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래서 이렇게 베오날드에게 변장을 시킨 겁니다, 아버님. 오해하신 겁니다.”
“오해? 설사 네 의도가 그렇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은 어떻겠느냐? 랄트가 도망치자마자! 랄트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려 한다고 생각할 게다! 차라리 그 일들을 네가 다 했어야지!”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시간이 뭐가 문제인가! 하여간 성미만 급해 가지고! 아무튼! 이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 당장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를 처분해야 한다.”
“아버님!”
백작의 노성에 렌겔 가주 대리는 반박했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되자 백작은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곤 하더라도 렌겔 가주가 저지른 짓은 백작의 말대로 랄트의 존재를 대체해 버릴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더러운 피를 가진 놈이 이젠 랄트의 이름과 신분까지 뺏어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백작은 소름이 돋았다.
그렇기에 백작은 역정을 내면서 베오날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렌겔은 그거까진 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버님의 우려는 압니다만, 그만한 인재는 구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혈족 아닙니까?”
“그 정도나 되면 혈족인 게 오히려 재앙이다. 너무 뛰어나서 탈이야! 이미 공을 세워서 문제인 걸 보지 않았더냐? 당장 처분해 버려라.”
“지금 상태로는 처분도 쉽지 않습니다.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은 그렇다 쳐도, 젤커드 자작의 딸이 가신으로 붙어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그 아이는 어느새 기사입니다.”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하겠다. 메이라 그 아이와 같이 말이다. 너는 그저 우릴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알았느냐?”
“…예, 알겠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이건 엄연히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로 인해 아버지의 분노를 부른 것이었기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더는 말릴 수 없었던 렌겔 가주 대리는 방해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베오날드에게 위협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보를 마친 캘러메인 백작은 곧장 랄트의 모친인 메이라 부인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베오날드를 처리할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현재 그녀는 두문불출인 아들을 걱정하느라 다른 일에 손대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그이가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래, 아주 제정신이 아니지. 이대론 우리의 고귀한 혈통이 더럽혀지게 된다. 렌겔 그놈이 또 무슨 수작을 벌이기 전에 처분해야 해.”
“아버님은 정말로 현명하시군요. 당연히 그래야죠. 제게 맡겨 주십시오. 며칠 안에 놈을 차디찬 시체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후후훗……!”
이제 이 가문의 주인인 백작의 승인이 난 이상 메이라 부인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방 안에 틀어박힌 랄트는 베오날드를 처리하면 나올 것이기에 그를 처리할 방안을 만들기 위해 속히 자신의 수하들을 불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제드 경과 베오날드의 전속 메이드로 붙인 세인이 그녀의 방으로 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드디어 벼르고 벼르던 그 잡종을 처리할 때가 온 것 같다. 놈은 지금 무얼 하고 있지?”
“다시 그리폰의 무장을 만드는 거랑… 슬슬 기승 훈련을 시작하더군요. 오늘부터 훈련 장비를 차고서 기마들의 훈련 코스를 돈다고 했습니다. 아마~ 가문의 기사들이 감탄할 거라 생각됩니다.”
‘기사(騎士)’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뜻처럼 기사들에게 있어 ‘말’은 전장을 함께 달리는 동료이자 자신의 반신 혹은 연인에 비견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거대하고 튼튼한 군마의 존재는 기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일반 군마를 능가하는 위험종 몬스터를 타고 전장을 달리는 건 거의 동화나 전설에서나 듣던 이야기였다.
한데 그것을 실제로 보여 준다면 부러움은 물론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야말로 기사의 로망이군요. 저조차 보고 싶어지네요. 직접 타진 않아도 같이 전장을 달릴 거라고 생각하면… 흐음…….”
“제드 경!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크흠, 죄송합니다. 사실… 그건 모든 기사의 로망인지라, 어쩔 수 없는 거라서 말이죠.”
“하여간 이 답답이!”
제드 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메이라 부인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쳤다.
제드 경. 메이라 부인의 본가에서 따라왔으며 지금도 그녀를 따르는 기사로, 본 실력은 아무도 모르지만 소문에 의하면 아주 젊은 나이에 ‘중급 기사’에 도달했으며 수많은 귀족들에게서 영입을 제안받았지만 그녀의 옛 가문에서부터 메이라 부인만을 섬겼고, 지금까지 따라온 충절로 유명한 기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온갖 더러운 일을 맡는 해결사이기도 했다.
“아무튼 백작님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복잡한 방법은 필요 없습니다. 암살이든 독살이든 뭐로든 해도 된다는 거지요. 제드 경, 늘 하던 대로 깨끗하게 처리하세요.”
“그러고 싶습니다만 마님, 이번엔 평소처럼 혼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놈에게 성가신 자가 붙어 있습니다.”
“성가신 자? 말데로브 경의 아들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쪽은 순진한 청년이니 제압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다른 쪽, 마치 맹견처럼 붙어 있는 그 젤커드 자작의 딸인 하이디입니다. 그 여자, 올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기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또 무슨 소리죠? 기사가 되었다니?”
