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아무튼 역시 이런 건 안에서 깨부수는 게 백번 편하지. 외부의 힘으로 부수려고 하니까 그동안 실패한 거다.’
기사들이 다수 있는 캘러메인 백작가에서 해결 못한 이유를 곧바로 떠올리는 베오날드였다.
이런 조직은 평소엔 서로를 멸망시키려고 싸우더라도 이 ‘테알 슬럼가’라고 하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선 서로 뭉치고 협력할 수 있는 놈들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단순히 무력으로 테알 슬럼가를 모조리 쓸어버린다고 해도 도망친 놈들로 인해 새로운 테알 슬럼가가 생길 뿐이고, 조직 단위로 쓸어서 없애면 그 자리에 다른 조직들이 새로이 생겨날 뿐이다.
이 캘러메인 영지라는 시장과 도시가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걸 막으려면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 압도적인 행정력과 질서 유지 능력을 보유하든가, 아니면 이렇게 내분으로 폭파시킨 다음 바지 사장을 만들어서 휘두르는 방법뿐이었다.
‘아무튼 드디어 결말이 다가오는군. 확실한 마무리까지 긴장 풀지 말고 일해 볼까?’
“어디로 가십니까?”
“그야~ 순찰 한번 해 보는 거지. 먹고 마시기만 하면 미안하잖아요. 어떤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고~”
그렇게 베오날드는 사실상 감시역인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을 데리고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순찰이 아니라, 이 분쟁을 더 크게 키울 마지막 폭탄을 놓기 위함이었다.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이 따라붙긴 하지만 그래 봐야 무지렁이들. 베오날드의 수작을 아무도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음, 저기가 바알라스의 창고군.”
“예. 심장이나 다름없기에 가장 엄격히 관리되고 있는 곳입니다. 상시 가장 많은 규모의 조직원과 마법 결계까지 설치되어 있지요. 각종 물건에서 수금한 돈들까지 중요한 게 전부 보관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으쌰! 야! 힘 안 주냐? 빨랑 가! 옮길 게 한둘이 아니야!”
“예!”
마침 순찰하는 그들의 옆으로 수레를 이용해서 돈과 무기, 주류를 옮기는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이 보였다.
아그라샌더 그룹과의 전쟁 전인 만큼 중요한 물자와 자금을 더 안전한 곳에 모아 두는 건 상식. 베오날드는 그 수레들의 행렬을 보다가 슬쩍 아래에 작은 주머니 3개를 떨어뜨렸다.
“아, 이봐, 거기~ 이거 수레에서 떨어뜨린 것 같은데? 무게를 보니 돈이 든 것 같은데.”
“네? 으악! 크, 큰일 날 뻔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짜식아! 일 제대로 안 해? 이게 다 우리 조직 운영비인데!”
베오날드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은 아무 의심 없이 베오날드에게서 그것을 받아서 수레에 실었다.
그리고 뒤에서 감시하는 바알라스 조직의 부하들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도리어 베오날드가 떨어뜨린 주머니를 진짜 떨어뜨린 걸로 착각하고는 그 수레를 끈 부하를 질책했다.
그것을 보며 베오날드는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면서 계속해서 순찰을 연기하며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
며칠 뒤, 테알 슬럼가 중앙 골목.
드디어 세 조직의 회담이 성사되었고, 회담 장소는 이 슬럼가에서 그나마 넓은 장소가 있는 중앙 골목으로 정해졌다.
3개의 조직과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용병, 거기에 구경을 나온 슬럼가 식구들까지 합쳐서 모인 인파의 총 숫자는 약 1천 명가량. 그나마 넓다곤 하지만 이 골목은 사람들로 가득 찬 지 오래였고, 주변 건물에도 가득 차서 마치 미로에 쥐들을 잔뜩 풀어 둔 것처럼 사방이 북새통이었다.
“자, 조직 대표들은 다 모인 것 같으니… 어디 한번 이야기나 들어 보자고~ 바알, 그리고 12345 친구들~”
“애초에 이 전쟁을 시작하려고 한 건 자네 아닌가? 오히려 이야기는 우리가 들어야지.”
“하! 뻔뻔스럽긴! 남의 밥줄을 끊으려고 작정한 게 누군데! 바알, 이 양아치 새끼야! 술장사, 여자 장사로 그렇게 벌었으면 된 거지! 남의 밥상까지 노려?”
“무슨 헛소리냐? 약팔이 새끼들아, 너네가 돈 버는 꼴이 꼴받긴 했지만 우리가 하루아침에 마약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냐?”
“지랄하고 있네! 우리 신제품이랑 연금술사 어딨어?”
