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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47화 (47/259)

[47화]

폭주의 대가로 랄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숙면에 들어갔고, 그러면서 결국 그가 하던 모든 일은 스톱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시각, 알테리오의 갑주를 설계하기 위해 치수를 재고 나무를 다듬던 베오날드는 사전 설명 없이 자신을 부르는 가주 대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그리로 향했다.

“부르셨습니까? 가주 대리님.”

“그래, 왔느냐? 후우~ 오는 동안 혹시 이야기를 들었나?”

“아뇨. 그저 오라고만 하더군요.”

“다행이군. 혹시라도 허튼소리를 했다면 목을 쳐야 했을 테니.”

“가문의 명예에 문제가 되는 건가 보군요.”

끄덕.

통찰력이 들어간 베오날드의 대답에 렌겔 가주 대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했다.

그의 말대로 백작가의 정식 후계자인 랄트가 일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 가문의 명예에 금이 가는 것이었기에 전달하는 하인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해 둔 상황이었다.

만약 입을 함부로 놀렸다면 그 하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그렇지. 아무튼 요점만 말하자면 랄트가 결국… 폭발해 버렸다. 일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질 않고 있지. 그 아이가 맡았던 영지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말이야.”

“측근으로 두고 계신 귀족이나 가신에게 맡기시면 안 됩니까?”

“물론 배분할 수 있는 건 배분했다. 하지만 가문의 혈족이 맡아야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렇군요. 즉시 맡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연유를 잘 아는지라 베오날드는 더 의문을 표하지 않고 렌겔 가주 대리에게 해야 할 일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의 책상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베오날드에게 건네주었다.

꺼낸 것은 바로 금발 머리칼로 된 가발과 장식이 많이 달린 새하얀 고급 옷으로,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이었다.

“이건 랄트 도련님의?”

“그래, 녀석이 주로 입는 것과 같은 것이지. 가발은 알다시피 녀석의 머리색과 같은 색이고…….”

“변장이라. 흐음~ 재미있는 걸 생각하시는군요, 가주 대리님.”

“정말 미안한 제안이 되겠지만 부디 이해해 주거라. 테알 슬럼가의 일은 너무 상상 밖이었어. 이 이상 너의 위상이 올라서는 안 되거든.”

이미 시작부터 베오날드와 랄트의 위상 차이는 심각했는데, 테알 슬럼가의 일로 더 벌어진 것도 모자라서 지금 랄트가 일에서 도망쳤다고 하면 사람들은 앞으로 당연히 캘러메인 영지의 주인감은 베오날드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아예 랄트 본인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에 절망하는 것은 물론이고, 메이라 부인 측과 그 파벌들의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게 된다는 계산이 나오기에 렌겔 가주 대리는 부득이하게 베오날드에게 랄트의 대리 역을 맡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저는 테알 슬럼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패했습니다.”

“하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르다. 오히려 거기서 부정한 게 더 큰 반향을 일으켰지. 의심의 그림자가… 생겨 버렸으니 말이야.”

‘으음, 그게 역효과였나?’

“아무튼 이런 부탁을 할 수밖에 없어서 정말 미안하구나.”

가주 대리로서 가문의 평화와 집안의 안정을 생각한다면 이게 최선이었다.

그 또한 베오날드가 만약 지금 이대로 가문을 잇게 되면 하위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한바탕 큰 다툼이나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었기에 베오날드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주는 걸 고려하더라도 너무 빨리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솔직하게 머리를 숙이며 사죄까지 하는 렌겔 가주 대리였다.

베오날드는 그 뜻을 이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순순히 승낙해 주기엔 좀 그랬기에 대가를 받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건 둘째 쳐도… 사람인 이상 일을 했으면 대가를 받아야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지.”

“게다가 본래 얻어야 할 명성과 업적을 고스란히 남에게 넘겨야 한다면 당연히 그만큼의 대가도 추가되어야 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 대가로… 뭘 원하느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돈입니다. 금화로 주십시오. 아주 많이 말이죠. 그러면 이 베오날드, 랄트 도련님의 이름과 모습으로 훌륭히 일을 해내도록 하지요.”

어차피 기왕 일을 하는 것이니 만큼 실리적인 것을 얻겠다고 생각한 베오날드였다.

수전노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연금술을 시도할 수 있는 거점을 얻은 만큼 다양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선 ‘돈’이 많이 필요했기에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이라는 대가는 워낙 교환성이 높아서 다른 목적을 떠올릴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돈이라……. 그걸로 뭘 할 생각이지? 잘못되면 영지를 도망칠 자금이라도 필요한 건가? 아니면…….’

베오날드가 ‘돈’을 요구해도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떠올릴 수 없었고, 또 행여나 물어본다고 한들 핑곗거리는 넘쳐흘렀기에 렌겔 가주 대리는 그의 목적을 짐작하는 게 불분명했다.

그렇다고 그의 요구를 거절하기엔 지금 랄트가 쌓아 둔 일과 상황이 너무 급박한 것도 사실.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만 했다.

