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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40화 (40/259)

[40화]

“흠! 읏! 솜씨가… 내 예상 이상이군!”

‘아, 이 정도 속도면 되는 건가 보군.’

“그 정도 지혜에 이 정도 무의 기량이라니! 정말 부러울 지경이군! 하!”

‘하지만 저쪽도 눈치가 빨라서 더 이상의 하향 조정은 무리이려나?’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젤커드 자작의 감탄만이 들리는 수련실에서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의 수준을 검증하기 위해 여러 수를 쓰면서 조심스럽게 공세를 지속했다.

하나 젤커드 자작도 전장에서 뼈가 굵은 군인이자 한 사람의 기사. 베오날드의 공격이 점점 막기가 수월해짐을 느끼면서도 그가 지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자신을 재려고 한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천연 기사인데… 수준은 날 능가한다는 것인가?’

‘음, 이 정도까진 막는 것 같은데…….’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구나… 나도 나름 빠른 성장과 강함으로 이름을 날렸건만!’

젤커드 자작이 중급 기사가 된 시기는 10대 후반. 그때만 해도 세상이 자신에게 내린 평가는, 천재라는 수식어는 당연하고 장차 인간의 정점인 상급 기사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의 우러러보는 시선과 질투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중급 기사의 경지로 약 20년을 넘게 보내면서 상급의 벽 앞에서 헤매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눈앞에 이제 막 성인이 된 약관의 소년은 딱 봐도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듯했다.

즉, 상급 기사의 경지. 자신이 20년간 도달하지 못한 그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에 충격을 안 받으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하, 하하하. 결국 나도 필부였단 말인가? 아니지, 필부가 된 거라고 해야 옳겠군.”

“갑자기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도련님. 그저… 도련님 정도라면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즐겁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아아아!”

‘엑?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젤커드 자작이 마나 호흡을 크게 하기 시작하자, 그의 몸에 둘러진 푸른 오러의 기류가 짙어졌다.

베오날드는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의 ‘전력’이라는 발언과 심상치 않은 기운에 경계하며 짓쳐들어오는 그의 공격을 받아 냈다.

‘이 작자! 내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그러니까 이 난리를 피우지!’

“전력을 다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군요! 하! 확실하게 저보다 강한 자는 이 근처에선 말데로브 경밖에 없었으니까요!”

“큭! 아니!”

전력을 다하는 젤커드 경은 신났지만 베오날드는 죽을 맛이었다.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공격을 받아 주는 입장. 거기에 힘 조절을 아직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손을 대기가 껄끄러워 결국 소심한 반격 정도나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젤커드 자작은 아주 좋아했다.

“오오… 역시 신이 내린 이 창조의 기적 앞에선 인간은 얼마나 허무한가!”

‘내 재능 같은 걸 생각하나 본데! 아니라고! 이 검술! 검법! 모두 인간의 의지로 만든 거라고!’

자신을 천연 기사로 오해한 데다 제대로 된 반격을 안 하니 ‘검법’에 대해서 모르는 젤커드 자작의 말이었지만 베오날드는 찜찜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 검술, 마나 호흡법, 모두가 그가 있던 노이멀 가문의 상향심이 만들어 낸 유산들인데, 일방적으로 내려진 신의 기적 취급을 당할 줄이야.

물론 15살이 가질 수 없는 역량에 감탄해서 나온 반응이라는 걸 알았기에 딱 거기까지였다.

“그나저나! 자작님! 이 대련,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둘 중 하나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겠죠? 하핫!”

“…아니, 기사급끼리의 체력을 생각하셔야…….”

“비싼 돈 냈는데, 값어치는 해야지 않습니까? 도련님! 흠!”

채애애앵!

강하게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막으며, 베오날드는 그렇게 젤커드 자작이 지칠 때까지 계속 검술 상대를 해 주었다.

젤커드 자작의 말대로 대련 한 번에 금화 700개만큼의 값어치는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베오날드는 그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약 2시간 동안이나 검술을 받아 줘야만 했다.

