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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38화 (38/259)

[38화]

‘뭐, 아주 모르고 죽으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지.’

씨익 웃은 베오날드는 땅에 구르는 말렉의 목을 챙겨 돌아갔다.

이미 전세는 다 기울어져서 바알라스의 조직원들이 아그라샌더 그룹의 인간들을 포로로 잡거나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알라스는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다가오는 베오날드를 보며 기뻐했다.

“오오! 역시 ‘기사’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용이군! 말렉의 목! 하하하하! 역시 굉장해. 돈 들인 보람이 있군.”

“받은 만큼은 일해야 하는 법이죠.”

“하하핫, 이걸로 이제 이 테알 슬럼가는 내 것이나 다름없군. 흐…….”

푹!

흥겨워하며 말렉의 목을 보고 웃던 바알은 갑자기 가슴에서 후끈한 통증이 일어나자 깜짝 놀랐다.

베오날드의 검이 바알의 심장을 찌른 것이었다.

놀라움과 죽음의 공포를 동시에 느끼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기 위해 베오날드를 노려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런데… 당신 목을 비싸게 쳐준다는 곳이 있어서 말이죠.”

“너… 이런…….”

“부하들까지 포함해서~”

베오날드는 바알이 죽는 것조차도 바라보지 않고, 그대로 보랏빛 잔상을 남긴 채로 달려가 놀라는 바알의 측근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이미 눈치를 챈 몇몇 놈들이 흩어져서 도망쳤지만, 그들은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다크티스의 암살자와 도적들에 의해 마저 제압됐다.

다크티스의 간부들은 바알의 목과 말렉의 목을 거두고는 베오날드에게 와서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사님.”

“난 대가만 받으면 그만이다.”

“예. 바알라스 조직과 아그라샌더 그룹의 재산 절반 확실히 정산해서 보내라고 하신 곳에 그 기간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렇다. 사실 베오날드가 손을 잡은 것은 바알라스와 아그라샌더뿐만이 아니라, 다크티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 그룹의 성향이나 사상을 살펴본 결과 다크티스가 이곳 테알 슬럼가의 주인이 되는 게 가장 조용할 거라고 판단해서 그들을 밀어준 것이었다.

바알라스 조직이 마약 산업까지 손에 쥘 경우나 아그라샌더가 바알라스 조직의 산업을 그대로 물려받으면 아무 변화가 없지만, 태생이 다른 도적&암살자 길드인 다크티스가 이곳을 차지하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번 싸움으로 깔린 시체들의 숫자를 대략 파악해 보면 전면전으로 인해 상당한 숫자의 불량배들이 죽었기에 당분간 테알 슬럼가는 예전만 한 위세를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다크티스가 지배 체제를 굳히는 시간과 또 여기저기서 불량배들이 흘러들어 오려면 족히 수년은 더 걸릴 테니 말이다.

‘게다가 또… 저 다섯 간부진이 지배하는 형태를 가진 만큼 언제 또 분열하고 서로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이게 가장 이상적이지.’

암살자와 도적 길드의 협력 구조. 지배 체제를 굳히고 나면 이제 슬슬 다섯 간부진들 각자가 이 테알 슬럼가의 유일한 주인이 되고 싶어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것을 위해 서로 싸운다면 최적의 정리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서로 견제하면서 지낼 테니 그나마 현실적으로 가장 깔끔하게 이 테알 슬럼가의 힘을 줄이고 정리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덤으로 이 선택지가 바로 다른 조직들보다 베오날드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으니, 다른 것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뭐,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 정리는 끝까지 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테알 슬럼가에 큰 혼돈을 불러와 이익을 챙긴 베오날드는 다크티스가 정리해서 가져올 바알라스와 아그라샌더 그룹의 재산들을 거둘 준비를 위해 곧바로 움직였다.

이 정리하는 작업까지 완벽하게 끝내야 테알 슬럼가의 평정은 끝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

며칠 뒤, 델마인 남작 영지 인근 숲.

베오날드는 우선 둘 중 정리되는 쪽의 재산을 오늘까지 먼저 이곳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었다.

혹시나 자신의 말을 거역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기사급의 힘을 봐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무력뿐만 아니라 음습한 계략을 꾸미는 베오날드의 능력을 눈치채서인지, 다크티스 조직은 당연히 베오날드의 명에 거역하지 않고 수레와 마차 여러 대에 금화와 예술품을 포함한 각종 재보를 실어서 가지고 왔다.

