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물론 불쾌한 소리인 건 압니다, 남작님. 하지만 들어 보십시오. 결국 지금은 난세입니다. 강력한 검과 말발굽 앞에 오랜 전통과 긍지, 명예가 무너지는 시대이고, 너도나도 왕이니 황제니 떠드는 시대입니다. 볼레아 왕국, 고작해야 북방 야만인들과 싸우던 촌구석 야만인들 주제에 자기가 왕이라고 떠들질 않나, 다이나 왕국은 마탑에 열등감을 가져서 금지된 실험이나 하던 놈들이 왕이니 뭐니 하고 있고… 푸하하하!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 그런가요?”
“그중에서도 특히 어처구니없는 건 ‘한 제국’이지요. 500년 전만 해도 부족 단위로 놀던 남쪽의 소수 민족이었는데… 제국이라니, 참~ 어처구니없지만, 그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남작님.”
“그, 그래서? 요점이 뭔가요?”
“그러니 때로는 내키지 않아도 험악한 관계 정도는 개선해 두는 게 좋다는 겁니다. 예, 젤커드 자작과 말입니다. 또 랄트 도련님의 정신도 성장시켜서 모친의 영향이 아닌 자신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주인이라는 것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장래에 다가올 혼돈을 막고자 하는 것이지요. 후우~”
긴 이야기를 마친 베오날드는 숨을 몰아쉬면서 차를 들이켰다.
그동안 델마인 남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즉, 요점은 베오날드의 구상에 따라서 랄트의 성장을 돕는 것을 도와주는 게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할 수 있는 일이며, 추가로 젤커드 자작과 관계도 우호적으로 돌리는 게 좋다는 장대한 브리핑이었다.
“두서없이 이야기해 버렸군요. 아무튼 나쁜 제안은 아니니 생각해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저는… 같은 제안을 젤커드 자작에게 하러 가야 해서~”
“예, 도련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떠난 뒤에, 좀 더 깊게 생각하기 위해서 정보를 모으던 델마인 남작은 상황을 파악하면 할수록 베오날드가 얼마나 대단한 수를 두었는지를 알게 되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테알 슬럼가의 문제는… 캘러메인 백작님이 내리신 임무. 그것을 해결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막대한 재보를 가져온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그 막대한 재보를 스스로 소유한 게 아니라…….”
캘러메인 백작 아래 파벌로 자리 잡고 있는 귀족인 자신과 젤커드 자작에게 흔쾌히 넘기면서 귀족으로서의 전통과 현실을 모두 고려한 비전을 제시해서 자신의 입지를 단숨에 세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 비전은 허무맹랑한 내용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기에 거부할 수도 없는 것. 너무나 좋은 제안이고 상황이었지만 역으로 고작 15살짜리에게 쉽게 지배당하는 기분을 느낀 델마인 남작은 불쾌감과 소름이 동시에 돋았지만 이윽고 인정하게 되었다.
“백작 대리님이…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군. 게다가 생각해 보면 그 더스티클록 영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 모두 다 저분의 짓이었겠군. 하하하!”
베오날드가 태어난 곳은 엄연히 시골 더스티클록 영지. 그곳의 분쟁에 손을 댔다가 귀중한 기사 2명을 잃은 적이 있는 델마인 남작은 이제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정도 책략을 짤 수 있는 두뇌를 지녔다면 몇 살 어려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니……. 드디어 범인을 찾아낸 그였지만,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인 것에 웃으며 이젠 그와 손을 잡게 된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
그리고 델마인 남작의 영지를 떠난 베오날드는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젤커드 자작에게 남은 재보를 바치고 그와의 관계도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이쪽은 델마인 남작보다 생각도 유연하고, 무인(武人)이자 전장에 나선 경험이 많아서인지 실리적이었다.
그는 베오날드의 제안을 전혀 기분 나빠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음, 역시 가주 대리님께서 양자로 삼으신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군요, 도련님.”
“과찬이십니다, 자작님. 아무튼 저는 그럼 이제…….”
“도련님, 하나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예? 부탁?”
