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와 줘서 고맙네. 출신은? 이름이 뭔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아볼 수 있을까? 자네와 계약하려면 견적을 짜야 하거든.”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저택에서만 수련하고 공부하니 이런 데까지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군.’
백작가에선 새로 들어온 다크호스였지만 이 테알 슬럼가에선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경쟁마 교육을 위해 양자로 들어간 자’, 한 줄로 끝나는 정보. 더구나 저택 내에서만 주로 생활을 했고, 일부러 분위기와 모습까지 다르게 위장을 했기에 알아볼 리가 없었다.
만약 알아봤다면 알아본 대로 꾸며 낸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모르면 그냥 편하게 적당히 떠벌리면 돼서 오히려 편해진 베오날드였다.
“이름은 없습니다. 그저 사정이 있어서 바람 따라 강 따라 떠도는 몸이니까요. 다만 돈이 되는 일거리가 있다는 소리에 델마인 영지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실력은… 모자라지만 검을 좀 씁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보…….”
“이 정도면 될까요?”
순간 바알의 눈앞에서 빛나는 보랏빛 오러가 맺힌 검. 바로 마나 호흡법을 익힌 ‘기사’의 증거였다.
인간을 넘어선 인간. ‘하급 기사’라고 해도 인간을 초월한 힘과 움직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귀족가(家)에서 영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용병계에 진출하면 못해도 작은 그룹의 대장 혹은 대형 길드의 간부로 들어갈 수 있는 레벨이었다.
“기, 기사? 마, 맙소사!”
“아뇨. 저는 기사가 아닙니다. 그저 비극의 산물이지요.”
“아… 아아! 그렇군! 그렇군. 사정이 있다는 거군! 이거 참! 기사급이라니! 하하핫! 이보게! 쟝 비서! 이 싸움, 이걸로 우리의 승리가 확정된 거나 다름없어! 하하핫!”
“돈만 제대로 지불하신다면 ‘검’이 되어 드리지요.”
“기사님을 상대로 장난칠 생각은 없네! 보수 이야기부터 하지.”
기사급 전력이 들어온 것은 이 불안한 상황에서 최고의 행운이었다. 베오날드의 노림수가 적중한 듯 바알은 극진히 그를 모시면서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다.
그리고 계약금부터가 ‘금화’ 단위로 엄청난 액수인 데다, 앞으로의 전황 및 상황에 따라서 추가적인 보수까지 든든하게 계약을 맺어 두었다.
‘다른 곳에 소문이 퍼지면 말렉 그놈이 더 큰 대가로 계약을 덮어 버릴 수 있으니… 든든하게 대접해 놔야지.’
‘무명(無名)과 떠돌이는 이게 좋지. 어디 속하는 약점이 없는 만큼 순수하게 대가로만 계산을 해야 한다는 게 말이야.’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먹고 튀는 건데… 하나 기사급 전력이 합류했다는 소문만 돌아도 전황은 달라진다!’
실제 영주 간의 전쟁도 아니고, 일개 슬럼가 양아치들 싸움에 기사급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면 상대는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바알은 그 점을 노리고 베오날드에게 큰 지출을 감안한 것이다.
베오날드 또한 그의 생각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확실하게 바알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를 받아 챙기고는 제안을 했다.
“그러면 경계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이 건물과 지켜야 할 영역을 안내 받아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전쟁을 하기 전에 주변을 살피는 건 당연하니까요. 물론 업무는 제 호위입니다. 아셨죠? 기사님.”
“기사라기엔 부끄러운 몸인데……. 아무튼 고용주님께서 칭하시는 게 편하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안내자를 바로 보내 드리죠.”
베오날드는 그렇게 미소 지으면서 바알 사장의 방을 나섰고, 바알은 비서를 시켜서 곧바로 그에게 안내자를 붙여 주고는 비서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 왔냐? 안내역은 잘 붙였겠지?”
