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필요한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흔히 구할 수 있는 몇 개의 약초, 증류와 압착, 식힘 등등을 할 수 있는 가벼운 설비. 대용량을 만들려면 그 스케일을 키우면 그만이죠. 그리고 마정석 조금.”
“마정석? 그거 꽤 비쌀 텐데?”
“아, 그것이 있어야 핵심 공정을 할 수 있어서 말이죠. 다만 그리 많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이미 생산성은 고려했으니 충분한 설비를 갖춰서 한 번에 만들 수만 있으면, 이 주먹 크기 정도의 마정석이면 이 가루를 저 밀 포대의 절반 정도는 채울 겁니다.”
“포대 절반이면… 아까 이 양이 20인분이랬지?”
“예. 족히 100만 명은 투약할 수 있는 양이죠. 그걸 중독성에 따라 가격을 매기는 건 두목님에게 맡기죠. 저는 수입의 1할만 받겠습니다. 제작을 하고 남은 시간 동안 이 피부를 고칠 연구만 하면 되거든요.”
“1할? 그거만 받고 되겠어?”
고작 1할. 제조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치곤 너무나 적게 먹는 느낌이라서 말렉은 당황하여 되물었지만, 베오날드는 능숙하게 손을 저으면서 적게 먹는 이유에 대해서 변명했다.
“저는 연금술사입니다. 마약을 만들 순 있지만 판매하는 세계에 대해선 무지하죠. 그런 놈이 욕심을 과하게 부리면 다치기도 하고, 또 저는 연구와 제조에만 집중하고 싶으니… 대신 그~ 마지막 공정은 제 목숨줄이니까 비밀로 하는 걸로~ 부탁합니다. 하하하.”
‘으으음… 하긴 먼저 목숨 값을 내고 굽힌다고 생각하면 틀리진 않지. 게다가 딱히 계약금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베오날드의 태도와 더불어 큰돈을 먼저 내는 게 아니라 설비 투자만 하면 이 마약이 생기는 거라서 말렉에게도 큰 위험부담이 없었다.
저쪽은 대신 주도권 식으로 기술 보호만 요청하는 상황이었지만, 그건 나중에 몰래 다른 연금술사를 고용해서 노려도 되는 일인 만큼 말렉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에 베오날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래서 필요한 게 뭐지?”
“일단 생산 설비를 놓을 장소랑 제가 머물 장소, 사람 한 10명 정도, 그리고…….”
말렉은 정체를 속인 베오날드의 말에 따라서 자금을 투자해서 사람과 설비를 갖춰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3일 뒤, 아그라샌더 그룹 영역의 가장 중심에 새로운 작업장이 생기게 되었다.
베오날드는 그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일단 그들이 원하는 대로 환영의 꽃을 제조하는 모습을 순순히 보여 주었다.
“짜잔, 완성했습니다. 아직 설비 최적화가 덜 되어서 그런지 생산량이 조금 떨어지지만 약 반 포대를 완성했습니다.”
“음, 그렇군. 어디 시험해 보세.”
극히 중요했기에 3겹으로 싼 포대에 든 마약을 베오날드에게서 건네받은 말렉은 안을 열어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실험용 노예에게 그것을 투여, 예전보다 양은 적었지만 일전에 보았던 그 노예의 반응과 똑같이 쾌락과 환상에 푹 젖어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자 말렉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이거 진짜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잖아? 이 약효! 제작에 쓰는 돈이라고 해 봐야…….’
재료비는 각종 약초와 몇 가지 포션 다량과 주먹 크기의 마정석 하나. 이제 설비는 보강만 하면 되니 투자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만큼의 마약이 생산되고, 이것을 유통시킨다면?
처음엔 미량을 샘플로 주고 중독시키고 난 뒤에는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이다.
말렉은 머릿속으로 벌써 자신이 금화로 된 산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어떠신지요? 제조 시간은 약 48시간. 좀 더 연구해서 최적화만 시키면 더 많은 양을 생산 가능합니다. 그러니 1할, 꼭 부탁드립니다. 제 생명과 관계되어 있으니까요.”
