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흐음, 사전 기별 없이 막 찾아올 정도로 우리 사이가 좋은 건 아닐 텐데… 어쩐 일로 온 게냐?”
“아들이 어머니를 보러 오는 게, 뭐가 그리 문제입니까?”
“후우~ 그래. 형식상으론 너 같은 잡종이라도 양자니까 아들 취급을 해야겠지. 그래서? 빨리 용건이나 말하렴. 잡종과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도 불쾌하니 말이다.”
“아주 대놓고 싫어하시는군요. 하긴 그 모자란 아드님을 방구석에 처박아 버린 원인이니 불쾌하실 수밖에 없는 건 알지만… 아무튼 중요한 용건이기에 어쩔 수 없이 왔습니다.”
‘저 망할 것이!’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베오날드의 말에 발끈한 메이라 부인은 당장에라도 제드 경을 시켜 저 망할 잡종을 제압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제드 경의 무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저 아이도 엄연히 캘러메인 가문의 ‘혈족’. 대놓고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은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용건은?”
“그~ 보내 주신 선물에 대해서 답변을 드리려고 말이죠.”
“선물? 나는 그런 걸 보낸 적이 없는데…….”
그 순간, 베오날드의 품에서 나온 반지 6개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를 굴렀다.
각각의 반지엔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거기엔 메이라 부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바로 로이엔 남작가의 문양.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닌 로이엔 남작가의 혈족이나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에게 지급해 주는 인장 반지였다.
“이, 이걸 대체 어디서?”
메이라 부인은 물론 제드 경조차도 살짝 떨면서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혹시 위조품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귀족 가문의 인장을 위조하는 것은 매우 위중한 범죄이며, 자신의 손가락에 껴져 있는 반지 중 하나도 같은 것이라 도저히 못 알아볼 수 없었기에 출처를 물을 만했다.
“어디서라니요? 직접 보내셨으면서 발뺌하시는 겁니까? 세인 양이 아주 잘 말해 주던데요.”
“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음, 발뺌이라. 그것도 좋지요. 일개 메이드의 증언은 증언으로 취급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철그럭.
베오날드는 다시 품에서 또 하나의 물건을 꺼내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작은 단검. 금과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여러 보석으로 장식되고, 마찬가지로 로이엔 남작가의 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본 메이라 부인과 제드 경의 눈빛은 한 번 더 크게 흔들렸다.
“이 단검… 그러니까 딱 봐도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것이지요. 아마 뛰어난 전공을 세웠거나, 혹은 오랫동안 가문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 수고한 기사에게 특별히 선사할 법한 물건인데… 이래도 부인하시겠습니까?”
“…큭!”
“이 단검의 주인이라든가, 다른 기사분들이 이미 다 이야기하셨습니다. 아~ 왜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냐면… 그 기사분의 명예를 위해서 일부러 함구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돌려보내야 하는데, 누구인지 밝히면 돌아가서도 곤란하실 거 아닙니까? 명예가 다치니 말이죠.”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그것으로 날 협박할 생각인가? 백작에게 보고라도 해서?”
“아뇨. 하하하, 협박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애초에 저 같은 잡종을 하루빨리 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요. 다만 이 정도로 직접적으로 행동하실 줄은 몰랐지만요. 아무튼 제가 바라는 건 합리적인 것입니다. 제게 포획된 로이엔 남작가 기사들의 몸값이죠.”
기사들의 몸값을 받기 위해 왔다는 결론을 말하자, 메이라 부인과 제드 경은 의외라는 눈으로 베오날드를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들이야 백작과 손을 잡아서 그에게 일러도 아무 문제없지만, 엄연히 캘러메인 백작가의 혈족을 죽이기 위한 계략을 짠 것이라 그것을 백작에게 이야기 안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후계자’로 직행하는 길일지도 모르는 카드였는데, 무시해 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뭔가 다른 걸 노리는 건가?’
“일단 잡은 기사는 총 4명. 절 노리고 온 기사 6명 중에 4명입니다. 리스트는 벤트 경과 카랄 경, 그리고…….”
‘…무슨 속셈인 거지?’
“한 분은 중급 기사이고, 다른 셋은 하급 기사입니다. 포로 비용을 받으면 맨몸으로만 보내 드릴 테니 그리 아십시오. 설마~ 로이엔 남작가에 가서 받으라고 하는 건 아니시겠죠? 그럴 경우 그냥 모조리 없앤 다음 돌아갈 겁니다. 그 원망을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몸값 지불을 거부하셔도 됩니다.”