결국엔 이자들 모두 근본은 범죄자들이면서 무법자. 회담 자리라곤 할 수 없는 저열한 어휘와 표현으로 서로에 대한 비방을 하기 시작하는 말렉과 바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크티스 쪽은 그냥 입을 닫은 채로 말다툼을 하는 그들을 지켜보았고, 바알 쪽 호위로 서 있던 베오날드는 이 슬럼가 양아치들의 품위와 지성 없는 대화에 검을 휘두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 냈다.
‘후우~ 내가 참는다. 이건 회담이 아니라 사실상 그냥 패싸움 전에 하는 양아치들 기 싸움이네.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지.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내가 손써 놓은 게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는데?’
회담 중에 바알라스가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창고와 여러 곳의 확인을 요구하는 흐름으로 갈 것을 예상해서 바알라스 조직의 창고에 자신이 만든 환상의 꽃 마약을 슬쩍 넣어 두었는데, 이런 막장 싸움으로 가니 그런 수고가 허무하게 끝날 것 같았다.
“당장 우리 연금술사 내놔!”
“우리한테 없다고! 멍청한 약팔이 새끼들아! 그걸 왜 가져가?”
“아니면 제거해서 강에 파묻었냐?”
“대체 무슨 약을 만들었기에 그 지X을 하는 건데? 약팔이 자식아. 약이 다 그게 그거 아니냐?”
“뭐야? 너 지금 우리 업계 모욕했냐? 짜샤? 진짜 약 맛(?) 좀 볼래?”
“약이 그럼 그게 그거지.”
어린아이들 말다툼 레벨까지 전락한 대화에 베오날드는 암담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쨌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싸움을 준비했다.
하나 그 순간, 말렉이 갑자기 노예를 끌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품에서 가루가 든 주머니를 꺼내 곧바로 노예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잠시 뒤, 노예는 발작하면서 마약, 환상의 꽃의 쾌락에 절규하기 시작했다.
“끼요오옷! 흐에헤헤헤으헤헤! 으아… 어어어어!”
“그게 그거? 이게 그게 그거로 보이냐?”
“…저, 저게 뭐야?”
“맙소사…….”
바알은 물론이고, 이 촌스러운 싸움을 지켜보던 다크티스의 간부들도 경악했다.
말렉의 충격적인 행동도 행동이었지만, 이 캘러메인 영지에서 범죄 조직으로 쭉 군림하던 그들에게도 저 하얀 가루로 된 마약으로 인해 일어난 반응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오날드는 좌중들의 그런 반응을 보면서 500년간 후퇴한 문명과 결국 거창하게 이름 지었어도 시골 양아치는 시골 양아치들이라는 한계를 또 한 번 느꼈다.
“자, 봤지? 이 혁신적인 신제품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가 왜 중요한 건지? 단순히 나른함과 편안함, 무기력함과 중독성이 있던 그 풀때기에 비하면 이건 신이 내린 약이라고!”
“아니, 그런 위험한 걸 여기다 유통시키려 했다고?”
“희석해서 쓰면 괜찮아! 하하하하핫! 그리고 술장사하는 놈 입에서 그따위 말이 나오니 우습네! 아무튼 우리 연금술사 어딨어? 어딨냐고!”
“없다고! 미친 약팔이 새끼야! 이 반응 보면 모르겠냐? 그 정도일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알까 보냐! 아무튼 퉷! 어디 한바탕해 보자고! 얘들아! 족쳐!”
결국 ‘회담’이라고 모여 놓고 서로 신경전만 벌이다가 발끈한 말렉의 말과 함께 본격적으로 테알 슬럼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좁은 골목과 길거리 각지에서 용병과 각 조직원, 불량배들이 서로 무기를 들고 싸우면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조직원들을 검으로 베어 넘기면서 일단 밥값을 하는 척을 했다.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일식(一式)-살무사.’
“무, 무슨! 컥!”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기인 줄 알고 검을 들어 방어하려 했지만 갑자기 궤도를 바꾸는 검격에 목이 그대로 달아나는 용병이었다.
검째로 벨 수 있었지만, 가능한 한 힘을 아끼고자 베오날드는 달려드는 자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며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암기 또한 방어해 냈다.
“젠장! 저 막장 약팔이 새끼! 기어이 일을 저지르는구나! 가끔 보면 저 새끼도 마약 하는 것 같다니까?”
“약팔이들은 보통 약을 안 합니다만?”
“비유가 그렇다는 거죠, 기사님! 자, 방어는 제 부하들에게 맡기고! 기사님은 가서 저 말렉의 목을 따 와 주십시오. 저놈의 목이 있어야 이 싸움이 끝납니다!”
“죽어! 죽어!”