“유렐과 제시, 가룰을 붙였습니다, 사장님.”
“네가 보기엔 아까 그 방랑 기사 청년, 어때 보이나?”
“일단 범상한 출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화는 그렇다 쳐도 행동거지가 정말 잘 단련된 칼날 같았습니다. 한순간도 보폭이 흐트러지거나, 대접한 차를 마실 때의 예의범절을 비롯한 기품이 흐트러지지 않았지요.”
“그런가?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 같았는데… 하긴 귀족가 출신인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맞는 거겠지.”
귀족가 출신인 비서 쟝의 시선으로 베오날드의 평가를 들은 바알은 일단은 안심했다.
행동거지와 기품으로 보아선 양심 없이 날먹하고 튈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걸 보장받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좋아. 그럼 우리가 기사급 영입했다는 거 여기저기 뿌리고, 다크티스에도 알려. 아마 그쪽도 우리랑 같이 움직일 거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그는 아니었기에 사람을 붙이는 것을 유지하면서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소식은 곧바로 아그라샌더 그룹의 두목인 말렉에게 전해졌다.
한참 돈 써 가며 용병들을 다수 고용하고 전쟁 준비에 만반을 갖추었는데, 바알라스 쪽에 기사급 전력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그를 당혹시킬 만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기사’가 왜 그 새끼를 돕는 건데? 귀족 새끼들은 그렇게 굴러다니는 걸 방치해? 당장 영입하든가, 영지를 내려서라도 데려오려고 하는 게 정상이지!”
“그, 그게… 아마 어느 귀족가의 사생아라든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모시던 영주가 죽고 떠도는 기사라든지……. 아예 가능성 없는 존재도 아니기도 하고… 요새 전란이 좀 심합니까?”
“젠장! 그거야 그렇지.”
수년간 계속해서 제국에서 일어나는 분쟁 때문에 백작가에서 출병하는 일이 잦았던 것을 보았을 정도였다.
이런 세계의 상황이었기에 떠돌이 기사 한둘쯤 생기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왜 꼭 이 분쟁에서, 그것도 자신들 쪽에 걸리지 않고 경쟁하려는 바알라스 그룹에 붙었냐는 게 문제였다.
“그야… 썩어도 기사라고, 저희처럼 마약을 파는 조직에 붙는 건 좀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럼 저 술팔이, 여자팔이 새끼는 정상이냐?”
“창관이나 술집은 꼬추 달려 있으면 당연히 가는 곳이죠, 두목.”
“염병할!”
콰앙! 쩌적!
분을 이기지 못한 말렉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그래도 마약 조직의 두목답게 용력이 있어서인지 나무로 된 책상은 반 토막이 나며 부서졌다.
지금 상황이 매우 더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상대에 기사급이 있다고 하면 지금 고용한 용병들이 다들 제대로 싸워 줄 리가 없었다.
다들 칼질해서 돈 벌려고 이 일을 하는 거지, 모가지 날아가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두목… 다크티스에서 마침 회담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일단 서로 칼부림부터 하지 말고 모여서 오해부터 풀자고 말이죠.”
“딱 봐도 이거 대장급만 모여서 암살하려는 거 아니야?”
“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데려오고 싶은 만큼 다 데려오라고 하는데요?”
“즉, 회담 결렬이면 그냥 칼부림을 하겠다는 거군. 끄으으으응…….”
말렉은 상대의 수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다.
바알라스에서 ‘기사급’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림과 동시에 다크티스에서 이런 연락이 왔다는 건 둘이 함께 손잡고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움직임이었다.
여차하면 2 대 1로 싸우겠다는 의미까지 내포한 좋은 수였다.
“두목, 어떻게 하죠? 응하실 겁니까?”
“응해도 별로 안 좋은데… 하지만 응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이미 기사급을 영입했다고 잘난 체하는 저 바알라스의 말에 휘둘려야 해. 그냥 블러핑이면 좋겠지만, 아니면…….”