“…좋다. 다만 확실하게 해결한 일에 한해서 보수를 넉넉하게 지급하겠다.”

“그거면 됩니다. 그러면 어디… 옷부터 갈아입겠습니다.”

“사이즈는 걱정 마라. 이미 맞춰 놓았다. 그리고 변장이 의미 없을 만큼 너와 랄트의 외모 차이는 크지만 그 부분은 다들 대충 넘어가게 하라고 전해라. 집사들에게도 전해 놓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렇게 베오날드는 랄트를 대신해서 일을 맡았고, 밖에서 기다리는 하이디에겐 자율 단련을 맡긴 다음 대기하고 있는 집사들과 함께 랄트의 서류 뭉치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쓰던 회의실에 앉아 랄트가 아닌데 랄트의 분장을 한 자신을 이상하게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해서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 깊게 신경 쓰지 말게. 나는 지금 랄트 도련님일세.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런 걸로 취급해 주게나~ 렌겔 가주 대리님과 협의된 사항이며 지금은 가문의 일이 중요하니까. 아무튼 일이 많을 테니 사사로운 건 신경 쓰지 말게.”

“예, 예! 알겠습니다.”

“외부로 나서는 일은 오후에 나갈 때 한 번에 할 테니, 그 전에 일단 급한 사항들부터 주게. 그리고 집사 제군들, 자네들은 내가 각자 전하는 일을 준 곳으로 가서 3시간마다 한 번씩 돌아와 나에게 상황을 보고해 주게. 시간은 금이니 철저히 지키게. 그리고 가문과 면담이 필요한 사람들은 모조리 저택으로 불러 주게. 그다음엔…….”

베노피스 영지와 황제를 대신해서 국정을 다스리던 대귀족의 경력이 어디 가지 않는다고, 단숨에 사람들을 휘어잡고 자신에게 부여된 인력을 배치, 일의 우선도부터 가려 급한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시키면서 거침없이 업무들을 처리해 나갔다.

‘성 외벽 공사의 석재 공급이 문제인가? 으음, 수요와 공급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여기가 이 주변 영지들의 상권 중심이라서 물건들이 모여야 정상이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물량을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석재를 취급하는 상인이나 영지들 간의 담합이 있다는 거군.’

“베오날드 님?”

“말데로브 경에게 병사들을 일부 이끌고, 석재를 공급하는 상인이 운영하는 채석장으로 가 보라고 전해 주게. 무리해서 갈 필요는 없고, 순찰 루트나 훈련 루트에서 조금 꼬아서 가면 충분하다고 전하게. 그리고 다른 행위는 하지 말고, 생산된 석재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만 보고 오면 된다고 하게.”

“예.”

“그리고 말데로브 경이 돌아오는 즉시 이 서찰을 전해 주게.”

“…아, 알겠습니다. 그… 베오날드 도련… 이 아니라! 랄트 도련님.”

‘옛날이나 지금이나 계약 가지고 장난치는 건 똑같고, 해결 방법도 똑같지.’

깡패나 양아치 같은 방법일 수 있지만, 군사력을 가진 영주의 힘은 결국 무력이다.

캘러메인 백작가의 핵심은 역시 말데로브 경. 어차피 성의 외벽 공사라면 결국 군사적, 전략적 문제였기에 기사와 군대를 투입시킬 명분도 충분했다.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을 보내서 해당 상인이 운영하는 채석장의 상황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세만 취해도 그 상인은 자신이 석재 가격을 가지고 장난치려 한 것을 들킨 걸 깨달아서 공급을 다시 원래대로 돌릴 것이다.

만약 조금 간이 두둑해서 그런 상황에서도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면?

그 상인에겐 석재 가격을 올려 준다는 떡밥을 던져서 영지에 부른 다음 그의 아랫급이 되는 다른 석재상과 손잡고 놈을 죽인 뒤 적절한 죄목을 붙여서 그의 채석장과 상회를 접수해 버리고 석재 공급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계약서를 새로이 갱신하면 그만이다.

“가능하면 첫 수에 해결되었으면 좋겠군. 두 번째 수로 가면… 손쓸 게 많아질 테니. 이거랑 이건 젤커드 자작, 이건 델마인 남작에게 보내 주게. 그리고… 보자. 이게 다 재판인가? 참 나~ 다 평민들의 것뿐이군. 후계자이니 만큼 역시 어려운 재판은 모두 아버님이 가져갔겠지. 그러면 어렵지 않지.”

어차피 평민들의 범죄 수준은 거기에서 거기인 만큼 죄목별로 분류한 다음 베오날드는 묶음 위에다 처분을 써 넣는 것으로 해결한다.

절도는 피해액의 10배에 해당하는 손해 배상. 만약 돈이 없을 시엔 영지 노역으로 노동 액수를 계산해서 보상하는 것으로 몰아 버렸고, 폭행 및 상해 치사는 치료비 및 배상금을 변상하지 않으면 가문의 노예로 사들이고 판매 금액은 피해자에게 보상… 등등, 당 시대의 상식적인 기준에 의해서 처리를 배분하는데, 놀란 집사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와 반발했다.

