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러니 내 ‘것’을 손상시킨 죗값은 가볍지 않을 거다.”
“아아악!”
“마님!”
단검이 보랏빛 궤적을 그리며 오러를 내뿜었고, 그대로 메이라 부인의 얼굴에 직격, 궤도가 그려진 대로 메이라 부인의 얼굴이 난도질이 되면서 거기서 피가 뿜어졌다.
고통에 찬 메이라 부인의 비명 소리에 제드 경은 결국 다시 움직였지만, 이미 베오날드의 단검은 그어졌고, 그는 품에서 수상한 약병을 꺼내 그 내용물을 메이라 부인의 얼굴에 뿌리고 뒤로 물러난 지 오래였다.
“네놈, 감히!”
“죽지는 않을 거야. 하나 상처가 남을 걸 걱정한다면… 나와 싸워서 시간 낭비하기 전에 신관부터 알아보는 게 좋을걸?”
“제드 경……! 아파! 빨리 어떻게 좀! 으으으으윽!”
그 말을 남기고서 베오날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사라졌다.
제드 경은 난도질이 된 마님의 얼굴을 한시라도 빨리 치유하기 위해 베오날드를 쫓는 것을 포기하고 메이라 부인을 메이드와 집사에게 맡긴 다음 신관들이 있는 신전으로 바로 향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빠른 속도로 층을 오르고 올라서, 위치는 알았지만 직접 가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 기사들을 무시한 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머, 멋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도련님!”
“이게… 무슨 소란이지? 너는 여기에 어쩐 일이냐?”
“예, 백작님. 노크도 안 하고 무례하게 들어와서 죄송하지만 시간이 좀 급박해서 말이죠. 일단 소란은 뭐…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과 관련한 일이니 이 친구들 좀 물러나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가문의 비밀을 들어선 안 될 텐데요.”
들어온 곳은 바로 캘러메인 백작의 방.
대충 베오날드가 메고 있는 묵직한 자루부터 시작해서 로이엔 남작가의 이름이 언급된 것까지, 캘러메인 백작은 베오날드의 이야기에서 어떤 사정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좋다. 베오날드와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 다들 나가 있거라.”
“아, 알겠습니다.”
백작의 방 앞을 지키던 기사들은 그렇게 백작의 말에 물러났다.
로이엔 남작가의 이름을 들었으면 자연히 메이라 부인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까지 알려지겠지만, 확실하게 어떤 일인지 이야기가 되지 않는 한 입단속시키는 건 문제가 없다.
가문을 위해서 일하는 기사들이니 말이다.
“보아하니… 메이라 그것이 실패했나 보구나. 쯧쯔쯔… 결국 저항도 못하는 아이들만 죽이는 게 그년의 한계였나?”
“아뇨. 그 정도면 나름 귀족으로서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진 건 맞습니다. 다만 상대가 저라는 점과 부하와 가신들 단속을 잘못한 게 문제였을 뿐이죠.”
“그게 한계라는 거지. 껄껄. 그래서? 고작 그걸 고발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용건이 뭐냐?”
“메이라 부인이 절 싫어하는 건 그렇다 쳐도 가문의 주인이신 백작님도 절 그렇게 싫어하실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그렇게 껄끄러우신데 남아 있으면 죄송하니 떠나고자 합니다만, 몇 가지 필요한 게 있어서 요청 좀 할까 합니다.”
“…요청?”
“별거 아닙니다. 가문의 인장이 박힌 반지 하나, 제 이름까지 적힌 집안 가계도 하나, 제도까지 표시되어 있는 지도 하나, 그리고 폐가 안 된다면 노잣돈도 조금 추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신 다시는 캘러메인 영지에 돌아오지 않도록 하지요.”
백작이 듣기엔 마치 얼굴에 철판을 깐 듯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요구였지만, 그렇다고 못해 줄 정도로 무리인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다시는 캘러메인 영지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본인 입으로 말했으니 그 말을 어긴다면 즉시 죽여도 상관없을 터. 충분히 좋은 조건이었다.
‘하나 조금 굴욕적이군. 저 잡종의 말을 그냥 들어주는 건 말이지.’
다만 놈의 말대로 해 주는 것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도 백작은 참았다.
수도에서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귀족이나 왕족들이 즐비한 정치판에서 누벼 온 몸. 애송이에게 겪는 작은 굴욕쯤은 참을 만한 것이었다.
