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하이디 젤커드라고 합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아버님의 명에 따라 이제부터 도련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따님인가요? 그보다 기사 같은데…….”
“그렇습니다. 하하핫! 보통이 아니죠? 올해… 열일곱이 되는 아이입니다. 기사로서 자질은 있지만, 아직 정식 서임은 받지 않았습니다.”
‘열일곱에 이 성장이라니. 보통은… 아니지. 뭐, 외모는 나쁘지 않네.’
베오날드 자신도 단련해서 보통 체구가 아닌데, 그보다 더 큰 약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와 체구가 인상적인 그녀를 보면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강렬한 첫인상에 당혹스러웠지만 베오날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일단 그녀를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편하게 있으세요, 하이디. 그리고 뭐, 흔하지 않은 ‘여성 기사’라서 놀랐을 뿐… 그 외의 능력이 좋다면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보통은 딸아이에게 마나 호흡법이라든가 검술을 전수하진 않을 텐데…….”
“예. 보통 귀족가나 기사 가문의 전통은 그러하지만 저 아이가 워낙 천부적인 무골이라서 말이죠. 도저히 원석을 다듬지 않고는 못 배기겠더군요. 어차피…….”
“다른 가문에 시집보내기도 그러니까… 이지요? 보통 귀족가에서 원하는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을 테니까요. 일단 저 키로 인해 남편을 내려다보게 되는 점부터 해서… 드레스도 안 어울리고, 안 좋은 시선을 받겠죠?”
“예… 뭐, 그렇지요. 불쌍한 것. 사내아이로 낳아 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젤커드 자작에게서 시선을 돌려 베오날드는 슬쩍 하이디의 상태를 살폈다.
본인도 자신이 일반적인 여성적 매력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여태껏 그런 취급을 받아 온 것에 익숙한 듯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미소를 띤 채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베오날드를 내려다보게 된 그녀가 송구스러워서 허리를 숙이고 몸을 뒤로 빼려던 찰나, 베오날드가 그녀를 번쩍 들더니 공주님 안기처럼 안아 올렸다.
“도, 도련님?”
“뭐, 저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아름답고 귀여우면서 기사로서 기량까지 보유하고 있다니, 좋은 게 더 좋은 거지요.”
“소, 송구스럽사옵니다, 도련님! 그, 그보다 어서 내려 주십시오. 갑옷의 무게까지 합쳐서 상당히 무거우실… 겁니다! 그… 그…….”
“으음~ 갑옷 무게를 제하면… 깃털을 드는 느낌인데?”
“아… 아으으으…….”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처음인지라 하이디는 새빨개진 얼굴을 얼른 양손으로 가렸다.
베오날드는 그 소녀스러운 반응에 흐뭇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생전의 그는 여성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은 축에 속한 편으로, 보통 귀족 가문이라면 싫어할 하이디 정도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지, 하이디.”
“예. 아, 알겠습니다, 도련님. 전령을 비롯해서 호위까지 모두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그보다 슬슬 내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그… 이런 건 처음이라, 적응이 안 돼서…….”
“아~ 그러도록 하지.”
그렇게 새로운 호위이자 전령까지 얻은 베오날드는 다음 날 하이디와 함께 젤커드 자작의 영지를 떠나서 캘러메인 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말데로브 경이 마련해 준 은신처에 도착하자, 그곳엔 마법사인 셀리나가 누군가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나, 도련님, 오셨나요?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뭐죠? 일단은 제가 돌보고 있었는데요.”
‘뭐긴, 내가 만든 약물의 피해자들이지. 그나저나 오지 말라고 했는데 또 왔군.’
“으으으…….”
“으어어어어… 약을 줘어…….”
그를 반기는 4급 마법사 셀리나의 옆에 있는 삐쩍 마른 두 노인과 남자는 본래 아그라샌더 그룹이 다루던 노예들로, 베오날드가 만든 환상의 꽃에 중독된 자들이었다.
본래 이 시대에 없던,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재앙인 만큼 베오날드는 직접 치료하기 위해 다크티스에 말해서 그들을 챙긴 것이었다.
“이래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아무튼 하이디! 오자마자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만 저 둘을 저택 안으로 옮겨서 감시해 주게. 구속해도 좋네.”