메이라 부인 또한 썩어도 귀족가의 여식. 가문의 핵심 전력이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초인인 기사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마나 호흡법부터 시작해서 특수한 재능이 받쳐 주어야만 될 수 있는 것이 기사로,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이 직접 가르친 아들도 현재 기사가 되지 못해서 종자로 일하고 있을 정도인데, 젤커드 자작의 딸이 ‘기사가 되었다.’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요? 잘못 안 건 아니겠죠? 아니면 감춰져 있던 게 드러난 건가요?”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사실입니다. 이 저택에 왔을 땐 마나 호흡법을 한 흔적이 있었지만 ‘코어’가 생성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코어’가 만들어지고 기량이 눈에 띄게 올라가서는 무시무시해졌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제가 하고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요인이 베오날드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면 베오날드 도련님도 기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대체 그 잡종은… 한계가 어디까지인 거지? 신도 무심하시지! 우리 랄트에게 그런 재능을 내려 주셔야지! 어떻게 그런 잡종에게!”
빠드득!
분에 못 이겨서 이를 가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메이라 부인의 베오날드에 대한 분노는 점점 커져 갔다.
잡종 주제에 예법 등 귀족적 재능을 비롯해서 오만 것들이 뛰어난 것도 못 참겠는데, 이젠 기사까지? 혈통 빼고는 마치 하늘이 내린 것 같은 대귀족의 그릇이라는 것을 떠올릴수록 질투와 열등감이 커질 따름이었고, 더더욱 비교되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베오날드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증폭되었다.
“역시 오자마자 없앴어야 했어! 무리해서라도!”
‘마님이 드디어 칼을 뽑으시려는구나. 그리고 도련님이 기사라……. 후우~’
그것을 보면서 세인은 드디어 자신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짐작했다.
일단 그녀는 메이라 부인의 집안에 속한 자로서 베오날드 쪽에 붙어 스파이 일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적인 면모라든가 인물적인 면모에서 베오날드 쪽에 좀 더 마음이 기우는 것이 사실이었다.
‘마음은 베오날드 님을 따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도면 베오날드 도련님이 뛰어나며 더 상냥하고 매력적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따르는 것에 적극적일 수 없는 게, 한번 선택을 하게 되면 되돌릴 수 없게 되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 현재 메이라 부인의 본가에 있는 모친의 목숨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녀는 메이라 부인 측의 전력을 너무나 잘 아는 반면 상대적으로 베오날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도 했고, 또 개인과 집단의 대결이 얼마나 허망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오날드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모습을 여러 번 보여도 긴가민가하면서 고뇌하고 있었는데, 이젠 진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어쩌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고민이자 도박. 베오날드 도련님에게 도움이 될 것이냐? 아니면 메이라 부인을 끝까지 따라서 베오날드를 처치할 것이냐?
물론 그냥 제삼자의 입장에서 단순한 장기짝이 되어 아무 쪽에도 협력하지 않고 그저 상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떤 경우에도 최악의 선택지나 다름없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 누가 이겨도 아무런 득이 없이 위험부담만 생겨.’
제삼자로서 방관하게 되면 메이라 부인 측이 이기든 베오날드 도련님이 이기든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메이라 부인이 패배하고 그것이 그녀의 본가에 영향을 끼치면 모친의 생명에 위험이 생길 것이고, 베오날드 도련님이 패배해서 죽는다면 자신은 메이라 부인에 의해서 또 다른 암투를 위해 장기짝으로 다뤄지는 미래뿐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도련님을 섬기고 싶어.’
일단 마음으로는 베오날드 도련님을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 그녀다.
외모와 품격, 지성 모두 압도적인 매력이지만, 일개 메이드인 자신을 존중해 주는 상냥한 면도 끌릴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하지만 무서워. 마님을 거역하면……!’
반대로 메이라 부인이 무서운 것도 사실이다.
모친의 목숨 줄을 잡고 있는 점도 문제였지만, 그것 외에도 폭력과 공포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선뜻 베오날드를 따르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또 베오날드 측에 붙는다고 해도 자신이 도련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느 정도 가치나 메리트가 있어야 그분도 자신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모친을 구해 줄 텐데… 자신이 그분에게 바칠 것도 있어야만 했다.
‘…결정적인 무언가가!’
“흐음, 아무튼 그 잡종이 상당한 무력이 있으니 다소 준비가 필요하겠군요. 제드 경,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십시오. 입막음도 필요한 일이고, 또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진행해야 하니… 본가 쪽에서 기사와 병사들을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칼을 뽑기로 한 이상 제대로 뽑으려는 듯, 메이라 부인의 본가에서까지 사람을 불러오려는 것에 세인은 드디어 핵심적인 정보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이 정보가 들어간다면 일주일의 시간, 그 지원이 없는 사이에 베오날드 도련님이 역습을 하게 되면 승산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메이라 부인이 역습으로 죽는다면 그녀의 본가에 있는 자신의 모친이 위험해지게 되는데……. 여기서 또 걱정이 되지만, 승부를 보려면 지금뿐이었다.
‘…지금 이 정보를 얻은 순간이 가장 비싸게 그분과 거래할 수 있는 타이밍!’
세인은 그렇게 메이라 부인의 지시를 들은 다음 방을 나와 베오날드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동안 저택 입구에서 기다리자, 베오날드가 가문 내 기사들의 부러움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그리폰인 알테리오를 탄 채로 저택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고고하면서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리폰이 비록 한쪽밖에 없는 날개였지만 그것을 펼친 채 돌아오는 모습은 정말로 동화나 전설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휴우~ 수고했다, 알테리오. 오? 세인 아닌가? 마중 나온 건가? 마침 잘됐군. 이 녀석이랑 같이 씻어야 하니까… 비누 하나만 줄 수 있겠나?”
“예, 도련님.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을 그대로 담아 둔 광경과 베오날드의 상냥한 미소에 세인의 결단은 한 번 더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그가 지시한 대로 비누를 가져다주고는 돌아오는 대로 메이라 부인의 계략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