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세상에! 정말 놀라워. 그 나이에 어떻게 이 정도 기량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 어릴 때 혹시 자작이 뭔가 특별한 걸 먹이거나 무슨 마법적인 조치를 취했나?”
“…아, 아뇨. 그… 기초적인 마나 호흡법이랑 단련만 했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그런데 어떻게 자작이 이 정도 기량을 가진 널 나에게 보낸 거지? 말이 안 되지 않나? 이건 거의… 중급 기사의 역량인데?”
“그게 저… 제가… 일부러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님께서 마나 호흡법과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알려 주셨지만 오라버니라든가… 남동생들은 제가 강해지는 걸 반가워하지 않았거든요. 일부러 초급인 척, 체구만 큰 허당인 척… 행동했습니다.”
언뜻 보면 젤커드 자작이 그녀의 자질을 인정하고 갑주를 입히고 기사로 키워 주는 것 같았지만, 엄연히 한계를 두고 있었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 따른 투자를 해야만 했지만, 마나 호흡법은 오직 기초 레벨만 가르쳤다.
‘원석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만, 결국 입에 발린 거짓이었나? 아니지, 무가의 전통과 상황을 생각하면 이것도 파격적인 조치라는 건가?’
즉, 젤커드 자작도 결국은 어디 시집보내기도 애매한 그녀를 놔두자니 아까워서 이거라도 시키기 위해서 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불어 난세라서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전통 무가인 젤커드 자작가에서 여성인 그녀가 엄연히 남성들의 전유물인 기사의 영역에 들어오려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는 무리들도 있을 것이다.
“더 강하다는 걸 보여 준들… 제게 향하는 불쾌한 시선만 늘어나고, 또 너무 강하다는 걸 들키면 아버님도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군. 너희 가문에 대한 말은 함부로 못하겠지만 아무튼 대강 사정은 알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그 재능을 시원하게 보여 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그저… 저, 저에게도 그렇지만 메이드인 세인 양을 존중하시는 것을 보고 도련님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정도의 재능이다. 전후 사정 따위 상관없지.”
겉으로는 이래도 베오날드는 자신의 계산을 넘어선 재능을 가진 하이디를 보며 표정 관리를 하느라 괴로워하고 있었다.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워서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억제하는데, 기쁨을 참는 것도 상당히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제국의 정권을 잡은 노이멀 공작 시절, 황실의 힘을 빌려서 횡포를 부리는 만큼 황실 기사단을 비롯한 하부 조직들의 관리와 친목 유지는 필수였다.
거기에 노이멀 가문이 원했던 마나 호흡법과 검술의 습득, 그리고 계속해서 도전해 오는 다른 귀족들로부터 권력을 지키기 위해선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가진 인물들을 포섭해야 했기에 그는 무가 사람들이나 황실 기사단을 통해서 무가의 지식과 사람을 알아보는 견식을 배워 놓았다.
‘맙소사! 기대도 안 했는데, 이런 대박이 뽑힐 줄이야! 이 정도면 못해도 제국의 장군감인데?’
“도련… 님?”
“아, 잠시만 생각하느라. 그게… 이 정도의 재능일 줄은 몰라서 너무 놀라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고 해야 하나?”
“…아름답다니요. 그저… 흉흉한 모습인데…….”
“흉흉하기는! 아! 그 마나 호흡법은 기초만 배웠다고 했었지? 그리고 다른 무예는 배우지 않았다고? 아무튼 혹시 나에게… 네 모든 것을 맡길 생각이 있느냐? 그렇다면 그 찬란한 재능을 반드시 빛나게 해 주… 아니지! 내가 보여 준 게 없으니 이 제안은 성급하겠군. 그러면 보거라.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의 값어치를!”
베오날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러난 다음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오러를 끌어 올리고,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검술 중 가장 어렵고 화려한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식 십식(十式)-쌍두사’를 펼쳤다.
본래는 더 빠른 속도로 해야 하지만, 보고 있을 하이디를 배려해서 일부러 속도를 살짝 늦춰 베기를 보여 주었다.
“이게… 뭡니까? 아!”
일부러 속도까지 늦춰 주었기에 겉보기엔 자신의 눈앞에서 검을 한 번 휘두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아주 잠시 뒤, 양 볼에서 느껴지는 후끈함, 거기에 피가 동시에 흘러내리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도련님? 부, 분명 한 번이었을 텐데…….”