더구나 혈족이자 외손자 아닌가? 잡종이라서 가문의 정통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조금 져 준다고 해서 기분 나쁠 게 없는 존재였다.
“자, 여기… 인장이 새겨진 금강석 반지, 가계도, 지도,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으로 주는 노자다.”
“의외로 순순히 주시는군요. 나가서 가문의 명예니 뭐니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허! 뭘 해도 손해가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감각이 없는 건 아니군.’
그렇다. 베오날드가 영지를 나가서 사고를 치거나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일을 해도 캘러메인 백작가로서는 ‘우리도 X같아서 죽이려 했다. 잡종이라 근본이 없어서 그렇다.’ 등등… 핑계가 많았던 것이다.
반대로 잘돼서 명예를 높이는 일을 하면 결국 캘러메인 백작가라는 출신과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니 백작가로서는 손해가 전혀 없었다.
“아무튼 이제 줄 건 다 줬으니 썩 꺼져라. 다시는 내 눈앞에 보이지 마라.”
“예, 그러죠. 아, 하나 더~ 그 망할 어머님께서 제 친부모님에게 손대는 일도 없게 해 주시죠. 물론 한다면 대가를 치를 거라는 것도 전해 주시구요.”
“…일단 말은 해 두겠다.”
“그럼.”
마지막으로 예를 갖춘 베오날드는 즉시 뒤도 안 보고 그곳을 나가 알테리오와 세인을 찾기 위해서 움직였다.
너무 늦으면 제드 경이라든가 메이라 부인이 세인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시바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는데, 다행히 그녀는 에라솔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손님도 한 명 더 있었다.
“짜잔~ 어서 오세요. 기다리느라 지쳤다고요.”
“너는 왜 여기 있지? 셀리나.”
“그야 저도 도련님과 함께 가려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녀는 보란 듯이 자신의 등에 메어진 커다란 배낭을 가리켰다.
또다시 살펴보니 튼튼한 부츠에 로브 아래로 바지까지 단단히 챙겨 입은 걸 봐선 정말로 자신을 따라갈 생각인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붙어서 당혹스러워진 베오날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째서지?”
“당연히 도련님을 따라가면 얻을 게 많으니까 그렇죠. 마탑의 마법사는 어딜 가도 환영받는 존재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아, 맞다. 그리고 말데로브 경의 사유지에 있는 은신처는 제가 흔적을 없애 놨습니다. 후후!”
“그거야 에라솔에게 맡겨도 되는 것이지만… 아무튼 멋대로 여길 떠나면 마탑에서 뭐라고 하지 않나?”
“그래서 일단은 편지를 보내 놨어요. 지식의 원천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버릴 수 있겠냐면서 말이죠.”
“후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좋다.”
“사실은 마법사가 합류해서 기쁘신 거죠?”
“…솔직히 메리트가 크다고 할 수밖에 없군. 아무튼 다들 준비되었으면 가도록 하지.”
그렇게 모두와 함께 베오날드는 드디어 캘러메인 백작가를 벗어나게 되었다.
혹시라도 메이라 부인이나 캘러메인 백작의 방해가 있을까 긴장하긴 했지만, 그런 일 없이 조용히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성문을 나선 베오날드는 살짝 뒤돌아보며 자신이 남긴 ‘선물’을 메이라 부인이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해했다.
캘러메인 백작가 정도 되면 가문의 저택에 상주하는 치유 신관이 존재하는 법이다.
훈련을 하다가 다친 기사와 병사들을 돌보는 것과 가문의 주치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사인 제드 경이 오러를 두른 채로 아주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신속하게 신관을 데려올 수 있었다.
“마님! 이제 걱정을 놓으십시오. 제가 신관을… 어?”
“제드 경……!”
“마님! 잠깐, 그건 어떻게?”
“그놈이… 그 잡종 놈이 대체 무슨 짓을?”
메이라 부인의 얼굴에 흐르던 피는 이미 멈춰 있었고, 오히려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이는 상태였다.
