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6일 뒤, 저녁. 캘러메인 영지 경계.
메이라 부인의 집안인 로이엔 남작가의 영지는 캘러메인 영지의 성에서 말로 달려 약 2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연락을 보내고 난 뒤, 로이엔 남작의 승인을 받기 위한 기사들의 일정 조율과 준비 기간을 포함해서 아슬아슬하게 6일째 저녁이 되어서야 캘러메인 영지에 거의 도달할 수 있었다.
“이랴! 이랴! 참 나! 메이라 아가씨는 시집간 지 오래되었는데도 늘 제멋대로시군!”
“이젠 백작 부인이다, 벤트 경! 언제까지 아가씨라 부를 텐가?”
그곳으로 향하는 6마리의 기마들 중 가장 앞에 있는 두 기사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50세는 넘어 보이는 기사는 벤트 경이라 불린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을 질책하고 있었는데, 그는 기사라고 하기엔 너무나 경박한 어조를 사용하며 불평을 내뱉었다.
“아니, 아무튼 우리 아가씨는 맞잖습니까? 더구나 이렇게 갑자기 호출하는 것도 막무가내이고 말이죠. 세상에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원래 이번 주는 제 딸의 생일이 있었단 말입니다!”
“어쩌겠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드 경이 ‘중급 기사’ 한 명을 대동하라고 하지 않았나? 중급 기사 중에 유일하게 비번인 게 자네뿐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그래도 대가는 제대로 지불한다고 하지 않았나? 참게.”
“예예~ 일하고 나서 캘러메인 영지에서 선물이라도 사서 가야겠네요.”
벤트 경의 투덜거림이 끝나고, 6명의 기사들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했지만 역시 시간이 촉박했던 탓인지 이미 어두워진 상황. 하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캘러메인 성이었다. 다 와서 야숙은 싫은 건지 다들 타고 있는 말을 재촉했다.
“후우~ 이 언덕만 넘어가면 이제… 어억?”
캘러메인 성까지 이제 언덕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 벤트 경은 잘 달리던 말이 갑자기 꼬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기사라는 존재였기에 그대로 몸을 날려 착지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애마는 땅을 굴러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벤트 경! 괜찮나?”
“예,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우리 ‘데드문’이… 망할!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일에 기사들은 잠시 멈추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벤트 경은 자신의 애마가 빠르게 달리다가 앞으로 꼬꾸라지는 바람에 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비번에 출장 나온 것도 서러운데, 자신의 귀중한 애마가 완전히 쓸모없어지자 슬픔과 분노가 함께 몰려온 것이었다.
“이런 젠장! 어떻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제길! 역시 괜히 왔어! 대체 이게 무슨……!”
“벤트 경! 이걸 보게! 여기 밧줄이 매어져 있었네! 누군가가 우릴 노리고 설치한 것 같네!”
“뭐라고요? 그러면…….”
퓌이이이이이요오오오오!
자신의 말이 넘어진 것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함정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멀리서 공기를 찌르는 높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은 몬스터 토벌을 자주 가곤 했지만 위험종인 그리폰의 서식지엔 가지 않아서 마주친 적이 없는지 그 울음소리를 그저 기이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탄 말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을 잡아먹는 포식자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워워! 소울 윈드! 왜 이래? 진정해! 그냥 새의 울음소리잖아!”
“갑자기 이 녀석들이 왜 이래?”
“젠장! 왜 도망가려고 하냐고? 진정해!”
히이히히힝! 푸히히힝!
위험종급 몬스터에 대한 대처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그런지 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요동쳤고, 기사들은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난리였다.
유일하게 말이 없는 벤트 경만이 상황이 이상한 것을 느끼고는 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하는데, 순간 옆의 풀숲에서 황금빛의 줄기가 말을 진정시키는 기사들을 노리고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저, 저건? 이봐! 다들 조심해!”
“어? 어어?”
‘저건… 오러? 황금빛 오러라고?’
히이히히힝!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기사 2명은 제대로 된 대응 한번 못해 보고 그 황금빛 오러의 잔영이 지나간 순간 목이 날아갔고, 말들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도망쳤다.
벤트 경은 이를 갈면서 그 황금빛 오러의 주인을 막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 앞에 서서 푸른빛의 오러를 끌어 올리며 적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소리쳤다.
“당장 거기서 멈춰라, 이 비겁한 놈! 보아하니 오러를 두른 기사 같은데… 감히 이런 기습을!”
