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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도 쓸데가 있다-29화 (29/259)

[29화]

세인. 그녀는 메이라 부인의 가문에서 데려온 메이드로 메이드장에게 압력을 넣어서 베오날드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었다.

백작과 가주 대리가 모르게 메이라 부인은 저택 내에 자신의 힘이 닿는 영역을 철저히 만들어 놓았고, 그 덕분에 자신의 아들 랄트에게 방해가 될 사내아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베오날드 도련님은 도저히 14살로 생각되지 않는 분입니다. 신체의 성장부터가 두드러지는 것도 있지만, 행동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관록이 도저히 시골 출신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캘런 그년이 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켰나 보군. 제길! 시골 촌닭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을! 계속 말해라.”

“기르고 있는 그리폰도 제대로 통제하고 있고, 위험성에 대한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무(武)의 소양만 가진 게 아니라 지식도 많아서 책을 보면서 무언가 정보를 찾으려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그리폰 때문인지 마법사이신 셀리나 님과도 접촉했고,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 호위로 붙었습니다.”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접촉한 시간이라고 해 봐야 데리러 갔을 때뿐이었을 텐데?”

영지 내 유일한 상급 기사이자 군 사령관을 맡고 있는 말데로브 경이 아들을 호위로 붙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해석의 여지가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말데로브 경이 그 시골 잡종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표시는 된다.

더욱이 문제는 그렇게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 붙음으로써 베오날드에게 수작을 걸기 어려워졌다는 거였다.

“젠장! 대체 무슨 짓이지? 말데로브 경은?”

“아마 마님에게서 보호하기 위함이 아닐는지요? 너무 빨리 죽거나 다치면 경쟁마 교육이 진행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뭐?”

“주인 어르신과 가주 대리님도 어느 정도 감을 잡고 계신 거겠죠. 마님께서 다른 부인들께서 낳은 사내아이들을 몰래 죽… 꺄아!”

쨍그랑!

그 순간, 세인은 메이라 부인이 던진 꽃병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유리 조각과 물, 꽃이 땅에 흐트러졌고, 세인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내가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네년, 설마 나 없는 데서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니?”

“죄, 죄송합니다, 마님. 제가 실수했습니다.”

“안 되겠구나. 후우~ 가뜩이나 그 잡종 새끼 때문에 우리 랄트가 괴로워해서 화가 나는데, 벌을 받아야겠다. 벗으렴.”

“마, 마님, 제가 정말 잘못했…….”

“얼른!”

“…예.”

세인은 괴로운 표정으로 메이드복을 벗기 시작했다. 그사이 메이라 부인은 침대 옆에 잠겨 있는 서랍의 문을 열고 거기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온 것은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채찍. 그녀가 본가에서부터 애용하던 것으로, 아랫것들을 조교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여간 모자란 것들은 맞아야 말을 듣지. 절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감히 내 앞에서 입을 열어? 세인, 이건 전적으로 네가 잘못한 게 맞지?”

“마… 맞습니다, 마님.”

“그래, 이건 교육이란다. 그러니 달게 받으렴. 늦은 밤이니 비명 지르면 안 되는 거 알지?”

“예, 마님.”

찌아아악!

평생을 써 온 채찍이기에 메이라 부인은 아주 능숙하게 채찍을 다루었고, 채찍은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 세인의 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단 한 번으로 피부가 풍선 터지듯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나왔고, 머리가 새하얘지는 고통이 세인을 덮쳤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어서 이 고통이 지나가길 빌며 계속해서 메이라 부인의 채찍질을 받아 냈다.

“후우~ 알았니? 또 허튼소리를 하면 다음엔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란다.”

“예… 예, 마님.”

“좋아. 일단 넌 계속해서 그 잡종 놈의 곁에서 환심을 사고, 동향을 계속 나에게 보고해라. 그 일조차 못하면 어떻게 될지는 네 상상에 맡기마. 그럼 어서 네 더러운 피가 묻은 카펫을 들고 꺼지렴.”

냉혹하기 짝이 없는 메이라 부인의 말에 세인은 옷을 대충 입고, 간신히 일어나 피가 묻은 카펫을 들고 부인의 방을 빠져나갔다.

등의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이젠 이런 일을 당해도 억울하거나 서럽다는 생각조차 안 들 정도로 무기력이 학습된 자신이 더 한심하게 느껴진 세인은 그대로 묵묵히 등을 치료하고, 피로 젖은 카펫과 옷을 세탁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

몇 주 뒤, 아침.

“보십시오, 아버님. 어떻습니까?”

“허허허, 네 말이 맞구나. 확실히 랄트의 눈빛이 많이 달라졌어.”

렌겔 가주 대리는 현 가주인 캘러메인 백작과 함께 창밖을 내다보면서 만족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메마른 노인인 캘러메인 백작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지만 독기 어린 눈빛은 그대로였다.

그는 현재 메이드장이 끄는 휠체어에 앉아서 창밖의 랄트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우리 손자가 정신을 차리니 아주 좋군.”

