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내가 없는 동안 이리저리 소식이 들려왔겠지.’
테알 슬럼가의 일을 해결한 뒤 베오날드가 델마인 영지, 젤커드 영지를 도는 동안 분명 여러 수단을 통해 테알 슬럼가에 이변이 일어난 사실을 백작가에서도 알아챘을 것이다.
그래도 이 영지의 주인이자 이 도시의 지배자인 만큼 리스크를 생각해서 직접적인 해결은 못하더라도 3대 조직의 근황과 움직임을 파악하는 건 당연한 일.
게다가 메이라 부인은 베오날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으니, 그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한다는 걸 알고 소식을 듣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으리라.
“베오날드 캘러메인,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그리고 어머님.”
“허허, 그래, 왔느냐? 베오날드.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구나. 네겐 좀 버거운 임무를 맡긴 듯했는데, 어땠느냐?”
“예. 정말 거대한 세상의 벽을 느꼈습니다. 버거운 임무라 느꼈으나 그것 또한 백작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도전을 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해 버리고 말았지요. 정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런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백작이었지만 눈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걸 봐선 역시 자신이 들었던 사실과 달리 베오날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리라.
베오날드는 슬쩍 눈치를 보는 척하면서 그런 백작의 반응을 캐치해 냈고, 둘은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속에는 감정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꼴좋다! 늙탱이 자식, 당혹스럽겠지. 여기서 내가 공적을 부정할 줄은 몰랐을 테니 말이야.’
‘이, 이런 무례한 놈을 봤나?’
‘설마 고작 15살 된 핏덩이가 자신을 엿 먹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겠지?’
아마 백작은 베오날드가 테알 슬럼가에서의 공적을 자랑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메이라 부인과 함께 그에 대비할 수를 준비해 놨는데, 베오날드가 아예 첫 문답으로 그 판을 깨 버리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 저 자신의 부족함은 물론 테알 슬럼가에서 인간의 잔혹성과 밑바닥, 악의를 다시금 확인했지요. 후우~ 좀 더 많은 경험으로 기량을 갈고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실망시켜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알았다. 애초에 너에겐 기대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깨달은 게 있다면 오히려 득인 거겠지. 어서 돌아가서 다른 일을 명할 때까지 네 할 일을 하여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베오날드가 그렇게 예를 갖추고서 응접실에서 물러나자, 응접실 안에는 메이라 부인과 백작 둘만 남게 됐다.
베오날드의 발소리가 사라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메이라 부인은 곧바로 참아 뒀던 분노를 터뜨리면서 백작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버님! 왜 저 아이를 그냥 보내신 겁니까? 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꼴을 어째서 그냥 두고 보셨습니까? 저 아이가 부린 수작을 다 알고 계시잖습니까?”
“다 알고는 있다. 하나 저 아이는 애초에 그것을 부정했다. 자신의 공적이 될 그 일을 말이다. 그냥 없는 것처럼 이야기했지.”
“하나 거짓인 걸 아시잖습니까? 따지셔야지요!”
“어떻게 따진단 말이냐? 저 아이가 테알 슬럼가를 어떻게 제패하고 구워삶았는지 보이지가 않는데!”
부하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다곤 해도 그저 사람과 사람에게서 전해지는 말과 글자들뿐, 베오날드에게서 직접 듣지 않는 한 누구도 진상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사람을 집어넣어 뒀다고 해도 그 슬럼가 3대 조직의 핵심까지 집어넣는 건 힘든 일이었기에 백작이 알 수 있는 정보는 그저 베오날드가 임무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3대 조직 간에 분쟁이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정보의 디테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테알 슬럼가의 3대 조직에 신형 마약으로 인한 분쟁이 생기면서 각자 전쟁 준비를 위해 용병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았고, 전쟁이 일어났는데 승자는 다크티스로서 ‘방랑 기사’를 고용해서 이겼다, 까지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럼 델마인 남작과 젤커드 자작에게 돈을 준 사실을 따지면 되잖습니까?”
그 말대로 백작과 메이라 부인은 이미 베오날드가 이 영지로 돌아오기 전에 델마인 남작의 영지와 젤커드 자작의 영지에 들러 그들에게 거액의 재물을 건네줬다는 첩보를 받아 알고 있었다.