“더러운 일을 하러 오는 자들에게 존중해 줄 명예는 없지.”
‘뭐야?’
“으아아아아악!”
히히히히힝!
황금빛 인영의 앞을 막아서며 외친 순간, 그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와 함께 또 다른 동료의 비명 소리와 공포에 떠는 말이 도망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나 그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금세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황금빛 오러가 깃든 창을 막아 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카랄 경! 들립니까? 카랄 경! 살아 있습니까? 이 노친네야, 상황 파악 좀 해 주십쇼!”
“아! 듣고 있네! 그러니까… 메이슨, 듀럴 경은 죽었고, 마커스, 맥심은 부상! 멀쩡한 건 나와 자네뿐인 것 같네. 그리고 난 지금 그놈과 마주하고 있네. 이제 어쩌면 좋겠나? 벤트 경.”
“지금 다른 생각 할 틈이 없습니다! 이놈, 장난이 아니거든요!”
“…여기도 마찬가지일세.”
같이 있는 카랄 경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벤트 경은 아쉽지만 눈앞의 적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상대는 완전 무장을 한 기사이면서 자신보다 훨씬 큰 키와 거대한 체구에 창까지 들고 있었는데, 아주 선명한 금빛 오러를 뿜어내고 있어서 더욱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딱 봐도 속도와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타입이었지만, 아까 전에 눈으로 좇을 수 없었던 속도를 낸 것을 떠올리며 벤트 경은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탄탄하면서 절도 있는 자세와 움직임으로 ‘정통 기사’ 쪽에 가까운 타입이라는 점이었다.
“…이봐, 뭐라고 말 좀 해 보지? 딱 봐도 기사 같아 보이는데… 인사치레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
‘젠장! 대화는 필요 없다는 건가?’
황금빛 오러를 뿜어내는 기사는 말없이 달려와 벤트 경을 향해서 창을 휘둘렀다.
땅이 단순히 파이는 수준을 넘어서 갈라질 정도로 막강한 위력에 순간 놀라는 벤트 경이었다.
그러나 금방 몇 번의 합을 더 주고받자 공격의 궤도나 방식이 너무 단조롭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이 녀석… 뿜어내는 오러라든가 힘과 속도는 장난 아닌데, 왜 싸우는 법이 무슨 몬스터나 짐승 레벨? …그렇군. 이 녀석… 딱 봐도 경험 부족이야!’
벤트 경은 엄연히 15살 때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살았기에 백병전에 이골이 난 자였다.
이 기습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15년 이상 전쟁터를 구르면서 싸워 온 짬은 어디 가지 않았기에 이제 막 실전을 경험하는 하이디의 공세를 너무나 단조롭게 여길 만했다.
‘이것이… 실전?’
황금빛 오러를 두르고서 열심히 분투하던 하이디는 내심 실전은 다르다는 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베오날드가 알려 준 ‘잊힌 제국 황실 기사단의 마나 호흡법’과 마찬가지로 ‘잊힌 제국 황실 기사단의 창술’ 덕분에 자신의 능력이 상승하는 것을 느낄 정도로 성장한 하이디는 내심 중급 기사는 물론 상급 기사까지도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꽤 차 있었다.
‘예상과 너무 다르지만… 그래도 도련님을 실망시켜선 안 돼!’
더구나 이번 일은 베오날드가 자신에게 맡긴 아주 중요한 일. 여러모로 받은 베오날드의 은혜와 정에 감사를 표하는 건 물론 칭찬을 받고 싶은 그녀는 첫 기습 때는 훌륭하게 적을 쓰러뜨렸지만 지금 벤트 경과의 대치에서는 쉽게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젠장! 어떻게 상대하긴 하는데… 뭔가 치고 들어갈 약점이 보이질 않아.’
그러나 하이디에게 천만다행하게도 벤트 경의 경험이 우월해서 공격을 간파당하곤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하이디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오러의 힘과 피지컬의 차이가 넘사벽이라서 검에 푸른 오러를 실어서 휘둘러도 황금빛 오러에 튕겨 나가거나, 분명 갑옷 틈새로 검을 찔러 넣었는데 검이 들어가질 않는다든가? 전투로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이건 안 좋아. 엄밀히 말해서 도망쳐야 할 상황이야.’
