 대응할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줄 테니 곧바로 진행합시다. 시간은 금이니 말이죠.”
젤커드 자작이 자신에게 뭘 바라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선 잘 따라 주니 더 이상 뭐라 할 게 없는 만큼 베오날드는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달라고 함과 동시에 일행에게 돌아가 그들이 할 일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세인, 예전부터 그랬지만 앞으로도 계속 내 메이드이자 동반자이다. 너는 알테리오를 돌보는 건 물론 이 저택의 상황과 영지에 도는 이야기들을 수집하며 네 재량껏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하고 보충해 놔라. 자금은 넉넉히 주마.”
“예, 베오날드 님.”
“하이디는 외출할 때의 세인을 지켜 줘라. 그리고 틈틈이 단련과 수련을 잊지 말도록. 젤커드 자작님에게 개인실을 개방해 달라고 이야기하면 될 거다. 정 안 되면 내 방에서 저 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수련을 해도 좋다. 그땐 세인이 지켜 줘라.”
“예!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셀리나, 너는 날 따라오도록. 지금 바로 외출한다.”
“어머~ 불러 주셔서 너무나 황송하옵니다. 후훗.”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린 뒤, 베오날드는 돈을 일정량 챙겨 나와서 말 한 필을 구매한 다음 셀리나와 함께 영지 밖으로 나갔다.
그다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셀리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이전에 기사들을 구속해 둔 거점에 갔을 때, 뭔가 느낀 게 있었나?”
“아~ 그 왠지 모르게 마력의 농도가 짙던 곳 말인가요?”
“역시 느끼고 있었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고, 마정석으로 대신할 수 있으니까요. 또 그 지맥은 마력이 사라지면 결국 없어지잖아요. 게다가 역시… 마법사라면 마력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지식이 우선이 되기도 하고요.”
‘500년 전이랑 어떻게 저리 똑같은 말을 할꼬…….’
500년 전에도 베오날드는 연금술사로서 마탑에 속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지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마법사들은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마력의 양과 질 부분은 결국 더 큰 자본이나 권력만 있으면 쉽게 해결되는 것이라고 여겼고, 지맥의 마력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곳에 대해서 신경 써 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무가에서는 이걸 알아도 마나 호흡법의 성능이 문제라서 지맥에서 수련을 한들 효율 차이를 그리 못 느끼지.’
베오날드나 하이디가 사용하는 마나 호흡법은 무려 이 대륙을 통일했던 제국 황실과 황실 기사단의 것이었다.
그런 걸 사용해야 지맥과 일반적인 환경에서 마나 호흡법의 효율을 체감하는 거지, 일반적인 마나 호흡법 가지곤 효율이 좋지 않아서 체감하기도 힘들었다.
‘에라솔에겐 그 말을 안 했지만, 어차피 상급 기사 가문의 마나 호흡법이면 어느 정도 효율이 나올 테니까…….’
“그래서 결국 요점이 뭔가요?”
“그 지맥을 찾아다오. 내가 찾으려니 연금술 지식으로 찾아야 해서 말이지. 혹시 몰라서 오러로 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더군.”
“그야 오러의 본질은 결국 순수한 마나를 육체로 쌓고 제어해서 사용하는 거니까요. 그걸로 찾으려는 게 이상한 거죠. 마법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마법사가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아무튼 찾을 수 있나?”
“흐흥! 걱정 마시라. 당연히 찾을 수 있죠.”
콧대를 높이면서 자신의 유능함을 자랑하는 셀리나. 베오날드는 뭔가 아니꼬웠지만 일단 참아야 했다.
지금은 지맥을 찾는 일이 최우선이었으니 말이다.
로이엔 남작가와 메이라 부인이 자신의 행적을 알고 전쟁을 걸어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 그럼 빨리 해라.”
“예. 그럼 솜씨를 기대해 주세요. 아, 혹시 위험한 지역이라도 상관없을까요?”
“가까운 곳이면 어디든 좋다.”
“예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다음 연금술 수업을 빨리 재개 좀 해 주세요~”
애교를 부리면서 말에서 내린 셀리나는 품에서 마법 책을 하나 꺼내더니 무언가 땅에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서인가 싶어 베오날드는 슬쩍 봤지만, 그의 지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기호와 계산식이 가득해서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다.
“보자. 여기서는… Rra랑 Kmd 주문을…….”
‘하긴 그 녀석들도 내 연금술 노트를 봐도 아무것도 못 알아 먹었으니… 피장파장인가? 후우~’
“아니지. 여기선 WIDa를 집어넣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마법진과 씨름을 하며 끙끙대기를 약 한 시간. 쉽게 쓰던 주문과 다르게 지맥 탐색은 뭔가 복잡한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아까웠던 그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물었다.
“약… 한 시간 정도 더 주세요. 계산이 왜 이렇게 안 맞지?”
“주문 하나를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는군.”
“그야 몸을 지키거나 싸울 때 쓰는 정형화된 주문들은 단순해서 미리 메모라이즈를 해 두는데… 이 탐색 같은 경우는 여러 개의 주문을 엮어서 새로 구성해야 해서 오래 걸리는 거라구요. 쉽게 말하자면 이번 같은 경우는 하급 주문 4~5개를 한 번에 시전해서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제어해서 사용하는 거예요.”
‘으음… 확실히 500년 전보다 후퇴한 게 맞군.’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베오날드는 이미 500년 전에도 지맥을 찾는 일을 마법사에게 맡긴 적이 있었다.
그때는 친분이 있는 다크엘프 마법사에게 부탁을 했었는데, 그는 저런 복잡한 계산 같은 거 없이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만 ‘동서쪽으로 2,400걸음 가라.’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해 줄 정도였다.
‘아무튼 4급 마법사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그다지… 높은 계위는 아니라는 거군.’
그렇게 기다린 끝에, 셀리나는 결국 계산을 완료하고서 당당하게 베오날드의 앞에서 주문을 시전했다.
그러자 셀리나의 몸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주문에 따라 구성이 되었고,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지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그녀는 반 바퀴쯤 돌더니 드디어 뭔가를 발견한 듯 환호성을 질렀다.
‘뭔가… 내가 생각한 거랑 다르군.’
“찾았다! 찾았어요. 이쪽 방향으로 직진하면 나올 거예요.”
“좋아. 그럼 타라. 우선 오늘 위치를 확실히 찾는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목적을 완수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만족한 베오날드는 다시 셀리나를 태우고 지맥을 찾으러 움직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분명 메이라 부인과 로이엔 남작가는 자신을 노리고 움직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일분일초가 아까운 그는 빨리 다가올 전쟁 혹은 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