은근슬쩍 ‘생명’을 강조해서 그에게 약속을 지켜 달라고 절박하게 말하는 베오날드였다.
아무튼 이제 실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증명했고, 그것을 생산해서 팔면 엄청난 돈이 된다는 생각에 말렉은 함박웃음을 띠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흐흐흐, 흐하하하하하! 아주 좋아! 선생! 결과를 보여 줬으니 나도 더 이상 뭐라 할 게 없지! 알았네! 자네는 열심히 이것을 만들고 최적화하게. 나는 열심히 팔아 치울 테니! 약속은 반드시 지키지!”
‘좋아. 이걸로 첫 조건은 완료.’
“아무튼 오늘을 기념해서 한잔 어떤가? 내가 사지. 설마 그 상태라곤 해도 술을 아예 못 마시는 건 아니겠지? 우린 이제 부자야! 크하하하핫!”
“적당히만… 먹는다면야. 하하하.”
그렇게 베오날드는 좀 더 친근감을 갖기 위해서 그들의 연회에 참석, 밤새도록 술 마시고 떠들면서 놀았다.
술에는 나름 자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약한 샌님 연금술사 연기를 해야 했기에 조금씩 먹으면서 말렉과 대화를 나누었다.
“크으! 이거 우리 선생님, 나중에 병만 나으면 내가 여기 테알 슬럼가 창관의 에이스를 대접할게! 어찌나 지명 비용이 비싼지 귀족분이나 거상들이나 상대할 수 있는 년이지만! 이거면 우리도 거상들만큼 벌 수 있어! 흐하하!”
‘그래, 나도 놀랐다. 마약 조직이라기에 나처럼 연금술 연구실 같은 걸 만들어 놨을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마약 성분 있는 풀을 압착해서 담배 형태로 파는 정도라니. 좀 더 알아보고 할걸. 쳇!’
또 한 번 500년 뒤의 세상이 얼마나 후퇴했는지 깨닫게 되는 베오날드였다.
이 조직의 규모와 인력은 확실히 도시의 범죄 집단이라고 할 정도로 무서웠지만, 거래하는 마약의 제조 방식은 너무나 원시적이었던 것이다.
이걸 미리 알았다면 굳이 환상의 꽃 같은, 한 시대를 휩쓴 거물급 마약이 아니라 성분이 약한 마약을 적당히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다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운 거니까… 이제 와서 다른 방안은 없지.’
일단 한번 만들어야 저 말렉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만큼 여기까지의 과정은 필수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연회를 마친 뒤, 베오날드는 계획대로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일어나서 다음 일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아그라샌더 그룹 영역 연회장.
흥겨움에 밤새도록 먹고 마신 말렉은 갈증과 두통에 시달리면서 무의식적으로 물을 찾았다.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 그는 잠들어 있는 부하들과 노예들을 둘러보았다.
“으으으… 목말라. 음? 선생, 어디 갔어? 벌써 일하러 갔나?”
그런데 자신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연금술사 선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 마시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먹이긴 했는데, 일하러 갔나 싶어서 말렉은 그를 위해 마련해 준 마약 공장 시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가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야? 다들 기상! 기상!”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이 생산 설비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던 것이다.
그 연금술사 선생의 주문에 따라서 가져온 유리병과 각종 시설들이 모두 부서지고 파괴된 상태였고, 재료들도 모조리 불타거나 이상하게 엉켜 있어서 수습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보통 사태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말렉은 곧장 부하들을 깨워서 사태 파악부터 시작했다.
“젠장! 감히! 어떻게 되었어?”
“다행히 창고와 금고는 무사합니다. 어제 그 선생이 처음 만들어 준 ‘약’도 무사합니다.”
“‘약’이 무사하다고? 그러면 역시… 그 선생이 도망친 건 아닌 것 같은데…….”
만약 그 선생이 만든 ‘물건’이 사라졌다면 자신을 이용해서 만들기만 하고 도망친 걸로 해석할 수 있었지만, 물건이 무사한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게 확실했다.
돈이 목적인 양반이 빈손으로 사라질 이유는 없으니 그럼 결국 추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바로 납치였다.
“그러면 남은 건… 결국 납치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어떤 놈들이?”