“예! 도련님!”
하이디 경에게 지시를 내린 베오날드는 슬쩍 셀리나를 지나쳐 들어가려 했지만 그녀는 베오날드의 앞을 막아서면서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저는 뭐 도와 드릴 거~ 없으려나요? 일단은 저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게 돌봐 드리곤 있었는데 말이죠.”
“감사는 나중에 표하지.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하네. 이제부터는 내 일이니 말이야. 아니면 혹시… ‘내부’를 봤나?”
“아하하핫, 아주 조금…….”
터엉!
그 대답이 나온 순간 베오날드는 자비 없이 검을 휘둘렀지만, 셀리나의 코앞에 생긴 반투명의 막에 순간적으로 막혀 버렸다.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한 베오날드가 성가신 마음에 오러를 끌어 올려 한 번에 베어 버릴까 생각하는데, 그 모습을 본 셀리나가 새파래진 안색으로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만요, 도련님! 그거 ‘오러’죠? 짜잔! 안 되었네요! 저기, 10초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보고 싶어서 본 것도 아니고! 일단 도련님이 ‘연금술’을 하는 것에 대해서 비밀로 해 드릴 수 있어요.”
“이 세상엔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말해도 절대 믿지 말아야 하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지. 바로 가족, 친구, 그리고 마법사.”
“편견이에요. 대체 뭘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뭐긴, 경험이지.’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생전에 마탑 마법사들에게 겪었던 일을 주구장창 늘어놓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미 조용히 죽이기엔 상황이 더럽게 꼬여 버렸다.
상대는 아주 실력 없는 마법사는 아닌 건지 목숨을 지킬 수단을 마련해 놓은 걸 봐선 좀 더 힘을 써야 할 텐데, 그러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나 컸다.
‘일단 저 여자는 이 영지의 중요 인물 중 하나다. 마탑에서 파견한 조언자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고, 가주가 소집하는 회의에도 참여할 수 있을 만큼 핵심 인물인데… 지금 내가 딱 들어온 타이밍에 실종되면 골치가 아파질 거다.’
“그, 그래도 조용히 계신다는 건 이야기를 들을 의사가 있으시다는 거죠?”
‘물론 죽이고 적당히 몬스터들의 서식지에 던져두면 연구하러 갔다가 실종된 걸로 속일 수도 있을 테지만, 손이 너무 많이 가. 게다가 하이디 경도 있으니 일단은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볼까?’
베오날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이디를 저택 밖에 대기시켜 둔 채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여차할 경우엔 죽일 생각이었기에 다른 짓을 못하게 연금술 정제 시설을 만들어 둔 지하실로 데려가서 마주 보고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그럼 어디 짧고 간략하게 부탁하지. 지금… 가뜩이나 시간도 지연돼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
“제게 연금술을 알려 주세요.”
“좋아. 유언은 잘 들었다. 이제 죽여 주지.”
더 들을 거 없이 검을 뽑는 베오날드. 알아선 안 될 것을 속속 알아 버린 자를 더 이상 살려 둘 필요가 없었기에 살기를 뿜으면서 셀리나에게 다가가는데, 그녀는 팔을 휘저으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요. 왜 말만 하면 죽이니 마니 그러세요?”
“이건 마탑에서도 통용되는 질서일 텐데? 본인의 허락 없이 남의 연구실이나 실험실에 무단으로 들어가서 정보를 캐면 죽여도 상관없는 거 말이야.”
“아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지금은 안 그런다고요. 그보다 시골 출신인 도련님이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그거 아카데미 형식으로 변하기 전의 진짜 ‘탑’이었던 시절에나 행해지던 아주 오래된 과거 이야기인데? 아무튼 그럼 조수 한 명 구한다 생각하고 받아 주시면 안 돼요? 직접 배우는 게 아니라 등 뒤로 훔칠 테니까요.”
“아주 대놓고 훔친다는 소리를 하는군.”
“게다가 제가 있으면 저택 내부에 연금술 실험 시설을 만들어도 위장이 되고, 백작가의 자금도 끌어다 쓸 수 있어요. 물론 전부 도련님의 것으로 할게요. 게다가 귀찮은 작업이나 데이터 수집도 대신 할 수 있잖아요.”
