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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55화 (55/259)

[55화]

‘내가 벌인 수작을 눈치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아마 큰 고통을 받는 건 변함없겠지. 눈치를 못 챈 채로 치유하면 뒤틀려진 채로 치유될 거고, 눈치챘다고 한들 얼굴 가죽을 벗겨 내고 치료해야 하는데, 그걸 감당하려면 고통스럽겠지. 제대로 마취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여신이 베푸는 기적으로 인해 의술의 발달이 상당히 더딘 것은 500년 전이나 500년 후나 다를 게 없었다.

베오날드의 경우는 가문에 수감된 수수께끼의 연금술사에게서 의술도 덤으로 배우고 연구도 했기에 나름 전문적인 마취약도 만들 수 있었지만, 반대로 신관들은 고작해야 독한 술을 먹이거나 마약을 투여해서 고통을 줄이는 것밖에 할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그냥 얼굴 가죽만 벗기고 치유하면 되는 게 아니라 뒤틀린 뼈들의 위치도 맞춰야 하니 신관 레벨에선 불가능한 일이지. 출혈도 신경 써야 하니까.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이제…….’

추한 얼굴로 죽을 때까지 살든가, 아니면 무리한 수술을 하다가 죽는 것뿐이다.

혹시나 낫는다고 해도 그 과정 동안 그녀가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대가로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베오날드는 미소 지으면서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뒤에 있던 에라솔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도련님, 저기… 이제 떠나시는 게 사실입니까?”

“어? 그렇게 되었지. 갑작스러운 이야기 같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그게 나아 보이더군. 말데로브 경에게 미리 이야기 못한 건 아쉽지만~ 네가 편지를 가져가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대가는 내가 가는 곳에 있으니 너무 걱정 마라.”

“예!”

그렇게 베오날드 일행은 다시 산속에 있는 거점으로 돌아갔다.

하이디는 여전히 굳건하게 포로들을 지키며 자기 단련에 힘쓰고 있었는데, 베오날드를 발견하자마자 마치 퇴근하고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연한 금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돌아오셨습니까? 도련님! 명하신 일은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보다 뭔가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만?”

“아, 별거 아니다. 아무튼 하이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잠시만 이것까지 같이 지켜 다오.”

“예! 오! 꽤 무겁군요.”

메이라 부인과 부친에게서 받은 재보를 건네주고 일행을 내버려 둔 다음 베오날드는 우선 에라솔만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때쯤, 베오날드는 에라솔에게 지맥의 비밀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세계의 마력이 흐르던 중 일부 지형이나 구간에 멈춰서 고이는 장소. 마나 호흡법을 수련하기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 맙소사, 정말입니까? 그, 그런 게 있을 줄은?”

“나도 책으로만 보던 거라 늦게 알았다. 아무튼 이곳에서 수련하면 좀 더 좋을 거다. 너도 마나 호흡법의 기본 정도는 수련했을 테니, 해 보면 느낌이 다르다는 걸 알겠지.”

“가, 감사합니다!”

“그럼 이걸로 빚은 갚았다. 장소를 기억했을 테니, 이제 저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을 영지에 데려가는 일을 대신 맡아다오. 우린 쉬었다가 떠나야 하니 말이다.”

대가의 지불이 끝난 뒤, 베오날드는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을 에라솔에게 맡겨서 캘러메인 영지로 보냈다.

상급 기사로 명성이 높은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고 하니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도 딴생각하지 않고 에라솔의 인솔에 따라서 귀환했다.

그리고 베오날드 일행은 곧바로 거점을 정리하고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자자, 이제 신경 쓸 부분은 다 끝났으니 곧바로 이동하지. 여기서 쉬고 가도 좋지만, 적을 등지고 쉬기엔 불안하지 않은가? 근처 마을로 가서 쉬는 게 훨씬 낫지.”

“어디로 가시려고 합니까? 도련님.”

“일단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가지. 아, 그리고 이젠 도련님이 아니니까 그냥 베오날드 님으로 부탁한다. 다들~”

하이디, 세인, 셀리나에게 그리 말한 다음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에게 짐을 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금화와 백금화에 보석으로 가득한 주머니는 특별히 무거웠기에 베오날드와 하이디가 나눠서 들었다.

그 뒤 그들은 근처 마을로 향하면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저… 베오날드 님, 에라솔 도련님에게 혹시 ‘지맥’에 대해 알려 주신 겁니까?”