“아니면 우리도 기사급을 영입했다고 블러핑을 치는 건?”
“지금 와서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야? 이미 ‘회담’이라는 카드를 던진 시점에서 그건 불가능해. 우리도 기사급을 진짜 데려오지 않는 이상 무리다. 저 ‘마지막 회담’에 데려가야 할 테니 말이야.”
말렉은 역시 상대가 자신들의 라이벌이라 생각하며 이 난국을 타개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거액을 들여서 용병들과 계약까지 했는데 그냥 물러날 순 없었지만, 상대에 ‘기사급’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이미 용병들의 사기가 내려가고, 또 싸움을 할 수 없어질 것 같은 건 문제였다.
“…어쩌겠습니까?”
“일단 회담 잡아. 그리고 그 기사급이라는 놈에 대한 정보를 얻어 와서 접촉해 봐. 요점은 그놈만 우리 편으로 돌리면 승산이 다시 생긴다는 거니까!”
“아, 예!”
말렉은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이 무엇인지 빠르게 판단했고, 그 원인만 제거하면 판도는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사’. 이 상황 속 힘의 밸런스를 어그러뜨린 원인인 그놈만 잡아 놓으면 결국 승기는 다시 돌아오기에 곧바로 그를 노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벌기 위해 회담은 승낙하되 기간은 나중으로 잡는 걸로 결정짓는다.
그렇게 결국 모든 혜택은 이 상황을 꾸민 베오날드에게 돌아왔다.
바알라스 조직에게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동시에 몰래 들어온 아그라샌더 그룹의 제안을 슬쩍슬쩍 조율하면서 그쪽에서도 돈을 받았고, 자신의 무력을 테스트하려는 건지 보내온 다크티스의 암살자를 혼내 주자 이젠 거기까지 수작을 부린답시고 알랑방귀를 뀌는 이 상황이 너무나 행복한 그였다.
“그,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역시… 세상은 돈이 최고니 말이야.”
“하하, 역시 그렇죠.”
‘연구 자금도 돈, 영지 운영도 돈, 군사도 돈, 돈이 많아서 나쁠 건 없지. 아무튼 상황이 아주 즐겁게 흘러가는군.’
베오날드는 바알라스 조직에서 제공해 준 와인을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테알 슬럼가. 어떤 악당들이 있나 싶었지만 결국 전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휘두르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또 아그라샌더 그룹을 움직이기 위해선 아무나 못하는 특수한 기술을 가져야 했지만 말이다.
‘연금술 배우길 정말 잘했다니까~ 평생을 넘어서 후생까지 우려먹는 기술이네. 기연을 잘 만난 덕이라고 해야 하나?’
베오날드는 자신이 익힌 연금술의 유용함에 한 번 더 감탄했다.
연금술. 지금의 베오날드에게 있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중요한 학문으로 사실 처음부터 자신의 의지로 익히려고 한 건 아니고, 본래라면 익힐 일도 없던 기술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우리를 겁주려고 데려간 감옥탑에서 설마 기연을 만날 줄은…….’
그와 연금술의 인연은 정말 의도치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가문의 대죄인이자, 가문을 모욕한 자들을 가둔 감옥탑에서 연금술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자를 만난 것이었다.
‘그… 그 빵을 내게… 주, 주십시오, 도련님… 그러면 당신에게 지혜를… 드리겠습니다.’
‘그때 그걸 안 줬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
감옥탑 한구석에 갇혀서 삐쩍 마른 채 죽어 가던 한 연금술사에게 도시락으로 챙겨 간 빵 조각을 주고 연금술의 기초 중의 기초를 배운 것이 시작. 그것이 베오날드의 연금술사로서의 첫 페이지가 열린 순간이었다.
이렇게 연금술로 득을 볼 때마다 늘 그때 생각이 안 날 수 없었던 베오날드는 추억을 되씹으며 와인 잔을 계속해서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