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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51화 (51/259)

[51화]

“그럼 하이디, 경계를 잘 부탁한다. 하나하나가 비싼 인질들이니 절대 방심하지 말도록. 아까 말했듯이 반항하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그냥 죽여도 좋다.”

“예! 도련님.”

베오날드가 신신당부하고 떠난 뒤, 홀로 남은 하이디는 묶어 둔 이들을 감시하며 오늘 있었던 전투에 대해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기습으로 우세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중급 기사 하나도 제대로 제압 못한 자신의 실력.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의 마나 호흡법과 창술을 배웠는데도 이기지 못한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경험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이야. 그럼 대체 도련님은 뭐지? 분명 올해로 16살이실 텐데? 대체 도련님은… 그게 규격 외라는 걸까?’

경험의 차이가 크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자신보다 실제 나이로는 어린 베오날드에 대해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녀였다.

방금 전 싸움만 해도 자신이 일대일로 쩔쩔매는 사이에 다른 기사들을 제압하는 건 물론, 도망치는 벤트 경을 아무렇지 않게 검술로 제압하는 것까지. 그 압도적인 강함과 여유, 자신도 그런 무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더불어서 흠모하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게다가 도련님은 무력뿐 아니라 지식, 교양도 뛰어나시고, 귀족으로서도 완벽하시고… 그러면서도 내 재능을 알아봐 주시고 재촉도 안 하시고… 우으으으… 여자 같지 않은 날 배려도 해 주시고… 게다가… 고백까지 해 주셨지.’

‘정말 찬란히 아름다운 하이디, 네 마음만 허락한다면 너와 가족이 되어 모든 영광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

딱 하이디 나이대의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완벽한 남성상.

심지어 먼저 고백까지 다이렉트로 해 왔기에 그녀가 말만 하면 단순히 가신과 주군이 아닌 관계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은 아냐. 나는… 그분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야말로 그분은 큰 사랑과 은혜로 자신을 받아 줄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이디는 자신이 아직 그분의 옆에 서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저 그분의 빛 아래에서 은혜만 받기보다는 같이 고난과 역경을 나누며 걷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니 감시를 한다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철그럭!

갑주를 입은 채로 일어난 그녀는 이 잠깐의 시간도 아쉽다는 듯 이를 악물고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까 전 싸움의 광경을 똑똑히 떠올리며, 베오날드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 노력하고자 다짐했다.

***

알테리오를 탄 베오날드는 로이엔 남작가를 향해서 열심히 달렸고, 예상보다 빠르게 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신체 구조가 고양잇과 맹수의 것이라 그런지 평온한 도로를 오래 뛰는 건 말보다 약간 느렸지만, 본래는 날아다니면서 사냥감을 찾고 강습하는 그리폰이라서 스태미나는 아주 발군이었다.

하루를 넘어서 새벽 내내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체력과 수풀과 나무로 우거진 험지도 민첩하게 돌파할 수 있는 기동력 덕분에 길을 돌아서 가지 않을 수 있었고, 말보다 더 빠르게 로이엔 남작가의 영지 근처에 도착할 수 있게 된 베오날드였다.

그렇게 단 하루 만에 영지 근처에 도달한 그는 숲에 알테리오를 대기시켜 두고 홀로 로이엔 남작의 영지로 들어갔다.

“벤트 경의 지시로 전갈을 전하러 왔습니다.”

“이건… 벤트 경의 인장? 들어가시지요.”

“감사합니다.”

영지의 경비병들에게는 기사들에게서 빼앗은 인장과 위장용 서찰을 보여 줌으로써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곧바로 성내의 도심을 지나서 메이라 부인의 본가인 로이엔 남작가의 저택에 도달, 마찬가지로 입구의 경비들에겐 벤트 경의 인장과 서찰을 보여 주고 쉽게 통과했다.

‘여기까진 참 쉽군. 문제는 세인 양의 어머님이 있는 위치인데…….’

‘어머님은 아마 하인들이 묵는 처소에 같이 있을 겁니다. 저택의 구조는 대략…….’

세인이 모친이 있을 법한 장소를 알려 주긴 했지만 전령으로 위장한 상황에서 멋대로 저택을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에 일단 타이밍을 기다리는 베오날드였다.

우선은 수상한 자로 취급받지 않도록 저택 내부로 들어가서 남작이 자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남작님은 지금 업무로 바쁘십니다. 서찰을 주시면 전해 드리도록 하죠.”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그… 벤트 경이 꼭 직접 전하라고 했습니다. 전 그걸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구요. 그러니 기다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화장실은 어디인지? 물론 하인들이 쓰는 곳으로… 당연한 이야기지만요.”

집사장과 능숙하게 대화한 베오날드는 화장실을 핑계로 드디어 저택 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명분을 얻어 냈다.

그다음 하인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찾는다는 식으로 돌아다니다가 세인 나이대의 하녀가 보이자 그녀에게 다가가서 세인의 모친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이 캘러메인 영지에서 온 전령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세인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설명하자 하녀는 손뼉을 치면서 입을 열었다.

“아~ 그러시군요. 근데 세인의 어머니는 지금 여기 없어요.”

“여기… 없다고요? 그럼 어디에?”

“그게… 돈도 돈이고, 사람을 쓰는 것도 저택 내의 일손을 쓰는 거라 신전에 맡겨 버렸거든요. 남작 부인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셔서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신전은 이곳 남작님 영지의 신전인가요?”

“예. 어디 먼 곳으로 보내진 않았겠죠?”

하녀의 정보를 토대로 베오날드는 남작가의 집사에게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한 뒤 곧바로 신전으로 향했다.

