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백작과 메이라 부인이 긴장감 있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베오날드는 새로이 자신에게 합류한 사람들을 서로에게 소개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메이드인 세인, 젤커드 가문의 하이디, 말데로브 경의 아들 에라솔 총 3명이 모두 베오날드의 방에 모여서 다과회를 가지며 서로에 대한 소개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오오… 상급 기사인 말데로브 경의 아드님이셨습니까? 아버님에게 말데로브 경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 캘러메인 영지 최강의 기사라고! 그 아들인 에라솔 님도 강한 기사일 것 같은데… 혹시 나중에 대련이라도…….”
“죄송합니다. 전 아직 기사가 아닌 종자라서 말씀 안 높이셔도 됩니다. 아무튼 같이 베오날드 도련님을 따르는 입장으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도련님, 소문에 의하면 테알 슬럼가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임무를 맡으셨는데… 그거랑 백작님과의 면담은 어찌 되었습니까? 지금 그 화제로 저택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백작님과 선대도 해결 못한 일을 떠넘겼다고 막 웅성거렸다니까요.”
세인은 베오날드의 무용담을 듣고 싶은지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알테리오의 깃털을 쓰다듬어 주며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던 베오날드는 슬쩍 세 사람의 눈치를 보더니 미소 지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으음~ 나는 딱히 한 게 없어. 그저 세 조직이 싸우는 혼란 속에서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걸 배웠을 뿐. 운이 아주 좋았지.”
“그러면 거기서 하신 건 딱히 없으시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하지만 그……! 아차차!”
“하나 소문으로는 그곳에… 아!”
‘이 두 기사 지망 녀석들은 아직 비밀을 감추는 것에 익숙지 않군. 나중에 따로 교육해야겠어. 아무튼 생각보다 이번 일로 인한 저택 내의 여파가 크군. 다크티스 놈들… 날 이용할 셈인가?’
세인에게서 들은 저택 내의 동향을 통해서 보면 집사, 병사, 기사들 모두 베오날드가 홀로 테알 슬럼가를 제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바로 다크티스 조직의 전략과 베오날드의 생각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겹쳐진 탓이리라.
베오날드의 수작 덕에 사실상 테알 슬럼가를 거저먹은 거나 다름없었고, 암살과 도적 길드를 중심으로 한 다크티스 조직은 기존에 각종 사업으로 테알 슬럼가를 주름잡던 바알라스와 아그라샌더 그룹을 소화시키고 재편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용병을 비롯해서 다른 세력들이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그들은 이번 분쟁에서 핵심적인 조커 역할을 했던 ‘수수께끼의 방랑 기사’를 마치 자신들의 주인이자 새로운 흑막처럼 소문을 퍼뜨렸고, 이 캘러메인 성과 저택에서는 그 ‘수수께끼의 방랑 기사’의 정체를 베오날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으음~ 뭐, 그러면 나도 그 이미지를 이용해 볼까?”
“도련님께 오히려 폐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슬럼가의 쓰레기들인데 말이죠.”
“어차피 이미 용병 잡종 소리 듣는데, 이제 와서 그런 거 하나쯤 더 늘어도 상관은 없지. 아무튼 백작님이 주신 임무가 끝났으니 이제 한동안 시간이 나는데… 입장을 좀 확실히 해야겠군.”
“입장이라면? 가문에 대한 입장 말씀이십니까?”
“아니, 여기 있는 너희와 나의 입장. 이번 일로 인해서 내 이름이 캘러메인 백작가에 퍼진 만큼 날 노리는 자들이 생길 수 있으니까 주변 정리라고 해야 할까? 아, 물론 하이디 너는 상관없네. 이미 확인했으니 말이야.”
이번 일로 인해서 예상 이상으로 베오날드가 대두되면서 어쩌면 캘러메인 백작가 내부의 암투나 권력 다툼에 말려들 수 있으니 모두에게 자기 위치를 정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젤커드 가문의 여식인 하이디는 이미 젤커드 자작이 충성을 바쳤고, 베오날드에게 보낸 거나 마찬가지이니 예외였다.
“전 아버님께서 베오날드 도련님을 충실히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제가 위험할 거라면 미리 언질을 주셨거나 빠져나오라고 별도로 말씀하셨겠지요. 그러니 전 끝까지 베오날드 도련님을 따르겠습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충직하네. 가문 내력인가? 하지만 그래도 결국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데……. 캘러메인 백작가와 나를 저울질하는 문제에 대해선 결국 소심해질 테니 말이야.’
“저, 저기, 그…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결국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면 이 캘러메인 백작가 쪽에 더 입장이 기울어질 것 같아서.”
“그럼 설마! 도련님은 이 가문을 적대하실 것입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집안끼리의 권력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지. 실제로 메이라 부인이 날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에라솔에게 차분히 설명하면서 베오날드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다시 알려 주었다.
집안 내부 싸움에 휘말릴 수 있으니 입장을 정하라는 것을 다시금 이해시켰고, 에라솔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으음… 그렇게 되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역시 뭐랄까? 캘러메인 백작가에 충성을 하지만 그 안의 다툼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요.”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집안 다툼은 집안사람끼리, 그다음 기사로서, 종자로서 승리한 자에게 충성한다도 나쁘지 않겠지. 만약 의문이 생긴다면 직접 말데로브 경과 이야기해 보도록.”
“죄송합니다, 도련님. 확실히 정하지 않아서…….”
“아니, 당연한 일이니까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다. 그러면 이제 세인, 네가 문제인데…….”
그녀는 베오날드의 시선에 흠칫하며 살짝 몸을 떨었다.
베오날드의 전속 메이드로 임명되었지만 그녀는 엄연히 메이라 부인 측 사람이자 첩자였다.