쉽게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베오날드는 의아해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젤커드 자작은 베오날드에게 다가와서 검집째로 검을 들어 보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베오날드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지금 딱 좋게 이야기를 결말지은 마당에 무례한 짓을 저지를 순 없었다.
‘뭘 하려는 거지?’
“그냥 가시면 섭섭하니 대련 한 수 어떠신지요? 말로 하는 대화도 좋지만, 역시 그 흉흉한 테알 슬럼가를 제패한 무용을 한번 보고 싶군요.”
‘하여간 기사들이란…….’
상상도 못한 제안에 베오날드는 급하게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젤커드 자작은 ‘중급 기사’로 이 캘러메인 영지의 세력권에서 상당한 무위를 자랑했다.
중급 기사 중에서도 최상위의 실력을 지녀서 상급 기사 후보로 떠오르는 자였던 것이다.
지금은 일단 마나를 잘 갈무리해서 들키지 않고 있었지만, 그와 겨루었다가 자신이 기사라는 것을 들키게 될까 두려웠던 베오날드는 거절했다.
“아… 그게, 지금 다른 일로 시간이 없어서 말입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으면 합니다, 자작님. 그리고 저 테알 슬럼가의 경우엔 3개로 나뉜 파벌의 사이를 이간질해서 얻은 성과이지, 제 무용으로 얻은 것은 아닙니다.”
“흐음… 그렇다곤 해도 소문에 의하면 도련님은 홀로 새끼 그리폰을 잡으시고, 곰을 비롯한 각종 맹수를 사냥하신 용맹한 분입니다. 특히나 어지간한 위험 지역보다 더 위험한 테알 슬럼가를 제패하셨으니… 그 담력과 용맹은 배우고 싶을 정도겠지요.”
‘하여간 무인들이란!’
“하긴, 귀중한 시간을 맨입으로 빼앗을 순 없겠지요. 좋습니다. 대련을 한 번 해 주신다면 갖고 오신 재보 전부를 베오날드 도련님의 것으로 하지요. 제가 보관할 테니 언제든 찾아가시면 됩니다.”
파사삭!
젤커드 자작의 말에 열심히 계산을 하던 베오날드의 주판이 순식간에 부서진다.
베오날드는 검술을 배우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태어난 가문의 상황과 자신의 혈통의 불리함을 뒤집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순수한 무인의 마음가짐과 상향심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던 베오날드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순간 멈칫해 버린 것이다.
“…뭐, 뭐라고요?”
“뭣하면 신관님을 불러서 공증을 하도록 하지요. 수수료가 조금 들겠지만, 이런 일에 적격 아니겠습니까?”
“아, 아니, 정말로 대련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무튼 하시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베오날드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뇌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 재보들을 자신이 보관하고 쓰기 힘들어서 정치적 목적으로 젤커드 자작과 델마인 남작에게 넘겨 버린 것이었지만, 마음 같아선 자신이 모두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의 주 전공인 연금술은 말 그대로 돈 먹는 하마 같은 학문이었기에 돈을 가질 수 있으면 무조건 가지고 싶었다.
‘전쟁으로 사용한 자금이 빠지고, 급하게 처분할 수 있는 것들만 추리고, 다크티스에게 준 절반을 빼서 내 몫이 된 금화는 약 1,400개. 그것을 델마인 남작과 젤커드 자작에게 각각 나눴으니 약 700개… 대련 한 번에 금화 700개. 끄으으으으응!’
“어떠신지요?”
“정 그렇다면 하도록 하지요.”
대련 한 번에 금화 700개. 이건 손익 계산이 도무지 안 되는 건이라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베오날드는 젤커드 자작을 따라서 그의 개인 수련실로 갔고, 경무장과 검을 받아서 대련을 준비했다.
무가(武家)라서 그런지 비법을 지키기 위한 수련실은 석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보안이 철저한 건지 단둘만 들어온 베오날드와 젤커드 자작이었다.
검을 뽑은 베오날드는 예리하게 갈려 있는 날을 보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젤커드 자작을 바라보았다.
“으음… 이거 진검 대련입니까?”