십수 년간 온갖 전쟁터와 싸움터를 돈 기사로서의 냉철한 판단. 지진 않지만, 이기지 못할 적을 상대로 싸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게다가 더 화나는 것은 상대의 대처나 기량도 한 수씩 주고받을 때마다 눈에 띄게 늘고 있어서 마치 자신의 힘을 빨아먹는 것 같은 불쾌함까지 더해져 이제는 진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인 벤트 경이었다.
“좋아, 이걸로 정리는 끝. 현장 정리하고 있을 테니 그 녀석 마무리해라.”
‘젠장! 노친네가 졌어? 이렇게 되면…….’
믿고 있던 동료까지 패배한 것을 눈치챈 벤트 경. 결국 적에게 포위당한 꼴인 그는 하이디의 공세를 막으면서 다른 방향으로 도망칠 길을 찾아보았다.
그나마 천운이 따르는 건지, 자신이 상대하지 않은 다른 놈은 태연하게 시체에서 소지품을 꺼내고, 제압한 기사들을 구속하는 데 온 신경이 팔려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더 이상 생각할 게 없었다.
‘일단은 도망치고 보자! 캘러메인 영지가 눈앞이니까 금방… 이렇게!’
터어어엉!
빈틈 속에서 찾아온 기회를 노리고 오러를 최대한 끌어 올려 하이디를 발로 차서 밀어 버린 그는 전력으로 베오날드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눈앞의 하이디보단 저쪽이 그래도 약하니까 자신이 아닌 하급 기사들을 상대한 거라 생각한 벤트 경. 그 추측은 나름 합리성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베오날드가 아직은 하이디보다 더 강한 검사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으음… 멍청하진 않군.’
‘좋았어. 아무 대응을 하지 않는…….’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칠식(七式)-붐슬랭’.
퍼억!
자신이 달려오는 것을 전혀 눈치 못 챈 듯 가만히 있는 베오날드의 모습에 벤트 경은 비켜 갈 수 있다고 좋아했지만, 다리와 옆구리로 아주 익숙한 날붙이에 베이는 고통이 느껴지면서 그대로 땅에 쓰러졌다.
‘노이멀 칠식–붐슬랭’.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베는 신속의 사냥꾼.
쓰러지는 벤트 경은 처음엔 눈치 못 챘지만 간신히 보랏빛 오러의 궤적이 가루처럼 흩어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이 베오날드의 짓임을 깨달았다.
“이, 이게 무슨…….”
“…역시 도련님!”
“으음~ 좀 더 네 기량을 올리고 싶었는데… 뭐,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테니까 여기까지 할까? 이 녀석들을 구속해라. 참고로 기사들이니까 인간의 기준보다 더 강하게 해야 하는 거 잊지 마라. 하급 기사는 그나마 몬스터를 구속하는 수준이면 되는데, 중급 기사 이상은 이 정도로 힘줄을 끊어서 출혈을 만들어 놔야 힘이 빠지니까 잘 알아 둬라.”
여유롭게 다가온 베오날드는 쓰러진 벤트 경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교육용 견본을 보여 주듯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벤트 경은 다시 일어나려고 발악하지만 정말로 다리가 말을 안 들었고, 옆구리에서 피가 상상 이상으로 흘러나와 싸울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젠장… 까딱 정신을 놓으면 진짜 죽겠는걸?’
“자, 그럼 포로가 된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님들에게 전합니다. 네 분 모두 몸값을 받기 위해서 포로로 대우할 생각이지만, 도망치려 하거나 구속을 풀려고 할 시엔 그 즉시 처형, 물론 다들 부상을 입으셔서 그게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이죠. 아무튼 그런 우려가 있기에 협상이 완료되기까진 제대로 된 치료는 없습니다. 그러니 엄살 피우거나 아픈 척하진 마세요. 기사 분들이 쉽게 안 죽는 건 저희가 더 잘 아니까요.”
“…오오…….”
“몸값은 빚이 되겠지만, 그래도 여러분은 고급 인력이라서 살아만 계시면 뭐든 할 수 있잖아요. 아내, 자식이 있는 분도 있을 거고, 괜히 명예도 없는 이런 곳에서 죽는 걸 택하는 어리석은 분은 없길 바랍니다.”
제압도 제압이었지만, 완벽한 베오날드의 언변에 로이엔 남작가의 기사들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저항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렇게 기사들을 미리 마련해 둔 숲속 거점에 가두어 놓고 하이디에게 감시를 맡긴 베오날드는 알테리오를 몰고 곧장 세인의 모친이 있는 로이엔 남작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