“하아… 하아…….”

“이렇게 땀 흘려 본 적은 참 오랜만이군요. 하하하핫!”

‘힘든 게 뭐가 즐거운 건데? 아드레날린 중독인가? 진짜 나도 단련했지만 근육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마나를 이용해서 신체가 강화된 ‘기사’들의 체력은 일반인과 달랐다. 젤커드 자작은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게 땀을 흘리고 몸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베오날드 쪽도 힘 조절에 신경 쓰면서 젤커드 자작을 상대해야 했기에 마찬가지로 지쳐 쓰러진 채였다.

그는 근본부터가 저런 땀과 근육으로만 가득한 운동계가 아니라 효율과 이성을 중시하는 두뇌파라서, 지친 상태에서 즐거워하는 그의 감성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이제 되셨습니까?”

“예,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하하하. 그나저나 베오날드 도련님, 이 정도 능력이라면 충분히…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지혜와 무용을 모두 겸비하신 혈통인데 말이죠.”

“용병의 더러운 피가 절반인데…어불성설이죠.”

“지금 시대에 그 잘난 혈통이 뭐가 중요합니까?”

“자작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꽤 중요합니다. 혈통이라는 거 말이죠.”

전형적인 실력주의 사상을 가진 젤커드 자작의 말에 베오날드는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던 것을 떠올렸다.

왕당파 말석의 백작이 되었을 때, 자신의 연금술 지혜와 힘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았던 혈기왕성한 시절. 당연히 독자적으로 여러 사업을 벌였다가 큰코다친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때 생각하면 참~ 나도 어리석었지. 그냥 무지성으로 상업이니 개발이니 같은 거 하면 다 잘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그건 어디까지나 치열한 귀족 간의 정치판을 견제하고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겨우겨우 깨달은 베오날드였다.

물론 이제는 완숙된 몸이기에 그런 혈기에 취하는 실수는 안 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난세입니다. 베오날드 도련님 같은 영웅이 활약하기 더없이 좋은 시대이지요. 여섯 나라가 서로 자웅을 겨루는 이 현실 속에서 결국 힘과 능력이 전부 아니겠습니까?”

“예. 뭐,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캘러메인 백작가는 별로 먹을 곳이 못 됩니다. 여긴 그래도 아직 혈통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가문이니까요.”

“…제가 도와드려도 말입니까?”

“먹는다 쳐도 델마인 남작 같은 자들의 반발로 못해도 내전으로 10년 이상 까먹을 테고, 주변 귀족들이 기생충처럼 몰려들어서 엉망진창이 될 건데, 그런 걸 먹을 필요가 있습니까? 평생 캘러메인 백작가의 질서 재정립이나 하다가 죽겠죠. 그 이후엔 뭘 하고 싶어도 확장하기 힘들 거고! 안 먹는 게 나아요. 그따위 영지는!”

“그러면 그 힘과 지혜로 무엇을 드시려고 합니까? 도련님.”

“이 대륙.”

“하! 하하하하하핫!”

젤커드 자작은 터무니없는 베오날드의 말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캘러메인 백작가를 안 먹고 6개의 나라로 나뉜 이 거대한 대륙을 손에 넣을 야망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베오날드 또한 이미 한번 대륙을 손에 쥔 적이 있는 대귀족인 자신이 하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취급하는 젤커드 자작의 반응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물론 상당한 세력이 있는 백작가로 시작해서 한 번에 황제의 신임을 사서 권력을 쥐었지만, 그 이후 수십 년 동안이나 권력을 지킨 자신의 정치력과 국가 운영 능력에 대해선 스스로도 자신할 수 있을 정도인데 말이다.

‘이 양반이 날 무시하나? 하아~ 그냥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15살로밖에 안 보일 테니……. 게다가 난 여신에게서 그 임무를 받고 온 거라고!’