“걱정 마십시오. 손속은 두겠습니다. 또 여차할 경우를 대비해서 신관님을 밖에 불러 놨으니 부상 걱정은 없을 겁니다.”
“후우우~”
“하하하, 너무 그렇게 부담 안 가지셔도 됩니다.”
“아뇨. 그러니까…….”
자신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예리하게 빛나는 검을 받아서 난감한 건 베오날드 측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라면 전력을 다하면 되지만, 베오날드는 그동안 누구와 함께 단련을 하거나 목숨을 걸지 않은 대련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대련 자체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중급 기사인데…….’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후우우~ 내가 돈에 눈이 멀었지. 젠장!’
생전에도 이렇게 계산 자체가 깨져 버리는 상황에서는 정신 차리기가 힘들었던 베오날드는 겨우 정신을 다잡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제대로 이야기가 안 된 채로 싸우다가 젤커드 자작이 다치거나 죽게 되면 상황이 왕창 꼬여 버리는 것이다.
결국 한숨을 크게 쉰 베오날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자작님, 하나만 맹세해 주십시오. 여기서 일어난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요. 기사와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모두 걸고 말이죠.”
“으음? 도련님께서 그걸 원하신다면 기꺼이… 맹세하죠.”
“후우~ 좋습니다. 그러면…….”
베오날드는 검을 뽑고, 마나를 끌어 올리면서 젤커드 자작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했기에 최대한 적게 마나를 끌어 올려서 아주 은은한 보랏빛 오러가 그의 몸에 둘러졌고, 그것을 본 젤커드 자작의 동공이 일순 커졌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역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어!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그랬군요. 베오날드 도련님은 천연 기사이셨군요.”
“가능하면 끝까지 감추고 싶은 카드였습니다만… 하아~ 내가 미쳤지. 혼자서 검술을 배웠고, 늘 실전만 했기에 손속을 둔 대련은 잘 못합니다. 그러니 몸조심하세요.”
“걱정 마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 이 젤커드, 엄연히 중급 기사이며, 10년 넘게 전장에서 싸워 온 몸입니다. 마음껏 들어오십시오. 선수는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패까지 드러내 줬고, 사전에 경고했으니… 이만하면 어떻게든 죽진… 않겠지? 오러로 몸을 감싸고 있고 말이지.’
선수를 양보한 젤커드 자작은 푸른 오러를 일으키면서 베오날드의 검에 맞설 준비를 했다.
그것을 본 베오날드는 방비가 되어 있다 생각하고 한번 그 힘을 테스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베오날드는 곧바로 발을 굴러서 시동을 걸어 달렸고, 보랏빛 잔상만을 남기며 그대로 검을 찔러 들어가는데, 젤커드 자작의 눈엔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어느새 검이 목에 날아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런! 흠!”
‘음, 좀 더 느리게 해야 하나? 내가 전생에 기사였어야 뭘 알지~’
“후우… 이, 이건 대체?”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검을 피한 젤커드 자작을 보며 베오날드는 아직도 감이 오지 않는 지금 시대의 ‘기사’들의 수준과 자신의 격차에 대해 고민하면서 전생의 지식에 대입하려 했지만, 본인이 기사가 아니었기에 도저히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나름 전력으로 한 회심의 공격이었는데… 하하하.”
하나 일단 젤커드 자작의 표정을 보니 그가 상상 이상으로 놀란 것 같아서 베오날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게 마치 전력인 것처럼 발언을 했다.
“그, 그렇습니까? 역시 그렇군요! 하하하,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강한 공격이라니……. 하하하, 도련님은 의표를 찌르는 데 능숙하시군요.”
‘…힘, 더 빼야겠다. 그리고 기왕 하는 것, 중급 기사의 수준에 대해서 확실히 파악하고 가자. 500년 전 기준이랑 확실히 다른 것 같으니. 우리 노이멀 가문은… 솔직히 무(武)로는 전통 무가(武家)들보다 수준이 낮았으니까.’
돈에 정신이 팔려서 결국 자신의 카드 하나를 보여 줘야 했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이 시대의 중급 기사인 젤커드 자작을 기준으로 전체적 무력 수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베오날드는 아까보다 더더욱 힘을 빼고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