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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31화 (31/259)

[31화]

그 뒤, 해를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오날드와 랄트는 15세의 성년식을 맞이했다.

더 이상 아이로서 보호받는 게 아닌 가문의 구성원이 되는 중요한 시점.

베오날드와 랄트는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성인이 되는 것을 허락받았고, 영지를 위한 일을 하는 이의 상징인 검과 펜을 받았다.

그리고 각자 어떤 일을 맡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예정대로 둘 다 동시에 렌겔 가주 대리를 도와서 후계자 수업을 받기로 했고 둘은 경쟁 상대라는 것을 공표하게 되었다.

“절대… 안 질 거야.”

‘…뭐, 약발이 아직도 먹힌다는 거군.’

적개심을 불태우며 베오날드를 노려보는 랄트. 하지만 베오날드는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태도로 개무시했다.

이 영지의 권력엔 관심이 없었고, 그냥 자신의 일을 방해만 하지 않으면 그걸로 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성인식을 마친 둘은 본격적으로 일을 부여받기 위해서 렌겔 가주 대리의 집무실에 도달했다.

“성인이 되었다는 건 축하할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자신의 일을 다 해야 한다. 알았니? 베오날드. 그리고 랄트도 마찬가지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부터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임무는 작게는 이곳의 서류를 처리하는 일부터 크게는 검을 들고 직접 싸우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맡게 될 것이다. 성인이 된 기념으로 너희의 첫 일은 백작님께서 직접 내려 주셨다.”

렌겔 가주 대리는 품에서 봉인되어 있는 편지를 꺼내어 베오날드와 랄트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둘은 그것을 열어서 자신들에게 부여된 일을 확인했다.

먼저 랄트의 경우, 아주 사랑스러운 백작의 손자라서 그런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상인 회합에 참여해서 자신들의 영지를 비롯해서 주로 무역하는 주변 영지와 제국의 주요 생산물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이… 이게 뭐야?”

물론 일을 시키는 백작 기준에서는 당연히 후계자이자 영주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랄트로서는 진땀을 흘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걸 후계자 후보에게 하라고?’

반면 베오날드의 경우는 편지를 보고 믿을 수 없어서 재차 읽어 내려갔다.

하나 편지 내용은 변하거나 달라지진 않았고, 베오날드는 그것을 다시 읽으면서 현실을 파악했다.

<베오날드 캘러메인은 일주일 내로 성내의 테알 슬럼가의 불법 조직들을 정리할 것. 단, 영지의 병력을 동원해선 안 된다.>

‘슬럼가를 정리하래 놓고는 병력을 쓰지 말라는 건 뭐지? 뭔가 거부할 줄 아는 용기를 보는 건가? 15살짜리에게 맡길 일이 아닌데?’

슬럼가의 정리. 말은 쉽지만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시라면 어디에나 생기는 패배자들의 모임장, 도둑 길드부터 시작해서 마을의 불량배와 범죄 조직의 소굴, 부랑자, 도시에 일을 구하러 왔다가 실패한 자들 등등, 무법 지역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갓 15세가 된 소년에게 정리하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것은 백작이 내린 임무, 그 또한 무언가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귀족의 관점에서 이것을 해석해 본다면 역시 사랑하는 직계 혈통의 자리를 위협하는 근본도 없는 잡종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암, 그렇지. 역시 혈통과 전통은 중요하지. 그렇고말고.’

공감이 매우 쉬운 이유였기에 베오날드는 자신에게 내려진 이 임무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임무를 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물론 자신에게 버겁다면서 포기하고 거부할 순 있지만, 명색이 백작이 직접 내려 준 첫 임무. 대놓고 거부하면 백작에게 자신의 인상이 어떻게 박힐지 뻔한 상황이었다.

‘거부할 수 없으니 처음에 이런 걸 준 건가 보군.’

“베오날드, 무슨 일이냐? 일이 만만치 않니? 랄트는 이미 일을 하러 떠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 좀 하느라구요. 그런데 이 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어디 보여 다오… 맙소사?”

렌겔 가주 대리는 베오날드가 보여 준 쪽지를 보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5세 혼자서 군사도 없이 슬럼가를 정리하라니. 상대는 권위가 먹히지 않고 법과 질서가 사라진 무법자들이다.

아무리 사냥꾼이라 한들 베오날드 혼자서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이건 너무 불합리한 업무 같구나. 아버님이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이건 도저히…….”

“하겠습니다.”

“뭐라고?”

“이건 엄연히 시험 같습니다. 백작님이 성년인 제게 내리신 기념할 만한 첫 임무죠. 아마 제 태도와 의지를 보려는 것 같습니다. 불합리,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말이죠. 다만 시간제한이 있는지가 걱정되는군요.”

“으으음… 딱히 그런 건 적혀 있지 않으니 네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인 것 같구나. 너무 무리는 하지 말렴. 이건 내가 봐도 너무나 불합리한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해 보는 데까진 해 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베오날드는 백작이 내린 임무를 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렌겔 가주 대리의 집무실을 나섰다.

사실 가주 대리의 말대로 이 임무를 거절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했다.

어차피 백작은 이미 죽을 때를 기다리는 노인. 실권을 가진 건 가주 대리였기 때문에 그가 불합리하다고 하면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베오날드는 열심히 포장해서 그냥 받아들인 것이었다.

‘불합리한 임무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백작이 직접 내린 첫 임무라는 핑계는 다른 일을 제쳐 두고 이것에 몰두할 가치가 있었으며, 또 ‘슬럼가’의 문제 해결이라는 명분을 통해서 저택에서 언제든 외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병력 사용을 금지시켰기에 호위 없이 혼자서 움직일 핑계까지 생겨서 베오날드는 오히려 이 임무가 반가웠다.