메이라 부인은 그 점을 지적했지만 백작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보면서 혀를 찼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그걸 따지는 순간 내 한심함만 드러내는 꼴이다. 용케 그 아이 앞에선 참았구나!”
“그, 그야 아버님께서 이야기하셔야 하니 나서지 않은 것입니다만… 그래도 그런 재보를 얻었으면 당연히 자신이 속한 가문에 바쳐야지요! 테알 슬럼가는 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영지, 거기에서 나온 것을 빼돌린 것은 엄연히 대죄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한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거냐? 델마인 남작에게 증언해 달라고 할 거냐? 아니면 젤커드 자작에게 증언해 달라고 할거냐?”
“저 아이만 불러와서 첩자가 진술한 걸로 심문하면 되잖습니까?”
“용병의 피가 섞였지만 저 아이도 엄연히 우리 혈족이다! 이 멍청한 것아! 심지어 경쟁마 교육을 시키겠다고 우리가 불러서 양자로 삼은 아이야! 그걸 우리 첩자들 말만 듣고 먼저 잡아서 신문한다고 해 보자! 델마인 남작과 젤커드 자작이 와서는 당연히 받은 적 없다고 반발하겠지. 그러면 외부에 어떻게 보이겠느냐? 생각을 좀 하거라! 생각을!”
생각이 1차원적인 며느리가 답답한지 캘러메인 백작은 목에 핏대를 올리면서 화를 냈다.
그 말대로 베오날드가 다른 가문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냥 부하나 기사라면 추궁해 봄 직했다.
하지만 베오날드는 가문의 혈족이자 자손, 그것도 시골에 버려둔 집안의 아이 상태가 아니라 양자로 들여서 ‘캘러메인’의 성을 준 아이다.
메이라 부인의 말대로 하면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기밖에 되지 않는 꼴이었고, 캘러메인 백작가의 아래에 있는 젤커드 자작과 델마인 남작의 신뢰까지 깎아 먹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직도 놈이 둔 수가 얼마나 영약하고 예리한지 모르는 게냐? 방금 내가 괜히 그냥 보낸 줄 아는 게냐!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보낸 거란 말이다! 정말 천한 용병의 피가 섞이지 않고 정당한 혈통이었으면 지금 바로 내 손으로 랄트를 암살시키고 렌겔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싶을 정도다!”
“그, 그 정도란 말입니까?”
백작의 충격적인 발언에 메이라 부인은 경악했다.
스스로 그렇게 사랑한 자기 손자를 암살해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베오날드라는 아이를 대단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봐라. 저 테알 슬럼가를 제패한 것도 대단하지만, 그로 인해서 막대한 재보가 생겼는데 거리낌 없이 우리 가문 아래에 있는 귀족 파벌의 수장에게 절반씩 나눠 주고 직접 방문해서 그들과 협상한다는 방안을 내놓는 놈이다. 이게 15살짜리 머리에서 나올 계략이란 말이냐? 후우~ 캘런 그 아이가 대체 어떻게 기른 건지, 참…….”
“그,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일단은 확인할 것이 몇 가지 있다. 베일 집사! 가서 말데로브 경을 불러와라!”
“예, 백작님.”
백작은 우선 집사에게 지시를 내려 말데로브 경을 불러왔다.
아무튼 제대로 한 방 먹은 만큼 이대로 베오날드를 그냥 둘 순 없는 건 사실이었기에 그를 불러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일단 하나 수상한 것은 바로 베오날드가 ‘기사’인지에 대한 여부. 첩자의 말로는 테알 슬럼가의 분쟁을 끝낸 방랑 기사는 흑발에 청안의 남성이라는 진술까진 올라온 상태였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아, 마님도 계셨군요.”
“말데로브 경, 급히 물을 게 있어서 불렀네. 베오날드에 대해서 말이지.”
“어떤 것입니까? 백작님.”
“그 아이, 혹시 ‘천연 기사’인가? 상급 기사인 자네라면 분명 파악하고 있을 거라 보는데…….”
“그랬다면 진작 보고드렸을 겁니다, 백작님.”