“그렇다. 대가를 받았으니 나도 지불해야지. 그 정도는 해 줘야 수지가 맞거든.”

“정말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에라솔 도련님이 혹시라도 가문에 알려서 훈련장 같은 걸로 쓰이면…….”

“아, 지맥을 손에 넣어서 우리를 따라잡고, 캘러메인 백작가가 강해져서 위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인 건가? 걱정 마라. 지맥은 어디까지나 세계에 흐르는 마력이 고여 있는 곳이다. 쓰지 않아도 언젠가 넘치거나 아니면 자연의 흐름과 세계의 변화 등등 요인으로 사라지게 된다. 쓰면 더 빨리 변화하는 것뿐이지.”

“아! 그렇군요.”

“하나 반대로 영원히 나오는 곳도 존재한다. 별의 생명점, 마력이 샘솟아 세계에 뿌려지는 곳. 나는 그곳을 ‘성맥(星脈)’이라고 부르지. 대륙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장소다.”

“세상에! 대체 베오날드 도련님은 얼마나 마법에 조예가 깊으신 겁니까? 지맥과 성맥까지 아시다니요?”

베오날드와 하이디의 대화 중에 아는 단어가 나오자 힘겹게 걸어오던 셀리나가 깜짝 놀라서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맥과 성맥, 마력이 흐르는 곳, 이런 이야기엔 역시 마탑 출신 마법사인 그녀도 빠질 수 없는 것이었다.

순간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베오날드는 기존에 하던 대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봤던 연금술 책에 그렇게 쓰여 있던 것뿐이다.”

“와앙~ 세상에! 그런 좋은 책을 자기만 외워 버리고 없애다니 말이 되나요? 기억한 걸 다시 써서 지식을 보존해야 한다고요, 도련님.”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군. 내 것을 줄까 보냐? 아무튼 성맥도 찾아야 하긴 하겠군. 거기가 바로…….’

베노피스, 베오날드의 집이자 고향 같은 곳.

물론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자신이 찾아서 직접 가꾸고 쌓아 올린 영지임은 틀림없었다.

애초에 그의 가문 이름은 노이멀인데, 영지 이름이 왜 노이멀이 아니라 베노피스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가?

벨릭스 폰 노이멀 시대까진 노이멀 영지에 살았지만 베오날드가 가주가 되고 연금술을 익히면서 지맥과 성맥의 이론을 세우게 되고, 그곳을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권력을 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맥이 있는 장소에 새로이 영지를 만들었고, 그곳이 바로 이후 베오날드 폰 노이멀이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멸망한 베노피스, 자신과 평생 함께한 곳이었다.

“아무튼 도련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뭔가 대책이 있으신 거 아닌가요? 오늘 마을에서 묵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음, 그렇군. 그 정도는 이야기해 줘야겠지. 우선 젤커드 자작의 영지로 간다. 로이엔 남작이 그냥 물러나 주면 좋겠지만 메이라 부인이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하지. 우리가 행방불명이 되면 결국 자연스럽게 분노의 대상을 찾고자 할 거고, 자연히 하이디가 있는 젤커드 자작의 영지를 노릴 게 뻔하다.”

“예? 하지만 전 이미… 베오날드 님에게 맡겨진 몸인데…….”

“음~ 바로 그래서 노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거다. 물론 조용히 넘어가면 좋겠지만, 만약 위험한 상황이 현실이 될 경우 우린 젤커드 자작을 도와야겠지. 하이디, 너도 집안 자체는 무사한 게 좋지 않으냐?”

베오날드의 말에 하이디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리 집안에서 대우가 좋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엄연히 태어난 고향이자 집이다.

그리고 베오날드의 입장에선 부친인 벨릭스 폰 노이멀 같은 막장 레벨을 겪은지라 젤커드 자작 정도면 나름 평범한 기사치곤 노력한 축이라고 생각되었다.

“음, 그럼 저기, 만약 젤커드 자작의 영지 쪽 일이 끝나면요?”

“그다음? 비밀이다. 우선 해야 할 일부터 하지.”

“아니면~ 역시 마탑에 가는 건 어떠세요? 베오날드 님이 가진 연금술 지식이라면 분명 환영받을 텐데요?”

“아쉽지만 학자나 마법사의 길을 갈 생각은 없어서 말이지.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야 할 일이요?”

그래, 즐겁게 사는 것 같지만 베오날드는 엄연히 여신에게 사명을 받은 자다.