“저, 저기, 잠시만 도련님, 이 안에는 유력 상인 가문의 자제도 있습니다만… 그, 선처를 요구한다는 그 상인의 목소리도 그렇고… 엄청난 액수의 뇌물이…….”

“…남의 집에 상회 패거리들을 끌고 가서 일가족을 강간한 놈에게 선처? 영지의 백성을 해칠 수 있는 건 우리 귀족뿐일세. 이건 귀족의 권위와 재산을 건드린 행위. 그 상인 놈 아들과 패거리 놈들 모두 ‘거세’한 뒤 알몸으로 칼을 씌워 죽을 때까지 저잣거리에다 세워 두라고 전해라. 그리고 그 뇌물은 모조리 돌려보내라.”

보통의 귀족이라면 유력 상인 가문과의 원활한 관계를 위해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겠지만, 베오날드는 이런 문제에 있어선 가차 없었다.

영지란 귀족의 정원이며, 백성은 그 정원에 사는 벌레 혹은 식물들이다.

그것들을 돌보아 정원을 아름답게 번영시키는 것이야말로 귀족의 의무이며, 그것을 방해하거나 권리를 침범하는 건 ‘귀족’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오나 고작 아무것도 아닌 양민 몇 명 때문에 상회를 적대하는 건 손익이……. 차라리 뇌물을 받고 그것으로 보상을 하는 게…….”

“‘돈’은 중요한 것이 맞지. 하지만 때론 돈으로 거래해선 안 되는 것이 있네. 그것은 바로 귀족의 권위와 정의이지. 한두 푼의 뇌물에 혹해서 남이 내 정원의 꽃과 벌레들을 짓밟는 걸 허락하게 둔다면 그 정원이 무사하겠는가? 당장 그리하고, 도시 전체에 공표하게.”

“아, 알겠습니다.”

원래 캘러메인 백작가의 방식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베오날드는 맡은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자신의 방식으로 빠르게 일 처리를 해 나갔다.

그러자 소화 불량처럼 쌓여 있던 일은 마치 소화제를 사용한 것처럼 빠르게 해결되었고, 대부분의 주요 업무는 처리되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날이 지나고 아침 식사 후, 렌겔 가주 대리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베오날드는 어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하고 그에게 대가를 받기 위해 서 있었다.

“사후 확인이 몇 가지 필요하지만 우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으음, 좀 과격한 점이 보이는구나. 이 상인 가문의 자제를 ‘거세형’ 시킨 건 좀 심해 보인다만? 적절한 금액의 배상을 받으면 좋았을 것을…….”

“영지민과 백성에게 손댈 수 있는 건 귀족뿐입니다. 다른 귀족이라면 적절한 금액의 배상을 받고 끝냈을 수 있습니다만, 고작 상인 나부랭이가 귀족의 권위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것도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권위를 침범한 것이니 가만히 둘 수 없는 것이지요.”

“흠, 그런 의미라면… 알겠다.”

렌겔 가주 대리는 혹시나 치기로 인한 정의감 같은 걸 변명으로 내세웠으면 반박하려고 했지만, ‘귀족의 권위’를 앞세우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랄트가 쌓아 둔 일들을 모두 깔끔하게 마친 것을 확인한 렌겔 가주 대리는 베오날드에게 대가로 금화를 지불했고, 이 모든 일은 ‘랄트’가 해결한 것으로 깔끔히 합의했다.

“그럼 전 이만… 본래 하던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이건 반납하죠.”

“그러도록 해라.”

그렇게 금화가 든 상자를 받은 베오날드가 방을 나가고, 홀로 남은 렌겔 가주 대리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랄트가 폭주한 것도 폭주한 거지만, 베오날드가 너무나 유능한 게 한편으로는 가슴이 쓰렸던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을 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아들아.”

“아버님? 들어오시지요.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누워 계시지…….”

갑작스러운 캘러메인 백작의 행차.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는 그가 찾아오자 놀란 렌겔 가주 대리였다.

캘러메인 백작은 아직 방 안에 그대로 있는 가발과 새하얀 옷을 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며 렌겔 가주 대리를 향해 말했다.

“아주 재미난 사고가 일어났다고 들어서 말이다. 도저히 누워 있을 수 없더구나.”

“아, 랄트 문제입니까? 그건…….”

“랄트가 문제가 아니다. 아직 어린애가 일이 힘들다고 할 수 있지. 내가 말하는 건 바로 저거다. 이젠 아예! 그 아이의 자리까지 뺏으려고 해?”

백작의 노성을 들은 렌겔 가주 대리는 아차 싶었다.

그의 의도는 랄트와 베오날드의 격차를 더 벌리지 않으려는 거였지만, 관점을 다르게 해서 보면 그가 아예 베오날드로 하여금 랄트를 대신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거였다.

분노한 백작의 앞에서 렌겔 가주 대리는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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