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오셨습니까? 도련님.”
“그래, 세인. 할 이야기가 많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선 곤란하니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그리고 세인을 호위하느라 수고했다, 에라솔. 약속한 대가는 곧 치르도록 하지.”
“예! 베오날드 님! 감사합니다!”
만나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베오날드는 곧바로 로이엔 남작의 영지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녀의 모친은 남작가에서 쫓겨나서 신전에 의탁한 지 오래였고, 베오날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세인은 처음엔 그 이야기를 믿지 못했지만 베오날드가 건네준 모친의 유언장과 유품을 받아 들자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메이라 마님께서는 분명히……! 하지만 이건 분명히 어머님의 글씨…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죠?”
“그… 귀족의 관점으로 해석해 준다면 ‘어차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라는 것과 병석에 누운 사람 하나를 돌보는 데 들어가는 식사, 노동력, 약값이 아깝기도 했을 테니 말이지.”
“하지만 저는 메이라 마님이 저지른 일을 알고 있는데!”
“아, 그 사람의 지시를 받아서 무슨 일을 같이 저지른 건지 모르지만, 어차피 귀족이 아닌 너의 진술을 들어 줄 사람은 없고, 행여나 증거를 가지고 간들 ‘같이’ 저지른 시점에서 꼬리 자르는 용도가 되겠지. 어차피 그녀의 뒤엔 로이엔 남작가도 있고, 같은 파벌인 델마인 남작까지 있으니 말이야.”
“그럴 수가…….”
베오날드의 깔끔한 분석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그녀였다.
물론 그녀도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방안이 없었기에 그저 자기 합리화하는 식으로 ‘믿어 버린 것’. 아니, 믿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어차피 그것을 캐내거나 반항하려고 한들 그녀에게 남는 건 병든 모친을 혼자서 먹여 살리기 위해서 노동을 하거나 창관에 들어가거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졸부의 첩이 되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뭐,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갈 수 있는 길이 낭떠러지와 험한 길뿐이라면 누구라도 죽음에 이르는 낭떠러지를 선택하기보단 험한 길이라도 고통을 견디면서 가려고 할 테니까.”
“…베오날드 님?”
“그러니 너는 잘못한 것이 아니다. 너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내가 장담한다. 네가 한 생각과 판단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님이… 어머님이…….”
“사슴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쁜 것이 있다면 메이라 부인과 비록 하급자이자 사생아라곤 하나 신의를 맺은 것을 거부한 로이엔 남작가이겠지. 그러니 마음을 놓아라.”
베오날드는 아주 능숙하게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베오날드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죄했다.
그녀에겐 아직 죄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본래 메이라 부인의 명으로 베오날드의 전속 메이드가 되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리고, 그가 한 말과 행동을 전한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상냥하신 베오날드 도련님. 저는 이런 도련님을 진작 알아보지 못하고, 메이라 마님의 명에 따라서 도련님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나 너는 결국 나를 선택했다. 모친의 안전, 메이라 부인의 강압 속에서 희망을 나에게서 찾아서 알렸다.”
“그저 살기 위해서… 메이라 마님을 배신하고 도련님에게 붙은 것뿐입니다.”
“배신도 배신 나름이지. 메이라 부인이 너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었더냐? 만약 그런 상황에서 배신했다면 나도 널 경멸했겠지만 너는 아니지 않느냐? 자비와 은혜는커녕, 그저 ‘도구’로서 이용만 하며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존중하지 않았지. 그런 건 배신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이야기다. 너는 옳은 선택을 했다.”
“…정말… 이십니까?”
“그래, 그러니 더 이상 울지 마라. 눈이 퉁퉁 부어서 아름다운 얼굴이 망가지지 않느냐? 그리고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나를 따르면 된다. 나는 보물을 썩히고 헛되이 취급하는 그 어리석은 할망구와 같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아… 베오날드 님.”
만약 신을 만났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배신, 죄책감, 슬픔, 모든 부정한 감정과 생각을 품어 주고, 구원해 주는 베오날드의 자애로움 앞에 세인은 감격으로 전율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대로 베오날드의 품에 뛰어들어 그동안의 고생으로 쌓인 슬픔과 한을 쏟아 냈다.
베오날드는 마치 부모처럼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그녀가 울음을 그치는 것을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정말이지 메이라 부인에겐 감사하고 싶을 정도야. 하긴 신분이나 성별에 얽매여서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못 보는 것들이니… 어련하겠어.’
겉으론 자상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베오날드는 사실 속으로는 쾌재의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메이라 부인이라는 악역이 있어 준 덕분에 이 아름답고 현명한 인재가! 자신이 명하면 불 속에라도 당당히 뛰어들 충성심을 지닌 채로 손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자, 이제 진정했느냐? 아직 우리 상황이 그리 좋은 게 아니고, 승부가 난 게 아니다. 그러니 정신 차려야 한다, 세인.”
“…예, 베오날드 님.”
“좋아. 나는 이대로 메이라 부인과 마무리를 지으러 가고자 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길 원하느냐?”
“어떻게 하길 원하느냐는 말씀은……?”
“메이라 부인에게 어느 정도로 보복을 해 주고 싶으냐, 이 말이다. 나는 우선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 4명을 잡아 두고 있어서 그들의 몸값과 수작질을 한 대가를 받으려고 하는데… 네가 만약 메이라 부인에 대한 원한과 증오, 혹은 풀리지 않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을 풀어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진 세인의 호감도를 올리고 그녀가 자신의 부하가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과정에 불과했다면 이것은 확실한 마무리 도장을 찍는 행위였다.
