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베오날드가 강에서 알테리오를 씻긴 뒤 저택 내로 돌아오자마자 세인은 시중드는 척을 하면서 그를 보필했다.
하나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거의 호위 무사처럼 계속 붙어 있는 하이디는 물론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까지 베오날드에게 달라붙어서 징징거리는지라 말을 꺼내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도련님! 부탁입니다. 제게도! 제게도 도련님이 가지신 무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니, 너는 말데로브 경의 후계자라서……. 엄연히 남의 무가 사람이라 곤란하다.”
“하지만 그건 하이디 양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이디 양은 아예 그쪽 가주인 젤커드 자작이 나에게 맡긴다고 했으니까 다르지. 에라솔, 말데로브 경은 너보고 나를 도우라고 했지, 나에게 널 기사로서 키우라곤 하지 않았다. 특히나 나는 아직 기사 서임도 받지 않아서 정식으로 널 종자로 삼을 수도 없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련님?”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중요한 내용인 건지 웅성웅성 대면서 이야기가 꽤 길어졌다.
세인의 관점에서 보면 베오날드의 옆에 있자마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기량이 상승한 하이디 양을 보고 무언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 에라솔이 그것을 알려 달라고 베오날드를 조르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의 아들. 엄연히 독립적인 무가의 아들이었기에 함부로 손대거나 가르쳐 줄 순 없었다.
당연히 에라솔은 가문의 비전이나 무예를 배웠을 텐데, 접근만 해도 그것을 훔치려 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고, 그것은 말데로브 경을 적대한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음, 방법은 일단 내가 말데로브 경의 제자로 들어간 다음 널 받아들이는 방식을 쓰든가, 아예 네가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없애 버려야 하는데……. 둘 다 불가능한 방법이지 않나.”
“…….”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너라면 지금은 조금 늦는 것처럼 보여도 부친이 준 가르침을 착실하게 수행한다면 분명 어느 경지까진 반드시 도달할 게다. 혈통과 노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마다 가진 재능이라는 게 다를 뿐이지.”
말데로브 경의 가문에 대한 모독이나 비방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쓰면서 설득하는 베오날드였다.
하나 에라솔의 입장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기사인 말데로브 경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엄청난 기대와 압박 속에 살았는데 옆에서 갑자기 미친 속도로, 기사의 경지도 모자라서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는 하이디를 보자니 더욱 조급함이 생긴 것이리라.
“애초에 내 방법으로 배운다고 한들 될 거라는 보장도 없다. 하이디 양은 젤커드 자작에게서 배우긴 했지만 기초 중의 기초로 토대만 만든 정도라서 적용이 되었던 거지만, 자넨 가문의 비전을 모두 배우고 실천하지 않았나?”
“저는 그… 토대조차 없습니다.”
“거기에 다른 문제로도… 곤란해지는 게 너무 많아서 무리일세. 나는 안 그래도 가문 내에서 문제아로 찍혀 있어서 말이지. 정말 미안하네.”
결국 허리를 숙여서 정중히 사과하는 베오날드였기에 에라솔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베오날드의 옆을 따라가는 하이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이 폭풍이 끝나서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 세인은 베오날드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베오날드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으음? 뭐지? 세인,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도련님. 메이라 마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거…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군.”
메이라 부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베오날드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리고 세인은 드디어 그녀가 백작의 승인을 받아서 칼을 뽑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일주일 내로 그녀의 본가에서 기사들이 지원 올 것이라는 정보까지 모조리 전했다.
이제 완벽히 주사위는 던져진 셈.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베오날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상입니다.”
“음, 역시 틈을 안 내 주니까 결국 폭발한 건가? 그래서 테알 슬럼가의 일을 실패한 것처럼 속였는데……. 뭐, 그것도 내 생각대로 흐르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으으음… 기사라. 나랑 하이디를 예상해 둔다면 둘… 넷… 여섯 정도인가? 그리고 일주일…….”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며 계산을 하는 베오날드.
자신을 죽이는 것만이면 몰라도 하이디까지 기사급 전력으로 인식했고, 제드 경이 중급 기사이니, 중급 기사 한 명을 더 추가하고 하급 기사들로 채운다고 하면 못해도 지원은 총 6명이 올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세인은 ‘역시 베오날드 도련님은 머리 회전이 빠르구나.’ 하고 감탄하는 동시에 그에게 말했다.
“예. 그 안에 무언가를 하셔야…….”
“아니, 이 좋은 기회를 버릴 순 없지. 하이디, 일주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보자… 남은 5일간 거점에서 수련하고 실전 준비를 하도록.”
세인은 베오날드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녀가 메이라 부인의 계획을 알려 준 건 지원 기사들이 오기 전에 먼저 움직이라는 뜻에서였는데, 베오날드는 오히려 그 기사들을 처리할 계획을 짜는 게 기묘했기 때문이다.
제드 경을 포함해서 기사 여섯이 더 추가가 되는데, 산술적으로 2명이서 이길 가능성은 적은 게 아닌가 싶었지만, 하이디조차도 신나하는 모습에 그녀의 혼란만 더 커졌다.
“보자. 메이라 부인의 본가가… 확실히 로이엔 남작가였나? 기사 여섯 다 죽으면 상당히 타격이 크겠군. 인질을 잡을까?”
“그…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 나도 같이 갈 거니 무리는 아닐…….”
“저, 저기, 도련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베오날드는 이 기회에 하이디에게 아주 적절한 실전 경험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세인이 말을 걸자 순간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또 빼먹은 정보가 있나 싶어서 일단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부디 저의 어머니를 구해 주십시오. 현재 로이엔 남작가 본가에 계시는데, 이대로 베오날드 도련님이 남작가의 기사들을 처리해서 메이라 마님의 심기가 흐트러지게 되면… 저를 벌하는 건 물론이고, 어머님도 위험해집니다.”