내심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지만 일단 자신의 임무는 베오날드를 감시하는 것이자 그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기에 그녀는 여기선 갈등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베오날드 도련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말이죠.”
“흐으음~ 묘한걸. 나는 세인을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지만, 너는 내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따르고 싶다는 거지? 나로서는 아직 관계가 빠르게 진행될 만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윽!’
의구심이 깃든 베오날드의 눈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지나갔다.
그 말대로 가까워지기엔 기간이 너무 짧았던 베오날드와 세인의 사이. 개인적인 호감은 있지만 결국 메이라 부인의 부하로서 베오날드의 신변을 지켜보기 위해서 다가간다는 생각도 있던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하, 너무 그렇게 놀랄 필요 없다. 그저 가벼운 장난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상당히 복잡하니까 말이야. 그래도… 내가 호감을 가진 세인이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는 건 아주 좋다는 생각이 드는군.”
“예, 예. 도련님.”
“아무튼 나는 세인 네가 스스로 잘 생각해서 결정한다면 그것을 존중할 것이다. 그럼 오랜만에 하지 못했던 수련이나 하러 가야겠군. 하이디, 따라와라. 기사에겐 수련이 필수이니까. 세인은 알테리오를 부탁한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베오날드는 하이디를 데리고 수련실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지만, 이 하이디만큼은 확실하게 자신의 부하를 자청한 젤커드 자작의 딸인 만큼 다른 고민할 거 없이 곧바로 신경 써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말데로브 경이 마련해 준 수련방이다. 보안과 방음이 철저하지. 즉, 안심하고 단련할 수 있으며 수련 방법과 기술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어떻게 되든 간에, 저는 도련님에게 충성을 다할 겁니다.”
“좋은 대답이다, 하이디. 하지만… 충성 하나만으론 나와 네가 이 험한 전장을 같이 넘어가기엔 힘들지도 모르니, 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어쩌면 너의 가문에 대한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진실 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나?”
“혹시… 검술과 마나 호흡법에 대한 것입니까?”
“감이 좋군. 그래, 무가(武家)에 있어선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재산이자 기밀이라 나는 아주 조심해서 너에게 물어보고 있는 거다. 안 되면 안 된다고 해도 된다. 그러면 이야기는 거기까지이니.”
베오날드는 지금 선을 명백히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 자신의 편 안에서도 자신의 지식과 기술, 능력을 나눠 줄 수 있는 선 안에 들어올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이다.
예의 있고 조심스러운 태도였지만, 하이디는 그의 눈빛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저는 그, 가문의 비밀이 될 만한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마나 호흡법은… 기초 중의 기초적인 것이고, 무기 사용법은 기본적인 베기, 찌르기 같은 것만 반복했습니다.”
“그런가?”
“예.”
딱히 거짓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자질이 있고 신체 조건이 좋아도 결국 하이디는 여성. 후계자 문제가 곤란해지거나 아니면 영지 내에 다른 혼란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젤커드 자작이 제정신이면 마나 호흡법을 정식으로 가르치거나 가문의 무예를 가르치진 않았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좋아. 그럼 어디 서로의 기량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 수 겨뤄 볼까? 무기는 뭘 쓰지?”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확인하기 전엔 그것을 순수하게 믿지 않는 베오날드였다.
“아, 장창을 선호합니다.”
베오날드는 수련실 벽에 걸려 있는 무기 중 장창을 꺼내 던져 주었다.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하라는 듯 날이 아주 잘 갈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베오날드는 저번에 젤커드 자작을 상대할 때, 하수를 상대로 힘 조절이 하는 게 힘들었는지 일부러 목검을 선택했다.
“그럼 전력을 다해서 와라. 죽을 생각으로 덤벼도 좋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네 손에 죽으면 그건 그것대로 내 한계인 거지. 걱정 마라. 여기서만 말하는 거지만, 나는 네 아버지보다 더 강하니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좋아, 이걸로 자연스럽게 아까 전 말이 거짓인지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겠군.’
베오날드는 사람의 말을 100퍼센트 신뢰하지 않는다.
말에 따른 제반 사항이나 상황, 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언제나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이디가 정말 기본적인 마나 호흡법과 기초적인 병장 기술만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련을 신청한 것이다.
“그럼! 갑니다!”
“그래, 전력으로 와라!”
“흠!”
콰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련실 바닥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하이디는 그 큰 키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무서운 속도로 베오날드를 향해서 창을 휘둘러 왔다.
무장은 단단히 한 데다 오러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결국 가주인 젤커드 자작의 딸이니 그보단 약할 거라 생각해서 긴장을 늦추고 있던 베오날드였는데, 하이디의 속도와 힘은 예상 이상이었다.
‘뭐야, 이거?’
“하아아아아아아앗!”
그래서 그녀의 움직임을 놓쳤고, 그래도 그동안의 단련이 무색하지 않은 듯 간신히 자신에게 떨어지는 창을 피했지만 수련실의 바닥은 마치 운석에라도 맞은 듯 파였고, 돌조각을 뿌리면서 폭발했다.
베오날드는 정말로 충격을 받은 듯 그녀를 바라보는데, 이 위력도 위력이고 방금 속도도 모두 그녀가 말한 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거짓은 아니야. 실제로…….’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오러는 아주 미약했다.
아주 하찮은 기초 중의 기초 마나 수련법으로 단련한 기사급도 되지 않을 만큼의 오러인 건 확실했다.
그러나 그녀가 폭발시키는 기량은 그 오러에 맞지 않게 엄청난 위력과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는 건 곧 이것이 그녀의 순수 무력(武力)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베오날드는 감탄하며 손을 들어 달려오는 그녀를 제지하고는 칭찬의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