어차피 이제 메이라 부인과 백작 둘 다 자신을 아니꼽게 볼 테고, 다른 귀족의 기사들을 부른 이 시점에서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캘러메인 백작가에 있을 의미가 사라진 만큼, 떠나기 전에 기사들의 몸값을 비롯해서 단단히 한몫 챙길 작정이었는데, 겸사겸사 그들의 처분을 세인에게 맡김으로써 그녀의 충성과 애정 모든 것을 굳히자는 것이었다.
“제, 제가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기사들의 몸값을 비롯해서… 이거저거 받아 낸 다음 이곳을 떠날 생각이라서 말이다. 물론 너도 데리고 갈 거다. 이제 내 사람이니까. 아무튼… 네가 딱히 뭘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그냥 곱게 받을 것만 받을 것이고, 만약 로이엔 남작과 메이라 부인 모두 없애 달라고 하면 나는 쫓길 각오를 하고서라도 그 둘의 목을 너에게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베오날드의 강렬한 제안에 세인은 또 한 번 몸 둘 바를 몰랐다.
메이라 부인과 로이엔 남작. 평생 자신을 지배하던 귀족들의 목숨을 자신의 부탁이면 끊어 준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 현실이 되려 하자 그녀의 머리는 과부화가 되었다.
아직 손에 있는 모친의 목걸이와 유서를 꼭 쥔 채, 그녀는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눈을 질끈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주 잠시 후, 생각을 마친 그녀는 베오날드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
메이라 부인의 방.
그리고 같은 시각, 베오날드가 한참 세인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메이라 부인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자신의 방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그녀가 초조해하는 것은 본래 늦어도 어제면 와야 하는 자신의 본가,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늦는다면 뭔가 기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아무 소식이 없으니 갑갑할 수밖에 없는 그녀였다.
“제드 경, 설마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죠? 왜 요청한 기사들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거죠?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이미 다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직 남작가엔 도달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남작가의 일이 있어서 기사들을 편성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일이 있어서 늦게 보내는 것일 테니 차분히 기다리시면 됩니다, 마님.”
“그런 거겠죠? 하긴 갑자기 기사들을 부르니… 조금 늦는 거겠죠?”
“예, 그런 것입니다.”
제드 경의 차분한 말에 메이라 부인은 심호흡을 하며 초조함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조금 늦는다고 해서 걱정할 일은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여유를 되찾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그나저나 그 베오날드는 지금 어디에 있죠?”
“여전히 키우는 그리폰의 먹이를 구하러 사냥을 나가거나 하이디 양과 대련을 하는 것의 반복일 뿐입니다. 딱히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베오날드의 일 처리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제드 경은 물론 그 아랫사람들 모두 베오날드가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을 처리하고 일부 포획한 것을 꿈에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들어온 정보에 따라 메이라 부인은 일단 베오날드를 처리하는 일에 대해선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그녀의 속을 썩이는 일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후우~ 그건 그렇고, 우리 랄트는 어떤가요?”
“랄트 도련님이라면 여전히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으십니다. 그나마 백작님이 직접 가셔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나아지곤 있다고 하지만…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버님이 직접 돌보신다니 다행이네요.”
집안의 정통 후계자인 만큼 결국 백작까지 나서서 랄트를 돌보는 덕분에 차도는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년이 된 이후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소중한 마당인데… 빨리 후계자로 복귀했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다른 부인들의 움직임은 어떤가요?”
“랄트 도련님이 칩거하시면서 렌겔 가주 대리님을 자주 뵈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허튼 꿈을 꾸는 것이겠지요.”
“이이이익! 망할 것들이! 이제 와서 사내아이를 가진다고 한들! 우리 랄트가 있는데……!”
“만약 사내아이를 낳는다면 백작님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랄트가 방에 처박히고 난 뒤, 초기엔 그냥 오버워크로 인해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그 기간이 길어지자 메이라 부인에게 권력이 밀렸던 다른 부인들은 역으로 찬스라고 생각하고 렌겔 가주 대리와의 2세 생산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면서 희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랄트가 지금 저 모양이니, 사내아이만 가지게 되고 랄트가 계속해서 나오지 않으면 필시 새로이 낳은 자신의 아이가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메이라 부인은 실각하는 거나 마찬가지. 정말로 사내들의 정치 전쟁만큼이나 가혹하고 무서운 것이 바로 여자들의 전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앙큼한 계집들이! 감히 누구 자리를 넘봐! 사내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내가 곱게 기르는 꼴을 그대로 볼 거라 생각해?”
“이번엔 제대로 지키겠다는 뜻이겠지요. 아무튼 이런 현상도 결국은 랄트 도련님이 다시 정신만 차리면…….”
똑똑!
한참 가문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갑자기 낯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음 문 뒤에서 낯익으면서 절대 이곳에서 들려올 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메이라 부인과 제드 경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접니다, 어머님. 베오날드입니다. 혹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저, 저것이 어떻게 여기에?”
“마님, 일단 정신 차리시고, 차림을 정돈하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은 제가 잠시 시간을 끌겠습니다.”
일순 당황한 메이라 부인이었지만 제드 경이 얼른 나서서 베오날드를 맞이하였고, 그동안 옷매무새와 심경을 정리하며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약 30분 뒤, 모든 마음의 정리를 대략 끝낸 메이라 부인은 베오날드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다음 시종과 집사들을 불러서 본격적으로 대접하며 그가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