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줘도 못 가질 집안을 가지고 쓸모없는 싸움을 해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아.’
지금 베오날드에겐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검술로는 노이멀의 3대 오의를 마스터하고, 그다음 황실 기사단 검법, 황가 검법으로 진도를 나아가야 했다. 또한 가지고 있는 연금술 지식의 재정립과 실험 및 자료 조사, 알테리오의 조련과 훈련, 사냥……. 이것만 해도 벅찬데 추가로 이 캘러메인 영지와 저택의 일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예 나는 후계자 생각이 없습니다, 하고 메이라 부인과 몰래 교섭해서 하하호호 하는 결말도 나쁘지 않지만, 그러면 결국 저 망나니 같은 랄트 놈이 후계자가 되는 걸 막을 수 없지.’
지금은 자신 때문에 자극을 받아서 열심히 훈련과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베오날드가 만약 항복 선언을 해서 메이라 부인이 안심하게 되면 자연히 랄트의 긴장도 풀어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다시 멋대로 설치고 다니는 망나니로 남을 거고, 그런 랄트가 후계자가 되면 이 영지의 미래도 밝지가 않을 터였다.
‘후우~ 그래도 부모님이 있는 영지이니… 그놈을 정신 차리게 할 수밖에 없군.’
그렇기에 베오날드는 경쟁마 교육의 효과를 위해 메이라 부인의 적대심을 계속해서 받기로 했다.
그리고 겸사겸사 이것을 핑계로 성년이 되었을 때 ‘영지 군대’에 속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사전에 말데로브 경에게 이 일을 상담했다.
“아, 그 일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 이미 가주 대리님과 다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랄트 도련님이 변하기 시작한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기상조이지요. 아마 랄트 도련님과 같이 가주 대리님을 따라서 일하실 겁니다.”
“음, 그게 밝혀지면 메이라 부인… 아니, 어머님이 많이 화를 내실 것 같습니다만? 지금도 틈을 노리고 있을 정도니까요. 물론 에라솔 군 덕분에 위협이 많이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근 몇 주간 메이라 부인은 계속해서 베오날드를 노려 왔다. 특히 그가 야간에 알테리오의 먹이 공급과 산책을 위해 나가는 타이밍에 손을 쓰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말데로브 경의 아들인 에라솔이 따라붙는 바람에 위험부담이 너무 커져서 노리는 걸 포기했던 것이다.
“틈을 노리는 걸 알아냈단 말입니까?”
“예. 산에서 괜히 지낸 게 아닙니다. 게다가 알테리오도 있구요.”
산에서의 경험, 거기에 알테리오라는 그리폰의 존재로 인해서 어설프게 따라붙는 자들을 알아챈 것을 납득시키는 베오날드였고, 말데로브 경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했다.
“더구나 제가 ‘천연 기사’라는 걸 모르니까 아마 전문적인 도적 길드 무법자 같은 게 아니라, 어디 싸구려 용병 나부랭이나 고용했겠죠. 정말로 에라솔이 없었으면 진작 피를 봤을 겁니다.”
“예. 그나마 지금은 아직 성년이 아니고, 또 저택의 유명 인사이시니 건들기가 더 힘들었을 겁니다.”
“제가요? 아~ 하긴 뉴페이스이니까 다들 주목하곤 있겠죠. 하하.”
“아무튼 곧 있을 성년식까지도 조심하셔야 하지만 그 이후에도 조심하십시오, 베오날드 도련님.”
“예. 아, 그건 그렇고 말데로브 경, 하나 부탁할 게 있습니다만…….”
슬슬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베오날드는 말데로브 경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 성의 외곽에 은신처 하나를 마련하고 싶으니 저택 하나를 달라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부탁에 말데로브 경은 처음엔 의아해했지만 알테리오의 사냥 문제와 겨우내 쓸 식사 비축, 그리고 비밀 수련과 혹시 모를 메이라 부인의 습격이나 암살 위협에서 도망칠 곳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자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요. 하긴 그 그리폰이 먹기도 많이 먹을 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알았습니다. 그럼 제 사유지에 있는 빈집 하나를 알아봐 드리지요. 누구도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도 내려놓을 테니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직접 구하려고 했으면 돈 문제부터 시작해서 매물을 구하기 힘든 것 등등 여러 문제가 있었겠지만, 적절한 후견인이 있으니 이리 쉽지 않은가?