“으음, 그런 사정이 있었군. 하긴 그런 약점을 쥐고 있어야 내 옆에 안심하고 붙여 놓을 수 있었겠지.”
“혹시 제가… 마님 측 사람이라는 걸 짐작하고 계셨습니까?”
“아니, 딱히 짐작하진 않았어도 애초부터 이 집안의 모든 인물을 경계하고 있었다. 우리 귀여운 알테리오와 확실히 충성을 확인한 하이디를 제외하면 말이지.”
“아…….”
경계 대상이라는 것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태연히 말하는 베오날드의 태도에 오히려 설득이 되는 그녀였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눈을 굴리면서 계산하더니 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모친을 구해 달라는 거지? 그러면 빼 와서 맡겨야 할 곳이 있어야겠군. 젤커드 자작이 있어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우리 은신처에 데려와서 돌볼 사람을 붙여야 했겠지.”
“맡아 주시는 겁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인질이 있음에도 배신하고 부탁하는 걸 보면 이미 결단이 섰다는 이야기 아닌가? 다만 시간도 시간이고, 우리 사람 수가 부족하니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만 기꺼이 하지. 그러니 세인, 너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걸 들키지 않게 평소처럼 지내고 있어라. 혹시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에게 말해서 보호해 달라고 하고.”
“아… 예!”
스스로가 이야기했지만 너무나 손쉬울 정도로 베오날드는 자신의 모친을 구해 주겠다고 말하고는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하이디와 함께 메이라 부인의 역습에 대응할 준비를 위해 곧장 움직였고, 특히 방금 전 보냈던 에라솔을 다시 불러서 그에게 세인의 보호를 요청했다.
“그… 그리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이군. 하긴 방금 전 그렇게 거절을 때려 놓고는 일을 시키니 당연하겠지만… 흐음~’
타닥탁탁…….
베오날드는 빠르게 두뇌로 주판을 굴렸다.
이대로 부탁한 채로 놔두어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혹시라도 세인의 안전을 확보하지 않거나 감정에 휩쓸려 허술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자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의 안전이 확보만 된다면… 본래라면 비밀로 해야 하지만, 기사가 되는 데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는 도움을 하나 주도록 하지. 검술, 마나 호흡법의 정보와 관계없지만 보장할 수 있다.”
“…정말이십니까?”
“여신과 캘러메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아, 알겠습니다! 반드시 지켜 내겠습니다.”
단숨에 바뀌는 태도와 반응에 조금은 속물 같아서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맥에 대한 것을 알리긴 아까웠지만 그래도 세인은 지금 상황에서 절대 잃을 수 없는 카드였기에 그는 속으로 아쉬움을 달래면서 하이디와 함께 단련실로 향했다.
그러던 중 하이디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도련님, 그 세인이라는 메이드에게 너무 공을 들이시는 게 아니신지요. 정보를 제공해 준 건 고맙지만, 그래도 에라솔 도련님에게 저렇게까지 확답을 받아야 할 정도인가 생각하면 의문이 들긴 합니다만…….”
“음? 아, 물론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지.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자질과 의지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생각해 봐라. 그녀는 엄연히 메이라 부인의 밑에서 가족을 인질로 잡혀 협박과 폭력으로 길들여지고 있었지. 그런 상황에서 확실하게 성사되지도 않을 부탁과 함께, 승산이 계산되지 않는 내 쪽에 붙는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나?”
“어… 확실히… 어렵겠군요. 그보다 그녀가 폭력을 당하는 건 어떻게 눈치채셨습니까?”
“왜 눈치를 못 채겠나? 날 돌볼 때마다 상처에 바르는 약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을 하고 움직임도 다른데……. 물론 자세한 사정은 모르기에 아무 말 안 하고 지켜보았지만, 모르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다른 걸로 의심하는 것도 한두 번. 귀족가의 경우 하인들과 사용인, 노예들에게 폭력과 체벌로 규율을 유지하는 일은 그리 낯선 것도 아니었다. 참견할 사안인지 아닌지는 몰랐기에 따로 나설 수 없던 것뿐.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밝힌 시점에서 그 체벌의 원인과 결과를 완벽히 알아차렸기에 이젠 막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참, 메이라 부인도 어이가 없지. 그 정도 담력과 의지를 가진 인재를 그따위로 취급하다니……. 아무튼 내 기준에선 충분히 이 정도 수고와 대가를 지불할 인물이니 데려오려는 거다.”
“그렇… 습니까?”
“왜 그런 반응이지? 아~! 오해는 하지 말게. 나는 본인이 스스로 다가오지 않는 이상 강제로 소유하려는 생각은 없으니까. 물론 그녀도 매력이 있으니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은 할 거고, 내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온다면 거부할 이유는 없지만 말이지.”
“…예, 그러시군요.”
‘시대가 바뀌고, 500년 후가 지나도 여자의 마음은 여전히 같군.’
대놓고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세인에 대해서 질투하는 게 딱 보이는 하이디의 반응이 귀엽게 느껴지는 베오날드였다.
체구는 크면서도 그런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에 베오날드는 미소를 지었고, 그녀와 함께 세인을 완벽히 얻기 위한 작전과 훈련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알테리오의 무장을 만드는 것과 사냥을 핑계로 밖으로 나가서 거점의 물자를 보충, 일주일이 되기 전 할 수 있는 대비는 물론 메이라 부인을 처리하고 차후 교섭과 이 캘러메인 백작가를 어떻게 할지 이리저리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