“그야 다크티스나 바알라스 놈들이 아니겠습니까? 딱 봐도 이 테알 슬럼가에서 이런 대박 건수를 우리에게서 빼앗을 만한 배짱, 그리고 단시간 내에 소식을 들을 곳이면 거기 둘뿐이죠.”
“제길!”
부하의 말대로 짐작이 가는 곳이라고 해 봐야 자신들과 같은 이곳 테알 슬럼가 3대 조직뿐. 경비대, 기사단, 백작가에 소식이 들어간다면 이렇게 납치로 끝날 게 아니라 아예 병사들이 쳐들어와서 자신들을 족쳤을 것이다.
물론 자신들 아래에 있는 군소 조직이나 다른 자들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역시 유력한 용의자는 다크티스와 바알라스 두 조직이었다.
“제엔장! 한창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두목.”
“일단 하부 조직들 싹 다 뒤져 봐. 우리와 연계하고 있는 주변 영지의 다른 조직들 소식통까지 전부 동원해서 그 선생을 찾아야 해! 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놓칠 순 없어!”
“예!”
“이런 젠장! 어떤 자식인지 가만두지 않을 테다!”
말렉은 남아 있는 분량의 환상의 꽃 포대를 보면서 이를 박박 갈았다.
기껏 활짝 피었다고 생각한 자신의 황금빛 미래를 방해하려는 놈들이 나타난 셈이니 침착해지려 해도 침착할 수 없는 상황.
거기에 만약 범인이 다른 3대 조직에 있다고 한다면 이건 단순한 범죄로 국한될 일이 아니었다.
‘우리 밥벌이를 빼앗으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만약 다른 조직이 이 환상의 꽃을 생산하고 거래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턴 자신들 아그라샌더 그룹은 멸망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은 조직의 존립이 걸린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에 말렉은 여차할 경우 정말로 다른 조직들과 전쟁까지 불사할 생각이었다.
‘젠장! 기왕 이렇게 된 거, 확 그냥 여길 통일해 버려?’
그동안 마약 판매로 축적한 부가 있고, 지금 손에 신품 마약까지 있는 상황이었기에 적절히 다른 영지에 있는 무법자들과 용병들까지 끌어모아서 한바탕 하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 연금술사 선생을 되찾지 못하면 어차피 조직의 존립이 위험한 만큼 지금 명분이 확실할 때 화끈하게 투자해야만 했다.
‘최악의 상황이 되어도… 이게 있으니 어찌어찌 믿을 구석은 있겠고. 아무튼! 어떤 망할 자식인지 걸리기만 해 봐라!’
말렉은 그렇게 투지를 불태우면서 조직 전체에 비상을 걸고, 진심으로 전쟁을 한판 하기 위해서 준비에 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는 광경을 베오날드는 신전 건물 지붕 위에서 아주 즐겁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쪽에도 부채질할 타이밍을 재기 위해 말렉 측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며 자신도 이 전화(戰火)를 키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3일 뒤.
하부 조직들을 수색하고 주변 영지의 노예 시장과 뒷골목까지 전부 싹 다 뒤졌지만, 말렉의 부하들은 베오날드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말렉은 아그라샌더 그룹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며 조직원들을 소집했고, 모아 놓은 재산을 군자금으로 돌려 용병들과 특수한 능력을 갖춘 모험가들까지 모아서 다른 3대 길드를 통합할 준비를 시작했다.
“근데 두목, 만약 그 두 조직들에서도 연금술사 선생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짜샤, 그럼 더더욱 3대 조직 다 조져서 통일하는 수밖에 없지. 판돈 올인했으면, 끝까지 가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 가요? 하지만…….”
“이 약을 보라고! 이게 있는 이상 우리 조직의 미래는 없어. 마약상이 판매하는 마약의 질에서 밀리면 결국 끝장이란 말이야. 그러니 그 선생이 없더라도 우리가 다크티스랑 바알라스를 먹어야 한다.”
말렉의 말에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들 각오한 표정으로 3대 조직 간의 전쟁을 확실히 준비해 나갔고, 그들의 움직임은 바알라스와 다크티스에게도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