이래서 사람은 백이 있어야 한다고 절로 생각이 드는 베오날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디어 베오날드가 원하던 저택이 마련되었다.
“으음, 꽤 작지만 마음에 드는군.”
“한데 이런 저택은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베오날드 도련님?”
저택은 엄연히 말데로브 경의 사유지 안에 있었기에 그 안내를 위해서 같이 온 에라솔이 용도를 물었다.
베오날드는 이미 말데로브 경에게 말했던 대로 대답하면서 철문을 열고 저택 내부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서인지 여기저기 풀과 잡초가 무성했으며, 내부 또한 먼지가 가득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물이 있다는 점과 집은 2층이지만 안을 보니 생각보다 넓어서 쓸 수 있는 방도 꽤 많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지하실까지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게 다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미소 지으면서 만족해했다.
“저기, 도련님, 하인들에게 치우라고 할까요?”
“아니, 내가 직접 하지.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이니까. 대신 이것들 좀 사 와 줄 수 있겠나?”
“기꺼이! 그럼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도련님!”
에라솔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베오날드가 준 쪽지를 받아 들고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베오날드는 본격적으로 저택을 청소하기 시작했는데, 에라솔이 약 3시간 정도 걸려서 물건을 다 사 올 쯤엔 저택 대부분이 청소가 완료된 지 오래였다.
‘마나 호흡법으로 단련된 육체라는 건 정말 사기적이라니까… 이 좋은 능력을 오직 전투에만 쓴다니. 에휴~’
“도련님! 주문하신 물건 모두 말끔하게 다 사왔습니다!”
말에 작은 수레 하나를 연결해서 도착한 에라솔을 본 베오날드는 수레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며 충실히 자신의 말을 이행한 그를 속으로 칭찬했다.
‘아, 왔나? 근데 저 눈빛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니까… 외양과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아버지는 군 지휘관이자 영지 내에서 엄청난 권력을 가진 말데로브 경이다.
금발 머리에 태운 피부, 거기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에라솔은 선입견으로만 보면 정말 숨 쉬듯이 여자를 후리거나 횡포를 부릴 것 같았지만, 몇 주간 같이 지내 본 결과 여자관계에선 숙맥이고 지금까지 기사로서 단련만 열심히 한 순수한 청년이었다.
‘게다가… 전통 기사 가문 도련님이라서 그런지 내가 천연 기사라는 걸 알자 저렇게 동경과 존경심 가득한 태도라니……. 너무 부담스러워서, 원.’
“역시 대단하십니다. 도련님의 손에 걸리면 청소도 일이 아니군요!”
“그렇게 감탄한 일은 아닌데 말이지. 아무튼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종자이자 호위로서 당연한 일이죠! 더 도와 드릴 일 있으면 기탄없이 시켜 주십시오, 도련님!”
‘…너무나 충직하고 성실한 녀석이라 껄끄럽군.’
하나 마냥 좋다고 하기엔 살짝 거북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욕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마치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은 오히려 경계하는 게 베오날드의 심경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어디에 쓰실 겁니까? 도련님. 유리병들은 왜 이렇게 많이 사신 건지…….”
“알테리오의 먹이 가공이랑 간단한 응급처치 약 같은 걸 만들기도 하는 거지. 내가 있던 영지엔 신전도 너무나 작고, 신관님도 치유 마법이 약하시거든. 그래서 약초를 가공해서 약을 만들곤 했지.”
“아하~! 그렇군요. 하긴 가벼운 상처 같은 걸로 신관을 불러서 치료비를 내긴 아까우니까요.”
‘그 신의 은혜를 빌어먹고 사는 놈들은 여전한가 보군.’
기본적으로 마탑 쪽에 속하기도 하고 세계와 현실을 파헤치는 학문인 연금술을 전공하다 보니 베오날드는 신전과는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연금술을 하면서 발달시키는 의학과 약학은 신성력과 비전 치료법으로 종교적 권위와 영향력을 유지하는 신전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정치적 라이벌 세력이었다.