“그… 말과 수레의 비용도… 재산에 포함되었습니다.”

“음, 좋아. 그럼 가 보도록. 그리고 저기 나무 뒤에 있는 친구들도 같이 돌아가라고 말해 주게. 안 그러면 죽일 것 같거든?”

“히, 히이익! 예! 아, 알겠습니다.”

“나머지도 꼭 약속한 날에 맞춰서 잘 배달해 주게.”

그래도 그냥 주기는 아까웠는지 추적하는 인원을 붙인 것을 눈치챈 베오날드가 협박을 하자, 그제야 완벽하게 물러나는 다크티스의 조직원들이었다.

베오날드는 그들이 멀리 갔을 시간이 되어서야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잠시 후 델마인 영지 쪽에서 사람들이 다가왔다.

바로 델마인 남작의 병사와 기사들로, 그들은 사전에 베오날드와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앞서 온 말을 탄 기사는 베오날드의 옆에 놓인 수레를 보자 깜짝 놀라서 말했다.

“세상에, 이, 이게 사실이었습니까? 도련님?”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겠나? 자~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빨리 옮기게.”

“아, 알겠습니다! 다들 빨리 와서 이것들을 성으로 옮겨라!”

“예!”

그리고 기사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곧장 수레와 마차에 탑승해서 그것들을 델마인 남작의 영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것도 베오날드의 계획으로, 어차피 이 막대한 재보를 자신이 보관하거나 옮길 장소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으니 정치적으로라도 써먹고자 델마인 남작에게 절반을 넘기자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렇게 병사들이 나른 막대한 재보와 함께 델마인 남작의 저택에 들어온 베오날드는 그와 독대하게 되었다.

“하하하, 베오날드 도련님의 선물, 정말 잘 받았습니다.”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엄연히 적대 파벌이지만 그래도 엄청난 보물을 선물로 준 마당이니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귀한 복덩이를 가져다준 손님을 푸대접할 이유가 없는 델마인 남작이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밝은 표정으로 베오날드에게 최고급 차와 시녀까지 붙여 주면서 어떻게 이 막대한 재보를 얻었는지 묻기 시작했다.

“늘 그렇지만 영지라는 걸 유지하는 데 돈은 무한정 들어가니 말이죠. 하하하핫. 그나저나 어디서 이만큼의 재보를……?”

“백작님께서 테알 슬럼가의 일을 좀 보라고 하셔서 말이죠. 거기 분쟁에 살짝 끼어들어서 얻었습니다. 후우~ 하지만 결국 일은 실패하고 말았죠.”

“아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걸 저희에게……. 그래도 백작가에 바쳤다면 나쁜 평은 듣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델마인 남작의 말대로 백작이 내려 준 임무에 실패했을지언정 저만한 재보를 백작가에 모두 바쳤다면 베오날드의 평가는 오히려 올라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히려 손해만 끼친 저 테알 슬럼가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어서 영지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었으니 이건 누구나가 인정할 만한 큰 공훈이었다.

하나 베오날드는 고개를 저으면서 델마인 남작의 의견을 부정했다.

“그래 봐야 고작 칭찬 몇 마디가 다이고, 제 처지는 더 위험해질 뿐이겠죠. 그럴 바엔 차라리 이렇게 델마인 남작님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오해를 푸는 데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라? 하하, 도련님과 저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었나요?”

베오날드의 말에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하는 델마인 남작이었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모두 열심히 서로를 쳐다보면서 각자의 이득을 계산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귀족과 귀족의 시야.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자신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는 말입니다, 남작님. 제 분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캘러메인 백작님의 피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절반은 천한 용병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가주 대리님은 상관 안 하시지만 백작님을 비롯한 다른 귀족분들은 용납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크, 크흠! 그… 뭐, 아니라곤 말씀 못 드리겠군요.”

“솔직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결국 캘러메인 백작가의 후계자는 랄트 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고 있으니까요.”

델마인 남작의 눈이 커질 정도로 의외인 이야기가 베오날드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델마인 남작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말에는 의도가 깔려 있을 확률이 높고, 또 귀족이라면 마음에 없는 말도 진실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재주가 있으니 말이다.

“호오? 진심이십니까? 하면 왜 가주 대리님의 양자 제안을 승낙하신 건지?”

“그야 랄트 도련님이 지금 이대로 후계자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작님.”

“흠~ 글쎄요. 물론 지금은 좀 부족할지는 몰라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생각 안 하는 건 무례한 게 아닐는지요.”