셀리나가 내민 조건에 베오날드는 조금은 솔깃한 기분이 들었다.
백작가의 자금을 합법적으로 끌어다 쓸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일일이 해야 하는 기초 작업 같은 것을 맡아 줄 사람. 그렇게 되면 시간을 엄청 아낄 수 있다는 점이 메리트였다.
문제라면 역시 자신이 연금술을 쓰는 것을 안다는 것과 저택 내의 정치 상황이 복잡해질 거란 점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미 저 젤커드 자작의 딸인 하이디가 자신에게 붙었을 때 그건 이미 복잡해진 문제였다.
‘이미 한 번 치기 시작한 파도, 두 번 치든 세 번 치든 다를 건 없겠지. 메리트가 좀 더 있긴 해.’
아슬아슬하게 죽여서 얻는 이득보단 살려서 조수로 삼는 편이 이득이 더 많다고 결론을 짓는 베오날드 머릿속의 주판이었다.
“후우~ 좋아. 단,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두지. 만약 내가 말한 비밀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거나, 혹은 수상한 행동을 할 시엔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라.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걸 각오하라는 거다. 알았나?”
“예, 기꺼이 그러죠.”
“그리고 하나 더. 내 지시엔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 어기거나 또는 의심할 요소가 많을 시엔 죽이겠다. 감당 못한다면 거부해도 좋다.”
“아… 무섭지만, 그래도 하겠습니다. 혼돈 속에서 진실의 빛을 좇는 게 마법사의 사명이니까요.”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진짜 정신이 나간 것 같군.’
승낙하는 셀리나를 보며 베오날드는 아무튼 허락했으니 그녀에게 주의 사항에 대해 이리저리 알려 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연금술’을 쓴다는 점과 마나 호흡법과 검술을 ‘기사’급으로 익혀 두었다는 점 등등,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도를 둔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해 의문을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알았나? 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말고, 알려고 하지 마라. 예를 들어 내 기술과 지식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예. 꼭 기억하겠습니다, 도련님.”
“좋아. 그럼 이제야 본격적으로 뒷정리를 할 수 있겠군. 일단 셀리나, 너는 저 노예들을 데려가서 중독 증상이 끊길 때까지 계속해서 돌봐 줘라. 명분은 신종 마약 연구용이라고 하면 대충 납득할 거다. 적절한 성과와 결과물은 나중에 마련해 주지.”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렇게 먼저 셀리나를 저택으로 돌려보낸 다음 베오날드는 하이디와 함께 따로 캘러메인 백작의 저택에 귀환하였다.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하러 나온 것은 자신의 전속 시녀 역할을 맡고 있는 세인으로, 그가 없는 동안 상당히 걱정했는지 안도하는 눈빛으로 인사를 해 왔다.
“도련님! 돌아오셨군요!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할 게 많지만, 우선은 알테리오에게 가시길 바랍니다. 식사는 주고 있었지만 함부로 밖에 내놓을 수 없어서 계속 가둬 놓은 상태라 상당히 민감합니다.”
“음, 알았다. 녀석을 돌보느라 수고 많았다, 세인.”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보다 옆에 계신 그분은?”
“젤커드 자작님의 따님인 하이디 양이다. 그리고 이젠 내… 가신이라고 해야 맞겠지. 아무튼 먼저 백작님에게 보고할 게 있으니 만나 뵐 수 있을지 확인해 봐라. 난 그동안 옷을 갈아입겠다.”
“예, 도련님. 곧바로 집사장님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에라솔 님도 곧 오실 겁니다.”
세인에게 지시를 내린 뒤, 베오날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알테리오를 잠시 위로하고는 에라솔과 하이디, 세인에게 서로 인사를 나누게 했다.
그다음 집사장에게서 백작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그와 함께 곧장 백작의 응접실로 향했다.
“백작님, 베오날드 도련님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베오날드가 문을 열고 응접실에 들어서자, 그곳엔 백작뿐만 아니라 메이라 부인까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베오날드에게 보내는 시선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증오스러운 것이었다.
그 시선을 통해 베오날드는 자신이 없는 동안 이 백작가에 테알 슬럼가의 일이 어떻게 알려졌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