게다가 아예 없앨 수 없어서 그냥 일부 파벌에게 거액의 헌금을 내는 걸로 입막음하는 게 한계였다.
“아무튼 이곳의 신전에는… 비밀로 해 줄 것을 부탁하지.”
“예! 제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이것들 정리는 내가 하고 있을 테니 밖의 풀들을 부탁하지.”
“예! 도련님!”
에라솔을 밖으로 보내 버린 베오날드는 그가 사 온 물건들로 다시 연구실을 꾸렸다.
이번엔 기초적인 연구나 가벼운 시약 제조밖에 못했던 예전과 달리 은밀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기에 좀 더 심화적인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모든 걸 자급자족해야 했던 시골과 다르게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영지라서 돈만 있으면 웬만한 재료를 공수할 수 있어서 좋군. 물론 마석(魔石)은 터무니없이 비싸서 내가 직접 공수해야 하지만 그게 어디야.’
유리 장인, 대장장이, 약초상, 고기 및 야채, 모험가 길드도 있어서 필요한 소재를 지닌 몬스터의 위치도 확인해서 직접 사냥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역시 무언가를 하려면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면서 베오날드는 완성된 연금술 실험실에서 무엇부터 만들지 고민하며 저택을 나왔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할 수 있겠군.’
지금 하고 있는 검술 수련과 마나 호흡법도 새롭고 중요한 것이었지만, 역시 베오날드의 근본은 대귀족과 연금술사였기에 그는 이쪽을 할 때 더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
같은 시각, 캘러메인 백작가.
사실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보여도 메이라 부인은 어떻게 해서든 베오날드를 이 저택 혹은 후계자 경쟁에서 치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다.
“젠장! 젠자아아앙!”
세인도 붙이고 그의 행적에서 빈틈이나 약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놈은 무슨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저택 생활을 완벽하게 보내고 있어서 손을 쓰려고 해도 쓸 곳이 없었다.
용병들이나 기사를 고용해서 무력을 쓰려고 해도 말데로브 경이 아들을 호위로 붙여 놔서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악!”
그래서 스트레스가 늘어난 메이라 부인은 현재 방 안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거나 부수면서 분노를 쏟아 내고 있었다.
차라리 뭔가를 억지로 지적해서 어떻게든 평판을 깎아 먹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바로 자신의 아들인 랄트가 더 수준이 떨어지기에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제기랄! 차라리 성년식 이후 군에 속하게 만들어서 영지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는데! 그것도 그 멍청한 이가 막고 있고! 아아아아아악!”
‘랄트의 행동이 바뀐 건 좋지만 역시 그건 베오날드가 있기에 일어난 일. 랄트의 가능성을 키우고 싶기에 성년식 이후 둘 다 내 곁에 두고 각종 일을 맡길 것이오. 어차피 랄트에 대해선 걱정할 게 없는 게, 부인과 그쪽 가신들이 도와줄 것 아니오?’
“그 망할 인간이!”
‘그러니 베오날드 정도나 되어야 오히려 공정한 승부가 되겠지. 허허허, 물론 그 아이 하나를 상대하는 데 랄트와 부인이 협동을 해야 공정한 승부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아버님을 설득해서 손을 쓰는 수밖에…….”
결국 현재 병환으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캘러메인 백작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메이라 부인은 곧장 그에게로 가서 베오날드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흐음, 그 정도로 그 아이가 위협적이란 말인가?”
“예, 이대로 놔뒀다간 정말로 그 근본도 없는 잡종을 후계자로 삼을 것 같다니까요! 아버님!”
“허허허, 그래선 안 되지. 안 되고말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고말고……. 알았다. 내가 손을 쓰마. 우리 귀여운 랄트의 미래를 방해하게 둬선 안 되니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아버님!”
백작의 말에 메이라 부인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놈이 뭐가 됐든 간에 결국 백작의 마음은 랄트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그녀는 안도하면서 아버님이 무엇을 할지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