자신의 주군인 백작의 추궁이었지만 말데로브 경은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베오날드와 사전에 약속한 대로 맹세를 지켜 그에게 거짓을 고한다.
지금 저기 랄트의 모친인 메이라 부인이 있기에 캘러메인 백작가의 미래를 위해 베오날드가 ‘천연 기사’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들은 백작은 무거워진 표정으로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으음, 자네가 모른다니 그보다 더한 보증은 없겠지. 후우우~ 정말 모를 일이로군.”
“아버님! 지금까지도 놀라울 따름인데, 그 아이를 천연 기사라고까지 생각하셨습니까?”
“안 그러면! 테알 슬럼가에 마나를 다루는 ‘기사’가 나타난 것을 어떻게 설명하라는 말이냐? 휴우~ 그건 너도 알고 있는 게 아니더냐?”
“그저 거기 싸움에 낀 용병들이 도망치기 위해 댄 핑계라고 생각했지요.”
“용병들이야 그렇다 쳐도, 내 정보망엔 ‘기사’도 구분 못하는 멍청이는 없단다, 얘야. 아무튼… 그 아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후우우~”
한숨을 크게 쉬며 갈등하는 캘러메인 백작. 가주 대리를 맡은 렌겔의 말대로 재능과 능력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혈통에 대한 건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일부러 불가능한 과업을 내렸는데, 놈은 자기 식대로 해결하고, 막대한 재보까지 얻어 정치적인 연줄까지 만들었다.
하나 그렇다곤 해도 후계자론 절대 삼을 수 없었다.
“그래, 결국 혈통… 정당한 혈통은 중시되어야 해.”
자신들 귀족은 평민과 다르다.
아무리 난세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은 신에게서 받은 고귀한 혈족. 그렇기에 평민들보다 뛰어나며, 그렇기에 그들을 지배하고 지키고 인도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정의였다.
더구나 같은 시대에 이 제국의 어느 공작가의 후계자는 유일한 남성 혈통이었지만 사생아라는 이유로 자그마치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작 대리’라는 직함으로 불렸고, 죽고 나서야 ‘공작’의 작위와 대우를 받은 대굴욕도 있었기에 캘러메인 백작은 아무리 베오날드의 가치가 높아도 랄트를 후계자로 할 생각이었다.
“네가 너무 답답해서 심한 말을 했지만 아가야, 나는 아직도 좀 모자라더라도 정당한 혈통인 랄트를 후계자의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버님.”
“하지만 문제는 렌겔이다. 그 아이는 나와 생각이 달라.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의 가치에 눈이 팔려서 진짜 중요한 걸 생각 못하고 있단다. 그래선 안 돼.”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기는……. 네가 다른 혈족에게 한 방법을 그대로 해야겠지.”
메이라 부인은 백작의 눈빛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백작 모르게 다른 사내아이들을 완전 범죄처럼 처리했다고 생각했지만, 백작에게는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두려웠던 것이다.
하나 반대로 백작이 그것을 알고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귀족은… 가문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 가문은 혈통과 후계자가 가장 중요하지. 너는 랄트를 만들었기에 가치가 있는 거란다. 알았느냐? 만약 그 반대였다면 너는… 그리고 네 가문엔 그동안의 죄를 물어서 모조리 고문실에 처넣어도 모자랐을 게다.”
“…힉!”
“그러니 너도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고, 랄트의 관리를 잘하려무나.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랄트’만 없으면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
“우리도 손을 못 댄 테알 슬럼가를 단신으로 정벌하고 온 아이다. 심지어 이젠 젤커드 자작과 델마인 남작과의 정치적 선도 잇는 능력을 보여 줬지. 그런데 랄트는? 네 치맛바람 안에서 노느라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거나 다름없지. 그러니… 간수 잘하거라. 나는 네 편이다만, 그놈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괴물이다. 알았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아버님.”
백작의 충고를 들은 그녀는 유례없는 두려움이 가슴에 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행한 일이 이미 들켰다는 것도 두려움의 일부였지만, 더 두려운 것은 베오날드가 그저 친아들인 랄트의 앞길을 방해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아들은 물론 자신의 생명과 친가를 위협할 수 있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떠올라 버렸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