“으아아아! 와아아!”
이 골목부터 시작해서 곳곳에서 벌어지는 난전. 일단 전투 상황은 역시 전문적으로 칼밥을 먹고 무장도 탄탄한 용병들이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막대한 돈을 들여 그들을 많이 고용한 아그라샌더 그룹이 전장에서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상황.
테알 슬럼가에서 일하는 불량배들은 대부분 허세 부리고, 약자만 괴롭히던 놈들이며 무장에 투자를 잘 안 하는 놈들이기에 자신들이 상대가 안 되는 걸 알고 같은 다른 조직의 불량배를 공격하거나 아니면 돌이나 활 같은 원거리 무기로 상대하고 있었다.
“크억!”
“젠장! 다크니스 자식들!”
“다들 챙겨 온 해독약 먹어!”
“제길! 대체 어떻게 조합한 독이기에!”
하나 본래라면 아그라샌더 그룹의 압도적인 전력에 모조리 쓰레기처럼 쓸려 나가야 했지만, 그나마 분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다크티스의 협력 덕분이었다.
각종 암기와 독, 암살과 도둑질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들 조직원들이 곳곳에서 지원해 준 덕분에 자기 목숨 귀한 줄 아는 용병들은 방패를 들고서 진을 짜고 전진 속도를 늦추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의 꽃은… 기사지.’
‘황실 기사단 아류 노이멀 이식(二式)-블랙 맘바’.
보랏빛 오러를 두르고 질주한 베오날드는 검을 크게 들어 마음 가는 대로 휘둘렀다.
남부 정글에 서식하는, 시체까지 공격하는 성격이 더러운 검은 뱀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이 검. 귀족의 기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다른 검법들은 모두 섬세하고 예리한 반면 유일하게 난폭한 검술이었다.
하나 이런 난전에선 최적의 검술로, 오러를 두른 베오날드의 검에 용병들의 방진은 마치 두부처럼 손쉽게 무너지며 그의 검에 닿는 모든 것이 분쇄기에 갈리는 고기처럼 자비 없이 갈려 나갔다.
“지, 진짜 기사급?”
“말도 안 돼! 기사급이 여기 왜 있어?”
“허세 아니고 진짜였어? 말렉 개자식아!”
전열의 용병들이 비명도 못 지르고 갈려 나가고, 보랏빛 오러와 함께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흉광을 본 후열의 용병들은 익히 전장에서 본 ‘기사급’ 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그러면 이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바닥에 시체만 늘리는 일이라는 걸 아는 그들은 각자 무기도 버리고 잽싸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야 이 새끼들아! 이게 뭐 하는 거야?”
“기사급을 어떻게 이기냐? 나중에 위약금 배상할게!”
“심지어 저거 하급도 아니야! 중급은 족히 될 역량이야! 말렉 개새끼야!”
“바알 새끼, 어디서 저런 걸!”
‘제, 젠장할! 아니! 망할 자식! 내가 돈을 얼마나 줬는데? 우리 용병들을 이렇게 처치하며 온다고?’
말렉은 그래도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베오날드에게 나름 대가를 지불했는데, 상대는 그런 것을 잊었는지 미친 듯이 돌파해 오고 있었고, 그것을 보며 말렉은 분을 삭였다.
기사급의 등장이 진실로 밝혀지면서 전황은 다시 뒤집어졌다.
전쟁에 이골이 난 용병들도 도망을 치는 판국에 일개 불량배들은 보랏빛 오러를 보자마자 이미 공포에 질려서 도망친 뒤였다.
“제, 젠장할! 네놈! 우리도 섭섭지 않게 대가를 지불했는데……! 돈만 먹고 튄 거냐?”
그래도 두목이라고 체면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사급을 상대로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치지 못한다는 걸 인식한 것일까?
말렉은 베오날드를 향해 비겁하다고 책망했지만 그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새삼~ 마약팔이 새끼들에게 의리를 왜 지켜? 너희는 사람을 마약에 중독시켜서 골수까지 빨아먹는 주제에, 그렇게 당하는 게 억울하나?”
“망할 새끼.”
“그래도 뭐, 너는 내 계획대로 아주 잘 움직여 줬어. 고맙다는 이야기 정도는 해 두지.”
“뭐라…….”
오늘 처음 직접 만난 기사의 알 수 없는 말에 말렉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질문을 하려고 하지만, 이미 보랏빛 오러가 그의 눈앞을 지나간 지 오래였다.
‘죽음’의 감각을 느끼는 동시에 말렉의 눈동자엔 베오날드의 손에 살짝 들려 있는… 변색된 피부 가죽이 비춰졌고, 죽어 가는 그 순간에야 말렉은 자신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