베오날드는 미소를 띤 채 기사들의 몸값에 대해 이야기하며 메이라 부인과 제드 경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하긴 후계자 습격에 대한 것은 제외하더라도 로이엔 남작가에 기사들을 요청한 일의 뒷감당도 만만치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액수는 뭐, 두둑하게 주셔야 할 겁니다. 기사잖습니까?”
“흥, 하지만 그들을 죽이게 되면 로이엔 남작가를 적대하게 될 텐데? 그 감당을 할 수 있겠니?”
몸값 협상을 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이라 부인도 그냥 당할 생각은 없었다.
저 잡종에게 거액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로이엔 남작가의 위세를 빌려 베오날드를 꼬리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태연히 말했다.
“감당이라. 어차피 여길 떠날 몸인데, 그런 걸 생각할 필요는 없지요.”
“…뭐?”
“이미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를 둘이나 처치한 시점에서 강은 건넜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로이엔 남작가, 어머님이 계신 곳의 기사 아닙니까? 이미 감정은 상했으니 한몫 받아서 떠나려는 겁니다. 어차피 둘을 처치하나 여섯을 처치하나 그게 그거이지 않습니까?”
채찍만 휘둘러서야 얻을 것을 쉽게 얻을 수 없다.
슬쩍 당근도 보여 줘야 한다.
물론 그 당근이 단순한 당근이 아니라, 협박도 들어 있는 당근이었으니 문제였지만 말이다.
베오날드가 이 영지를 떠난다는 건 후계자 구도의 방해물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기사 여섯을 잃은 로이엔 남작의 원망을 받아 낼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선택지는 없겠지. 저쪽으로서는 기사 둘을 잃는 것과 여섯을 잃는 건 또 다르니 말이야.’
“큭, 얼마나 요구할 참이지?”
“기사니까… 싸진 않잖습니까? 여기 이렇게 금과 보석이 박힌 단검을 하사받은 기사까지 끼어 있으니 말이죠. 이것도 돌려 드려야 하니까… 한두 푼이 아닌 건 아시죠?”
으득!
베오날드에게 들릴 정도로 메이라 부인의 이빨을 가는 소리는 컸다.
그리고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데, 마음 같아선 분통을 터뜨리며 난리 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녀는 제드 경에게 눈빛을 보냈다.
10년을 넘게 함께해 온 기사인 제드 경은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당장 이 잡종을 제압하고 구속하세요! 도저히 못 봐 주겠군요! …라고 하시는 것 같군. 아무튼 밖에 다른 이는 없으니 조심스럽게 처리해야겠군.’
제드 경은 그렇게 베오날드를 노리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압을 하려면 한순간, 말소리도 못 내게 단 한순간에 의식을 끊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호흡을 조절하며 메이라 부인에게 베오날드의 시선을 끌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메이라 부인은 마치 화를 못 이기는 척 터뜨리면서 완벽하게 베오날드의 의식을 빼앗으려고 애썼다.
“이이이이익! 망할 잡종 같으니! 감히 내게……!”
“저는 곱게 해결하자고 하는 일인데, 그렇게 화를 내실 것까지…….”
‘지금……!’
단숨에 오러를 끌어 올린 제드 경의 몸이 베오날드를 제압하기 위해서 빠르게 덮쳐졌다.
푸른 잔상이 베오날드를 덮치고, 동시에 그가 앉은 의자를 쓰러뜨렸다.
하나 제드 경은 자신의 손과 몸에 아무런 감촉이 없는 것을 느끼고 의아해했다.
‘뭐지?’
“워,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어, 어떻게? 헉!”
경악하는 제드 경의 앞에서 베오날드는 어느새 메이라 부인의 목에 로이엔 남작가의 그 단검을 겨누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선 그의 몸 위로 은은히 빛나는 보랏빛 오러가 설명해 주고 있었다.
제드 경은 그제야 베오날드가 기사의 경지에 오른 것을 눈치채고, 허리의 검을 뽑아 겨누었다.
“설마… 도련님이 기사였을 줄이야. 대체 어떻게 숨기고 계셨던 겁니까? 말데로브 경이 분명 아니라고 했는데……!”