“어떻게 되긴~ 그러니까 검법이지. 아, 그리고 상처는 걱정하지 마라. 흉터가 남지 않게 치료해 줄 테니. 사실 이건 몸으로 체험하는 게 가장 빨라서 말이다. 아무튼 이번 건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해서 속도를 늦춘 거고… 본래는! 흠!”
그 순간 하이디의 눈에는 보랏빛 오러의 잔영만이 남았고, 어느새 자신의 양 볼에 흉터가 하나씩 더 새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의 그 차갑고 뜨거운 고통과 함께 그녀는 베오날드가 지닌 검술의 수준이 자신의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순수하게 감탄하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차원이 다른 검술을 직접 체험한 것은 물론 베오날드의 저 여유 있고, 고고한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한 번 더 흔든 것이었다.
“무지한 제게 이런 배려를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저 하이디, 도련님에게 이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그래, 네가 나에게 바치는 믿음과 충성만큼 너 또한 나에게 은혜를 입을 것이다. 괴로운 일, 슬픈 일이 있더라도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거라. 나는 네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뿐만 아니라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라는 건 비단 기사로서의 삶뿐만이 아니다. 정말 찬란히 아름다운 하이디, 네 마음만 허락한다면 너와 가족이 되어 모든 영광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
“예?”
베오날드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하이디는 귀까지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얼굴은 충분히 미녀상이었지만, 여성적으로 보기 힘든 큰 키와 체구 때문에 제대로 된 연애담조차도 오가지 않은 그녀는 이런 돌직구와 칭찬엔 전혀 내성이 없었다.
심지어 올해 열일곱, 꽃다운 소녀 아닌가? 내색은 안 해도 나름 연애 같은 것을 동경할 나이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준수한 외모에 자신의 이상형인 단련된 체구와 강한 무력, 귀족으로서도 아버지와 견줄 정도로 감각까지 뛰어난 베오날드의 고백은 치명상이나 다름없었는데, 문제는 너무 강렬한 자극이었기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그그게! 그게! 그게! 저기! 너무…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그게! 이, 일단 집에… 물어봐야 되기도 하고… 그… 말씀은 너무나 고맙지만… 으으…….”
‘뭐, 결국은 어린아이지. 그 점이 귀엽긴 하지만~’
“으으으으…….”
오버히트.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뇌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베오날드는 표정과 눈빛 관리를 하면서 그녀의 귀여운 반응을 즐겼다.
전생에 가주가 된 백작 시절부터 그는 권력과 지위를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연애에도 매우 열정적으로 힘을 써 왔다.
“그렇지. 너무 급한 이야기였구나. 인생의 반려자를 찾는 것도 한순간에 결정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데……. 그러면 일단 보류하고, 네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마.”
“예… 감사합니다.”
‘뭐, 밀어붙이면 여기서 잠자리까지 갈 수 있겠지만…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망할 벨릭스 개자식.’
그러면서도 여성에 대한 배려심은 갖춘 베오날드였는데, 그가 이런 연애 및 결혼 방식을 택한 것은 부친이자 선대 가주인 벨릭스 때문이었다.
여성을 그저 후계자를 생산하는 기계로만 보고, 심지어 영지 내 여성들에게서 자신의 아이 한 명을 세금으로 거둘 정도로 후계자에 집착하던 악마 같은 행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원치 않은 임신. 반항하면 권력이 가능한 선에서 그 여자의 가족들을 죽이거나 산 채로 가죽을 벗겨서 협박하는 건 물론 영지 추방 등등, 자신이 그런 각종 악독한 수단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망할 아버지에 대한 혐오가 일어나는 베오날드였다.
‘…다른 건 귀족으로서, 가문으로서 납득이 가지만 이건…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어.’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베오날드였지만 이것까지 본받아 버리면 그 지독하게 싫어하는 벨릭스와 자신이 다를 게 없어지는 걸 알기에 연애, 결혼, 혈족 생산의 문제만큼은 그와 완전히 반대의 노선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 귀여운 아가씨의 재능을 개화시키는 게 먼저이니 말이야.’
베오날드는 그렇게 붉어진 얼굴에 부끄러움과 혼란으로 가득한 표정을 한 하이디에게 본격적으로 자신이 아는 옛 제국의 황실 기사단의 마나 호흡법과 황실 기사단의 무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한데 노이멀 가문의 검법이 아니라 황실 기사단 것을 알려 주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논리로, 아류 노이멀 가문엔 창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르게 타고난 무의 재능이 있는 것을 알기에 굳이 더 약한 걸 가르칠 필요 없이 제대로 된 것을 가르쳐도 되는 것이었다.