‘그리고 이 임무가 가장 좋은 건 역시~ 돈 냄새가 난다는 거지.’

슬럼가, 불법 조직 놈들이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버는지는 몰라도 결국 조직을 유지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며, 불법적인 수입이 존재하기 때문에 슬럼이 형성되는 것이다.

특히 베오날드의 특기인 연금술을 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므로 ‘돈’ 냄새가 나는 이 일을 거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 어디 가 보자고~”

베오날드는 물 만난 고기인 양 의욕을 불태우면서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저택을 나가기 전에 딱 봐도 느껴지는 이 도련님의 체취와 향기를 없애기 위해 때를 묻히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알테리오와 함께 베오날드는 먼저 산으로 들어가서 야영을 하기로 한다.

“세인, 나는 백작님이 내리신 임무 때문에 며칠간 저택에 돌아오지 못할 거야. 에라솔에게도 이야기해 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래도 어디에 가시는지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음~ 일단 산으로 갈 거야. 사냥하면서 때 좀 묻히려고 해.”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리고~ 몸이 안 좋으면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하루나 이틀쯤 쉬고 나와도 돼. 내가 산에서 사냥을 하다 보니 코가 좀 민감하거든~ 피 냄새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런 날 있잖아? 하하.”

“도련님!”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고함치는 세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와 함께 저택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베오날드는 역시 여성의 그(?)날에 대해서 지적한 것은 안 좋았나 싶었지만, 이럴 때 미리 말해서 배려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전에도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휘청거렸었지. 표정도 좋지 않았고. 그때는 말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세인이 몸조리를 잘하길 빌며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와 함께 산으로 향했다.

베오날드가 떠난 뒤, 세인은 곧바로 메이라 부인에게로 가서 그가 백작님이 준 일을 하기 위해서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듣자 메이라 부인은 턱에 손을 괴며 진심으로 기쁜 듯 날카롭게 웃기 시작했다.

“오호호호홋! 그 잡종이 결국 그 임무를 하러 떠났다고?”

“예, 마님. 일단 산으로 가서 때를 묻힌다고 합니다.”

“호호호홋! 제 딴엔 머리를 좀 썼구나. 하지만 그 ‘테알 슬럼가’가 그런다고 쉽게 정리될 곳이 아니지.”

“예? 그러니까 베오날드 도련님을 지금 테알… 슬럼가로? 거긴 너무 위험합니다! 마님!”

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테알 슬럼가’는 정말 위험한 곳이었다.

폭력과 무법의 영역이며, 이 도시의 악당들이 모두 모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선대 백작과 렌겔 가주 대리도 몇 번인가 토벌을 하려 했지만 기생충처럼 계속 살아남아 인명 손실과 손해만 커지는지라 결국엔 자리 잡은 조직의 상납금을 대가로 내버려 둔 영역이었다.

그곳엔 현재 전직 용병 및 기사, 도망친 군벌들이 여러 조직을 만들어서 서로 세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불법 거래, 매춘, 노예 사업, 마약 거래 등등… 각종 범죄들이 벌어지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자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거나 하는 그 무법 지대에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출신 도련님이 갔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게 바로 노림수란다. 후후훗, 일단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을 맡긴 이상 실패가 보장되니 놈의 평판이 깎이는 건 당연하지. 게다가 운이 좋으면 무모하게 도전하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고 말이야.”

“게다가… 하루아침에 될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래! 그것도 노림수지! 역시 아버님이 나서니 일이 쉽구나. 후후훗, 아무튼 놈이 이룰 수 없는 무모한 일을 하느라 바쁠 동안 우리 랄트가 착착 일을 해 가며 점수를 쌓을 수 있지.”

메이라 부인은 캘러메인 백작이 둔 신의 한 수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기울어졌던 후계자 구도의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는 건 물론, 베오날드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하는 동안 랄트는 능력에 맞는 일을 착착 해 나가는 것으로 점수를 따내어 역전은 물론 가신들의 평판도 얻게 되는 것이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아버님과 상담을 할걸. 오호호호홋!”

“그래도 베오날드 도련님이 죽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그게 낫지! 그 망할 잡종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굴욕을 맛보지는 않았어! 그보다 세인, 너 아까부터 계속 그 잡종 놈을 두둔하는 것 같구나. 정이라도 붙은 게냐?”

“아, 아닙니다, 마님. 전 그저 마님을 생각해서…….”

“하긴 너도 잡종이니 잡종에게 끌릴 수밖에 없겠지.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구나. 오호호호호호홋! 아무튼 오늘은 이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으니 썩 꺼지렴.”

메이라 부인의 폭언을 참아 낸 세인은 그래도 오늘은 맞지 않고 무사한 것에 안도하며 메이라 부인의 방을 나섰다.

잡종. 그렇다. 베오날드와 마찬가지로 세인 또한 메이라 부인 본가의 혈육이지만 모친의 신분이 노예였기에 주류가 될 수 없었고, 메이드가 되는 것이 한계였다.

부친은 가문의 혈통인 ‘기사’로 그저 모친에겐 무책임하게 쾌락만 쏟아 내고 자신들을 없는 존재로 여겼고, 결국 유일한 가족인 모친이 여전히 노예로서 메이라 부인의 본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녀 또한 가문의 소유물 같은 입장이었던 것이다.

‘베오날드 도련님, 부디 무사하시길…….’

이런 배경을 가진 것 때문에 그의 심리를 이해하기 쉬울 거라 생각한 메이라 부인의 술책에 따라 그녀는 베오날드의 전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녀는 자신과 유사한 배경을 지녔지만 완전히 다른 베오날드의 모습에 동경과 놀라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상하고, 당당한 그의 모습에 끌리게 된 그녀는 그가 무사하길 빌며 자신의 일을 하러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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