역시 그가 늘 보고 상상하던 것보단 훨씬 작은 집 같은 신전. 새하얀 석재와 조촐한 여신상을 보며 신전 안으로 들어간 그는 적절한 양의 헌금만 내고 기도를 드리고 난 뒤에 신관을 만나 세인의 모친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

“남작가에서 맡겨진 분을 찾으신다고요?”

“예. 캘러메인 백작 영지에서 왔는데… 지인의 모친이 여기에 맡겨졌다고 해서 말이죠.”

“아,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베오날드의 이야기를 들은 신관은 부리나케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약 한 시간가량이 지나서야 아까 전 신관보다 어린 여신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설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리저리 확인을 하느라……. 말씀하신 남작가에서 맡기신 분이라면 그게…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지금 신관님께서 경위에 대해 확인하느라 제게 먼저 말씀을 전하라고 해서……. 아! 무덤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음, 안됐지만, 내 입장에선 오히려 편하게 됐군.’

세인이 들으면 충격을 받을 이야기였지만, 괜히 인질로서 가능성이 있을 바엔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베오날드의 입장에선 편한 일이었다.

물론 본인 앞에선 절대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아무튼 여신관을 따라 신전 뒤쪽의 공동묘지로 향한 베오날드는 구석에 자리한 작은 무덤 앞에 섰다.

“여기입니다.”

“후우~ 이거 참~”

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편한 거지,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베오날드는 안타까워하며 세인의 모친의 무덤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 먼 곳도 아니고 기마로 2~3일 거리인데, 상인을 통해서 전갈이라도 보내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물론 자신도 대귀족이기에 귀족들이 일개 하인이나 사생아에게 그 정도 배려를 생각 못하는 게 역으로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 가문이 이상했던 거지. 벨릭스, 그 미친놈의 정책 때문에 말이야.’

상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베오날드의 가문은 상식적이지 않은 벨릭스의 정책 때문에 거리감이 있을 뿐, 귀족 가문이라는 게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아무튼 예의상 무덤에 참배를 드리고 난 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베오날드에게 처음에 만났던 남성 신관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인에 대한 기록과 정리해 둔 유품을 찾느라 늦었습니다. 여기 그녀가 차고 있던 목걸이입니다. 그리고 이건 유언장입니다. 딸아이가 오면 전해 달라고 했는데…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전하도록 하지요.”

헌금을 넉넉히 주니 서비스도 확실한 신관에게서 세인의 모친의 유품과 유언장을 전해 받은 그는 곧장 신전을 나서 영지를 떠났다.

이 영지에 대해서 착잡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일상적인 귀족 수준을 뭐라고 할 것도 없고, 지금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도 있으며 처리를 결정하는 건 자신이 할 일이 아니었다.

‘세인에게 정하게 해야겠군. 그럼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는데…….’

그러고선 알테리오에게 돌아간 그는 일단 주변의 동물들을 사냥해서 배부르게 먹이고 한숨 잔 다음 다시 거점으로 복귀했다.

도착하자마자 포로로 잡은 기사들의 상태를 보는데, 베오날드가 처음에 묶어 둔 그 상태에서 전혀 풀지 않은 듯 흘린 피와 대소변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치 주인을 맞이하는 대형견처럼 저 멀리서 풍성한 금발을 휘날리며 하이디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그래, 잘 지키고 있었구나.”

“예! 도련님이 지시한 대로 놈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무시하고!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그래, 아주 잘했다. 어차피 기사들이라서 이 정도론 죽거나 하지 않는데, 보통 사람인 줄 착각하고 인간적인 대우를 하다가 빈틈을 보이는 경우가 많거든.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다.”

베오날드의 칭찬에 하이디는 그 나이대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그러면서 눈치를 보는 듯싶었는데, 감이 빠른 베오날드는 이런 타입이 원하는 게 뭔지 빠르게 깨닫고는 슬쩍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인지 그녀는 베오날드의 손길에 아주 만족해했다.

“저, 정말…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아이일수록 애정 결핍이 심한 경우가 많지. 심성은 외양에 상관없이 성장하는데, 부모가 금방 손을 놓아 버리니까…….’

어릴 땐 똑같이 사랑받았겠지만 하이디처럼 갑자기 나이에 비해 쑥쑥 커 버릴 경우 자주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베오날드였다.

수많은 처와 첩을 자신의 곁에 둘 정도로 여성 경험이 많은 건 물론 그 아래로 자식들도 엄청 많이 거느렸기에 아버지로서의 경험도 풍부했다.

특히나 자식들을 후계자가 될 후보로만 보는 아버지인 벨릭스의 아래에서 고생한 만큼 자식들에 대한 사랑도 꽤 깊은 편이었다.

‘근데 그걸… 알테리오가 다 망쳐 버렸지. 그러고 보니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후우~ 베티아… 찰렌, 델크로스, 엡솔, 제리드… 에란트, 세이온, 요크란… 그리고…….’

“도련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표정이…….”

“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이제 본격적으로 거래해야 하니 저 기사들 꼴부터 어떻게 하자꾸나. 똥오줌에 범벅된 상태는 그래도 좀 심하니 말이다. 나도 돕지.”

오랜만에 옛 자식들 생각을 하다가 하이디의 말에 정신을 차린 베오날드는 금방 감정을 추스르고 그녀와 함께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먼저 약 1박 2일로 방치해 놔서 몰골이 말이 아닌 기사들을 대충 물고문처럼 강에 집어넣었다가 빼는 걸로 씻기고 물 정도만 마시게 했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구속한 뒤 알테리오와 함께 하이디에게 맡겨 둔 그는 홀로 캘러메인 백작가로 돌아가서 세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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