결국 여신이 내린 지령인 용사를 돕기 위해선 이 대륙의 정세를 손에 쥐어야 하니 신의 뜻과도 일치하는바, 부정할 요소라곤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어느샌가 젤커드 자작의 웃음소리가 끊긴 것을 깨닫고 베오날드가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자마자 보인 것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젤커드 자작의 모습이었다.

“…저기, 자작님?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일이신지?”

“저는 베오날드 도련님이 꾸는 꿈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부디 소신도 베오날드 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저의 이 몸과 가문을 바쳐서 도련님이 하시는 일을 돕겠습니다.”

‘이거 참 골치 아프네. 나에 대해 상당히 깊은 오해가 새겨진 것 같은데… 성향 더럽게 안 맞을 텐데…….’

굳이 따지면 전통 대귀족의 성향에 가까운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 같은 실력주의 인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영 껄끄러웠다.

차라리 부하를 둔다면 그로선 델마인 남작같이 생각을 읽기 쉽고, 계산에 따라서 움직여 주는 타입이 편했다.

그렇기에 예상외의 행동의 연속인 젤커드 자작의 제안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금화 700개를 맡아 줘야 하니, 영 껄끄럽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또 안 받아들이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도련님?”

“자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순 있습니다. 하지만 전 아직 모자란 게 너무 많습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실험해야 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제가 20살이 될 때까진 결정에 유예를 두었으면 합니다.”

“으으음…….”

“또 혹시나 그때 되면 생각이 달라지실 수도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젤커드 자작이 생각하기에도 베오날드의 설명은 이해가 가는 것이었기에 승낙은 했지만, 이해한 것과는 별개로 그는 이미 주군을 모시는 신하인 양 베오날드를 대하기 시작했다.

검과 물건들을 솔선수범해서 치우질 않나, 엄연히 이 영지의 주인인데 무슨 집사라도 된 양 앞장서서 수련실의 문을 열지를 않나, 목욕의 준비가 끝나니 베오날드부터 밀어 넣질 않나.

‘이 망할 기사, 말이 정말 안 통해!’

“하하하, 도련님, 어떠십니까? 물의 온도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예. 좋습니다.”

분명 자금과 각종 물자를 비밀리에 공수해 줄 수 있으며, 캘러메인 백작가 아래 한 파벌의 수장이 부하가 된 건 큰 수확이었다.

하지만 저 성향은 다루기가 성가실 거라고 생각한 베오날드는 오늘의 성과가 과연 득인지 실인지 열심히 계산을 하며 목욕을 마쳤다.

그리고 본래 오늘 떠나려고 했던 젤커드 자작의 저택에서 결국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식사 자리에서부터 계속해서 떠들며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그에게 맞춰 주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식사는 마음에 드시는지요? 그러고 보니 계속해서 베오날드 도련님의 의사를 전하고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아, 하긴 그렇겠네요. 금화 700개를 또 막 들고 다니는 것도 문제고…….”

“마침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있습니다. 더구나 일손을 도울 수도 있고 말이죠. 얘야! 어서 들어오렴.”

쿵! 쿵!

젤커드 자작이 박수를 치자, 멀리서 묵직한 쇳소리와 발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무거운 갑옷이라도 입은 건가 싶어 모습을 드러낸 자에게로 시선을 옮기는데, 그곳엔 풀 플레이트로 완전 무장을 한 ‘기사’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특징은 베오날드보다도 큰 거구의 장신으로, 키만 족히 190센티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전령이라기엔… 좀 크군요. 게다가 보아하니… 마나가 느껴지는 걸 봐선 진짜 ‘기사’ 같은데… 그러면 엄연히 영지의 주요한 전력이 아닐지?”

“제 충성심의 증거입니다. 하하핫! 자, 투구를 벗고 인사드리렴. 하이디.”

“예, 아버님.”

투구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묘하게 하이 톤인 것에 깜짝 놀란 베오날드는 눈앞의 상대가 투구를 벗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투구를 벗자마자 드러난 건 연한 금색의 머리카락과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외모의 여성이었다.

기사인 것도 놀라운데, 여성이라는 점에 베오날드는 더더욱 깜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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