“자, 그럼 지금 가르쳐 준 마나 호흡법부터 천천히 해 보거라. 지켜봐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남에게 함부로 알려선 안 되는 건 알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이디가 앉아서 마나 호흡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베오날드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사람이란 정말 신기하게도 가장 잊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기억은 꼭 이런 순간에 같이 딸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벨릭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하이디에게 대하듯 연애와 결혼에 관해선 최대한 여성들을 배려하기로 한 베오날드였지만, 세상일엔 어디까지나 예외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것은 지금 베오날드의 생애에 오점으로 남아 있었다.
‘후우~ 가능하면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은 떠오른다니까… 그… 여자.’
정실, 첫째 부인. 이 자리는 상대에 따라서 가문의 명예를 상승시킬 수 있으며 더 큰 지위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위치였기에 오로지 정치, 권력적인 면모만 따져야 했다.
그것을 따지지 않기엔 너무나 큰 가치와 메리트가 존재했기에 베오날드도 싫었지만 가문과 권력을 위해서 애정, 사랑, 계약 모든 것을 무시하고 한 결혼이 존재했던 것이다.
딱 한 명, 부부가 되긴 했지만 부부로서 취급한 게 아닌 그저 가문을 위한 사다리로 취급한 여자. 이렇다 할 재능이나 매력, 능력도 없고, 오로지 출신 가문만 보고 결혼한 여자.
장식용 꽃처럼 취급하고 마음 따위 주지 않았던 여자. 차라리 자신을 원망하고 화내기라도 했으면 죄책감이라도 덜하련만,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원망하지 않은 여자.
하나 그랬기에 이렇게 죽고 나서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리라.
‘이번에는… 다시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지.’
“도, 도련님! 뭔가! 이거 너무 굉장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하던 마나 호흡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자신이 배웠던 흔해 빠진 마나 호흡법과 대륙을 정복했던 제국 황실 기사단이 쓰는 마나 호흡법의 차이는 저 드높은 하늘과 땅속 지하급이었기에 그것을 느낀 하이디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녀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베오날드는 그녀가 계속 집중하도록 지적하며 하이디가 자신의 강력한 창으로 단련되길 기대했다.
***
그리고 몇 개월간 백작가는 잠시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테알 슬럼가의 일을 맡겼는데, 돌아온 것은 표면적으로는 실패였지만 실패가 아니라 백작가의 하위 파벌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만 올려 준 상황이라서 캘러메인 백작과 메이라 부인은 일단 베오날드에게 무언가를 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베오날드의 일상은 급격히 한가로워졌고, 가끔 렌겔 가주 대리가 시키는 일을 제외하면 저택에서 놀고먹으며 하이디와 단련, 셀리나의 지식욕을 채워 주는 연구 정도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라도 어떤 일을 맡아서 베오날드가 랄트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업적이나 공적 같은 걸 세우면 영지의 후계 구도는 완전히 끝장나기 때문이었다.
“관심 안 가져 주니 아주 좋군. 게다가 일을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다니 참~ 평민들이 부러워할 삶이군.”
“정말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말데로브 경의 사유지에 있는 은신처에서 한참 마법과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셀리나와 티타임을 가지던 베오날드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음? 뭐가 문젠가? 내가 뭐~ 정말로 놀고먹는 것도 아니고, 기량 단련과 연구 모두 철저히 하고 있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 랄트 도련님도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고 말이야.”
이렇게 여유롭기 그지없는 베오날드와 다르게 백작가의 후계자인 랄트는 이번 테알 슬럼가 문제 때문에 급부상한 베오날드의 명성과 업적을 누르기 위해서 백작, 메이라 부인과 그녀의 본가 가신들과 함께 영지의 각종 일과 공부에 치여 사는 중이었다.
사실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약 15년간 제대로 교육받지 않고 논 대가를 치르는 거니 당연한 결과였다.
저택의 메이드와 집사들이 웅성거리는 말에 의하면 요 근래 랄트 도련님은 매일같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새벽 2~3시까지 일과 단련, 공부를 하고 잠드는 하드한 일상을 보내는 중이라고 한다.
“걱정되는 것은 오히려 도련님의 신상입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제 메이라 부인이나 백작이 노릴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현재 백작가의 후계 구도를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를 가만히 놔둘 두 사람이 아니었기에 셀리나의 우려는 설득력 있는 것이었지만, 베오날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차를 계속 들이켜면서 우아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