“그야, 제가 너무 높은 산이면 랄트가 절망하잖아요? 말데로브 경 같은 충신의 경우, 후계자 교육을 위해서 자신이 욕먹는 것쯤은 감당하는 자이니까 협조가 쉽던걸요? 물론 저로서는 조커 카드를 숨길 수 있어서 좋았지만 말이죠. 아무튼 지금 이 행동의 의미는 그러니까… 몸값을 지불하기 싫어서 한 거라고 봐도 되는 거고~ 내 목숨을 노렸으니 죽을 각오는 되었나요?”
“자, 잠깐! 잠깐 기다려! 알았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하지. 제드 경! 뒤로 물러서! 그리고 검도 버려!”
일방적으로 사람을 지배해 온 악당일수록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베오날드가 겨눈 단검이 목에 살짝 상처를 내자 메이라 부인은 지레 겁을 먹고 제드 경을 제지시켰다.
그래, 일방적으로 남을 해하기만 했을 뿐 누군가와 겨룬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다치는 것에 겁먹을 수밖에 없었고, 충성스러운 제드 경은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검을 버리고 물러났다.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게 돼서 다행이네요. 그러면~ 일단 제드 경은 방구석에서 벽을 보고 손을 들고 있어 주세요.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당신 주인의 목숨은 없습니다. 엄연히 중급 기사이니 그 정도는 하실 수 있겠죠?”
“…알겠다.”
“돈은 집사와 메이드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그럼… 기사 4명분의 몸값 빠르게 준비 부탁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구할지는 상관 안 할 테니까.”
결국 메이라 부인은 자신의 본가에서 데려온 전속 하인을 불러 급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베오날드가 몸값의 시세를 정확히 모를 것 같아 슬쩍 가격을 후려쳐 보려고 했지만, 이미 모든 계획을 다 짠 베오날드는 현역 중급 기사인 젤커드 자작과 하이디에게서 몸값에 대한 시세를 알아 온 지 오래였다.
“자꾸 수작 부리시려고 하네요. 손가락 몇 개 정도 잘라 드려야 하려나요?”
“아, 알았어! 알았다고!”
살기를 담은 베오날드의 엄포에 결국 메이라 부인은 기사 4명분, 그것도 중급 기사까지 끼어 있어 그 몸값이 상당했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은 물론 상인에게 빚까지 지고도 모자라서 남편 몰래 이 백작가의 금고와 창고에까지 손을 대서 간신히 금액을 채웠다.
그러자 만족한 베오날드는 묵직해진 커다란 자루를 챙겨서 메이라 부인의 방을 나설 준비를 했다.
여전히 협박은 유효해서 제드 경은 벽을 보고 손을 든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 기사분들은 오늘 달이 뜨기 전에 돌려보내지요. 저는 누구처럼 협상한다고 해 놓고 뒤를 덮치는 그런 비겁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신의 이름과 이 캘러메인 백작 가문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지요.”
“크으으윽! 그래, 알았으니 썩 꺼져. 다신 이곳에 나타나지 마!”
“예예. 아! 맞다. 그리고 하나 더 계산할 게 있는데 말이죠.”
“또 뭐?”
“세인과 세인의 어머님에 대한 빚 말입니다.”
“그게 무슨 빚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에 메이라 부인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고작해야 소유물인 메이드와 그 메이드의 모친에 대한 빚이라니. 황당하다는 눈빛의 그녀를 보며 베오날드는 피식 웃고는 아주 품위 있게 입을 열었다.
“귀족으로서… 자신이 가진 미술품이나 보물에 누군가 상처를 입히면 아주 기분이 나쁘겠지요? 당신은 내 정원에 들어와 내 것이 된 세인의 몸과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러니 이건 정원의 주인으로서 아주 기분 나쁜 일입니다. 그녀는 나를 걱정해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정원을 가꾸는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이해해 주시겠죠? 어머님.”
“그, 건……!”
메이라 부인은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베오날드의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느껴 몸을 떨었고, 안색은 창백해졌다.
이때까지 잡종이라 생각했던 그는 지금 더없이 귀족스러운 이유와 품위 가득한 오만함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정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아버님, 할아버님이 자신을 엄청 혼낼 때 도저히 저항할 생각도 못한 채 두려움에 덜덜 떨 때처럼 메이라 부인의 몸은 경직되어 움츠러들었다.
‘이, 이이익! 어떻게 내가? 내가 이런 잡종에게?’
그리고 그 압력에 굴한 그녀는 지금 자신이 잡종에 불과한 베오날드보다 더 천하고, 더 아래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마치 수도에서 다른 대귀족이나 황족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 기분과 유사한 것에 그녀는 또 한 번 굴욕감을 느꼈지만, 베오날드의 처분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