비록 메이라 부인의 곁에 오래 있다 보니 실전 감각이 떨어진 제드 경이었지만, 베오날드가 입힌 상처가 상식적으로 이렇게 빨리 치유될 수준이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메이라 부인은 엉망이 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귀족가의 부인에겐 미모가 모든 가치나 다름없었으며, 후계자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엔 이견이 없었다.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을 해칠 듯한 이런 아름답지 못한 문둥이 같은 얼굴이 된다면 필시 랄트에게도 무시당할 게 틀림없는 상황이었기에 메이라 부인은 제드 경에게 달라붙어서 애걸하기 시작했다.
“내 얼굴… 내 얼굴이 대체!”
자세히 보니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칼로 베인 상처와 피딱지, 고름, 피를 비롯한 흉이 잔뜩 남아서 그로테스크한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메이라 부인의 얼굴은 엄청 뒤틀려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는가 생각하던 제드 경은 문득 바닥에 낯선 약병이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이건가? 그 망할 놈이 대체 이 안에 무엇을……!”
“그건… 저희 신전에서 파는 치유 물약이군요. 그것도 가장 싼… 것으로, 은화 몇 개에 팔리는 가장 저급 품질의 물약입니다.”
“뭐, 뭐라고? 치유 물약이라면 치유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마님의 얼굴이 저렇게 된 거지?”
“그, 그야… 가장 저급 품질이고, 싼 것이니까요. 신전에서 만들어진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기사님과 귀족님들에게 납품이 되고, 중급은 군대와 최상위 용병 길드에게, 그리고 남은 건 떨거지 모험가나 도적, 불량배들에게 파는 겁니다. 가장 저급 품질이라서 치유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양을 늘리기 위해서 물을 타거나 다른 식물의 즙 같은 불순물을 섞은 거라서… 그…….”
“그 망할 놈이!”
제드 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이미 영지를 벗어났을 베오날드를 떠올리며 분노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만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곧바로 신관에게 치유를 부탁했다.
“아무튼! 좋다! 마님의 얼굴을 고칠 수 있는가? 어서 치유해라.”
“그, 그게 그러니까, 이게 그러니까…….”
“빨리 말하지 못할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여신이시여, 여기 고통받는 자가 당신의 손길을 원합니다. ‘치유의 손길’.”
제드 경의 윽박에 신관은 얼른 메이라 부인의 얼굴을 치유하기 위해 신성 마법을 사용했고, 은은한 녹색 빛의 손길이 메이라 부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따스한 기운과 점점 사라지는 고통에 메이라 부인은 자신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다.
하나 눈앞의 제드 경과 치유를 시전한 신관의 표정이 어둡기에 불안한 느낌을 받은 그녀는 ‘설마?’ 하는 심경으로 거울을 찾아 움직였다.
“마님!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게 뭐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메이라 부인의 외모는 충분히 아름다웠으며, 백작가에 어울리는 미모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탱탱한 피부.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였었는데, 지금 치유가 된 얼굴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비뚤어지고 뒤틀려 버린 추한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내… 내 얼굴, 내 얼굴… 이게… 이게 어떻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분명 치유 마법은 들었을 건데?”
“그게… 그러니까… 저 물약 탓일 겁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그대로 두었다면 깔끔하게 치유되었겠지만, 저 물약으로 일부가 ‘어설프게 치유’된 탓에… 치유가 먹히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뭐, 뭐라고?”
연금술사인 동시에 뛰어난 의술 덕분에 황제의 주치의가 되어 권력을 잡은 베오날드 폰 노이멀. 그의 라이벌은 역시 의술로 권력을 누리던 신관들이었는데, 한때 그는 신의 존재성을 알아내기 위해서 ‘치유 마법’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에 기대어 치유하는 ‘치유 마법’의 원리는 그 자리에 있는 상처를 원형으로 복원하고, 신체를 활성화해서 자가 치유력을 올리는 두 가지 효과가 모두 있음을 알아내었고, 이미 ‘치유’된 육체에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베오날드가 검으로 베고 난 뒤 끼얹은 저급 물약에 의해서 ‘어설프게 치료된 부위’는 ‘치유 마법’의 대상이 아니었고, 그로 인해 얼굴이 균형을 잃고 추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마치 한번 무너진 돌다리에 나무 기둥을 몇 개 끼워 넣고 나머지 부분만 돌로 복원했다가 무너진 격이다.
신관의 설명을 들은 제드 경과 메이라 부인은 이런 것을 모두 계산하고 그런 짓을 벌인 베오날드의 간교함에 소름이 돋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