대륙의 평화와 안전, 미증유의 위협인 암흑신과의 싸움을 대비하는 일을 맡는 조건으로 이 지상에 온 것이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자연스럽게 압축이 된다.

“뭐긴, 귀족 출신으로서 꿈꿔야 할 것이 무엇이냐? 바로 ‘나의 정원’을 가지고 가꾸는 것이 아니겠느냐?”

“정원이라는 건… 영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영지만이 아니다. 내 주변과 내가 거느리는 모든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하이디, 세인 너희 둘은 내 정원의 꽃이자 같이 운영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난 너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말했다시피 나는 너희와 함께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 나가고 싶다.”

‘정원’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결국 보금자리를 같이 가꾸자는 의미.

그렇기에 한 과감한 어프로치와 고백을 이해한 세인과 하이디는 얼굴을 붉히면서 베오날드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저는요? 저는요? 베오날드 님?”

“셀리나, 너는 나를 섬기는 게 아니라 내 지식을 노리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아직… 출입 금지인 상황이지.”

“흐으음~ 그럼 들여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정도면 아직 젊고 예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래 보여도 나름 마탑에서 청혼도 많이 받았다고요.”

“외양이 좋으면 보기 좋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치우치지 않는다. 내 정원에 어울리는 성품과 재능을 갖고 있다면 나는 설사 그것이 고블린 여성이라도 품을 것이다.”

단호한 베오날드의 대답에 셀리나는 깨갱하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세인과 하이디는 베오날드가 그냥 여자만 밝히는 호색한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깊게 받아서 한층 더 감동하면서도 껄끄러운 부분이 역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고블린은 좀… 그렇죠?”

“애초에 고블린에 여성체가 있던가요? 몇 번 토벌에 참여해 봤는데, 죄다 남성체밖에 안 보였습니다만?”

“비유가 그렇다는 거다, 비유가! 아무튼 서두르자. 알테리오가 있다고 해도 혹시 모를 사태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삐이이이이이이!

베오날드의 말에 대답하는 알테리오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행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걸은 지 1~2시간 정도 지나자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베오날드 일행은 무사히 마을에 도착했지만 여관도 없는 곳이었기에 한 가족이 사는 집을 통째로 빌려 그곳에서 머물게 되었고, 하루 종일 피로한 몸을 드디어 쉬게 할 수 있었다.

‘후우~ 정말 피곤하군. 그나저나 메이라 부인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과연 메이라 부인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잠시 궁금해하던 베오날드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는 그대로 깊게 잠이 들었다.

겉으론 태연해 보였어도 사실은 마나 호흡법과 검술 단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쓰러졌을 정도로 하루에 너무 많은 일을 한 그였다.

마찬가지로 하이디 또한 베오날드와 거의 비슷한 스케줄을 감행했기에 똑같이 피로를 호소하며 눕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

그 무렵, 캘러메인 백작가의 메이라 부인은 현재 붕대를 감아 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증오에 가득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베오날드가 만든 상처와 저급 포션 때문에 신관의 치유를 받아도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고 추한 형태로 일그러진 채였다.

그녀는 일단 붕대로 가리는 조치를 해 둔 채로 신관이 한 이야기를 다시금 곱씹었다.

‘그러니까… 마님의 얼굴은 이미 ‘치유’가 완료되었기에 다시… 치유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치유를 하려면… 얼굴 가죽을 벗겨 내고, 이미 뒤틀린 뼈의 자리를 맞춘 다음에 치료를 해야 하는데… 그런 건 도저히…….’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쨍그랑! 쨍그랑!

신관이 한 이야기를 떠올리니 다시금 분통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얼굴.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얼굴이었던 우아한 부인으로서의 모습. 이래서야 내일 아침 식사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부인’에게 그 자리를 넘겨야 하게 될 판이었다.

“망할 잡종! 잡종! 잡종! 잡종이이이이! 나를! 감히 나를 이따위로! 그 잡종… 그리고 그 망할 세인… 도저히 용서 못해! 절대로… 절대로 용서 못해애애애애애애! 제드 경이… 제드 경이 돌아오면! 반드시!”

그의 수족 같은 제드 경은 자신의 얼굴을 고치지 못한다는 걸 알자마자 베오날드와 세인을 추적하러 나간 상태였다.

자신의 보물 같은 얼굴을 이렇게 만든 베오날드와 자신을 배신한 세인을 반드시 잡아서 복수하겠다는 일념하에 그녀는 깨진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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