“무능하면 물론 남작님에게도 좋겠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생충도 숙주가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지금 저보고 기생충이라고 한 겁니까? 도련님.”

의도적으로 델마인 남작을 멸시하는 호칭을 섞어서 도발한 베오날드. 그 도발에 넘어간 델마인 남작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면서 베오날드를 강하게 노려봤지만, 베오날드는 능구렁이처럼 머리를 숙여 사과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적절한 표현이 없다 보니 말이죠. 그러면 역으로 물어볼까요? 캘러메인 백작가가 갑자기 몰락하면 델마인 남작님이 그 아래의 다른 귀족들과 세력을 모두 규합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으으으음!”

무례한 베오날드의 말에 화낼 것처럼 위협하긴 했지만, 그다음 곧장 나온 말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져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델마인 남작이었다.

그래, 캘러메인 백작 아래에서 최대 파벌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파벌 전체를 마음껏 휘두르는 입장은 아니었다.

당장 메이라 부인과 그녀의 본가만 해도 자신과 같은 파벌이지만 상황에 따라선 자신이 후달릴 때도 있지 않은가?

“누가 봐도 메이라 부인과 그녀의 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게 분명하죠. 그녀의 본가는 분명 델마인 남작님보단 한 수 아래라 볼 수 있지만, 메이라 부인에겐 ‘정통’의 ‘혈통’인 랄트 도련님이 있습니다. 메이라 부인은 캘러메인 백작가의 일부를 손에 쥘 자격이 있지요.”

“…고로 나는 안 되지만, 메이라 부인은 캘러메인의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순탄하진 않겠지만, 결국 승리하는 건 그녀일 겁니다. 그 정통성을 쥐고 있는 이상, 상급 기사 말데로브 경도 그녀를 따를 테니까요. 그러면 이길 수 없겠지요?”

‘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기껏해야 용병의 천한 피를 받은 15살짜리……! 아니지, 이게 갓 성인이 된 시골 출신 도련님이라고?’

흥분한 가슴을 진정시킨 델마인 남작은 문득 자신이 현재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고작 15살짜리 시골 출신 소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나 눈앞에서 기품 있게 찻잔을 들어 마시는 소년은 어디를 보아도 품격이 느껴지는 한 사람의 ‘귀족’이었다.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어. 베오날드 도련님이 15살이라는걸!’

자신은 15살 때 어땠던가? 가주였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어설픈 행동들을 하나하나 고쳐 가던 것과는 천지 차이로, 눈앞의 이 소년은 자신과 대등하게 이야기해 나가며 의견을 조율하는 수준이었다.

같은 나이 때, 자신은 영지 내의 상인과 인부들에게도 큰소리치기 힘들었는데!

오싹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는 그에게 베오날드는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아무튼 제 목적은 하나입니다. 캘러메인 백작가에 큰 혼란이 생기지 않는 평화로운 미래. 그래야만 제 친부모님들도 무사하실 테니까요. 그래서 랄트 도련님이 메이라 부인에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또 그분이 캘러메인 백작가의 힘을 혼자 휘두르지 않게 견제할 수 있는 힘을 누군가가 가지는 것. 델마인 남작님이 바로 그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 그렇군. 하지만 도련님이 가져온 재화로는 그 엄청난 계획을 이루긴 힘들 텐데요.”

“당연히 남작님만으로는 힘들 겁니다. 상대의 가문이 2개이니까요. 캘러메인은 그래도 적어도 백작가이고, 중앙에 연줄까지 있습니다. 또 따르는 집안도 많고 말이죠. 그러니 밸런스를 맞추려면 젤커드 자작과 손을 잡아야겠죠.”

“젤커드 자작이라고요?”

“예.”

베오날드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발언에 델마인 남작은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젤커드 자작. 자신과는 다른 상대 파벌의 수장.

집안은 별 볼 일 없으면서도 ‘기사’이자 지휘관이라는 것만으로 작위를 얻은 자로, 순수 캘러메인 영지의 수호자가 말데로브 경이라면 젤커드 경은 캘러메인 백작가에 속한 군벌에 가까운 세력이었다.

아무튼 결국 이 난세에 ‘검’ 하나만으로 작위를 얻은 자이며 귀족으로서의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서 델마인 남작 같은 전통 귀족들은 싫어하는 이였는데, 갑자기 베오날드의 입에서 그와 손잡자는 이야기가 나오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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