그 놀고먹으면서 오만하게 횡포만 부리던 후계자 랄트가 지금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병사들의 구보를 따라가기 위해 악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 길이 아직 멀긴 했지만, 그래도 첫날처럼 쓰러지지 않고 버티면서 따라가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

“내심 불안하긴 했는데,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군. 네 선택이 맞았구나.”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저러다가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베오날드에게 좀 더 관심을 주는 척할 겁니다.”

“하지만 렌겔, 잊지 마라. 우리 가문의 후계자는 랄트다. 귀족에겐 혈통이 정의다. 아무리 캘런의 아이가 뛰어나다고 한들. 알았느냐?”

“물론입니다, 아버님.”

캘러메인 백작. 현 가주이자,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는 대귀족의 표본 같은 사람으로 귀족의 혈통은 고귀한 것이라고 믿는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가문과 그 격에 맞는 여성과 맺어져서 낳은 랄트야말로 진정한 후계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캘러메인 백작은 현실주의의 시각을 약간이나마 가진 아들인 렌겔과는 의견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니 넌 저 아이를 이용하되 절대로 그 재능과 빛에 매혹되어선 안 된다. 저건 파멸의 씨앗이다. 저 잡종이 절대 허튼 꿈을 꾸지 않게 너는 철저히 주제 파악을 시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물론입니다. 이미 경쟁마 교육을 시키고 난 이후까지 생각해 놓고 있습니다. 말데로브 경의 사위로 보내든가, 아니면 적당한 영지를 줘서 독립시켜서…….”

“멍청이! 저놈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고서 내린 판단인 게냐? 늑대가 사자를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말데로브 경의 사위로 보내는 건 오히려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

렌겔 가주 대리의 안일한 생각을 지적하며 캘러메인 백작이 호통을 쳤다.

아무리 혈족이어도 놈은 천한 용병의 피가 섞인 잡종.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빚 때문에 자작의 작위를 내렸지만 절대로 가문에 합류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더스티클록 영지가 그 모양이었고 말이다.

“네 말대로 지혜와 용맹을 다 갖춘 인재라고 한다면 나중에 결국 랄트가 후계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반감을 갖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느냐? 자신의 능력이 랄트보다 뛰어나다는 걸 아는데 그 자리를 빼앗기는 걸 가만히 볼 수 있겠느냐?”

“그렇게 치면 말데로브 경도 상급 기사인데 저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가 말데로브 경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있고, 그가 신뢰할 수 있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지 않느냐? 영지를 스스로 우리에게 반납하고, 작위를 받았지만 ‘기사’로서 살고 싶다고 ‘경’을 자칭하지. 하지만 저 아이는 아직 그런 신뢰의 증거를 보이지 않았느니라. 그러니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시간이 되었으니 저는 영지 업무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겉으론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렌겔 가주 대리는 적어도 랄트가 이 영지의 후계자에 어울릴 만한 인재가 될 때까지는 베오날드를 인정해 줘야 하며, 정말 대안이 없을 경우엔 그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아버님은 지금 시대를 너무 우습게 보고 계셔. 현장을 벗어난 지 오래되셔서 국가 정세와 상황을 모르시니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업무실로 돌아온 렌겔 가주 대리는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6개의 나라로 나뉜 전국. 자신이 속한 칼레움 제국은 대륙 서부에 자리 잡은 국가이며, 현재 3개의 다른 국가와 전선을 맞대고 있어 상시 위협을 받고 있었고 전쟁도 잦았다.

그래서 제국의 부름에 이 캘러메인 영지도 꾸준히 군을 파견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혈족인 인재를 버릴 순 없지. 위험하다고 해도 차라리 더 유능하고 강한 자가 가주가 되는 게 난 옳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차피 지금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지.’

과연 저 베오날드라는 아이가 랄트의 어머니인 메이라 부인의 시샘과 질투를 견딜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랄트 이래로 가문 내의 사내아이들을 죽인 유력한 자임에도 부인이자 그녀의 본가도 나름 힘을 쓰는 귀족이었기에 손을 댈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는데, 비록 위험을 미리 알렸다곤 하지만 그녀의 술수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베오날드의 일상은 그 뒤로도 큰 변화 없이 흘러갔다.

아침 훈련과 교육, 오후와 저녁엔 자유 시간, 심지어 오전의 교육은 오히려 선생들을 감탄시키는 일이 많아서 수업을 거부하는 이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 베오날드는 사실상 아침 공동 훈련과 식사를 제외하면 저택과 영지를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될 만큼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렇다고 안심해선 안 되었다.

‘이제 곧 성년식이니 본격적인 일은 그때부터지.’

성년.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는 나이가 된다.

물론 바로 무거운 책임과 현실 자각이 필요한 건 아니고, 그 이후 약 20세까지는 ‘준성년’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때부터 자신이 할 일과 직책을 정해야 하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선택이 가장 중요한데 말이지. 왜냐면 이대로 가면 난 분명…….’

이 영지의 군에 속해서 기사로 복무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평시엔 X 빠지게 일해야 하며, 전쟁터에 나가서 공훈을 세운다고 한들 결국 백작가에서 줄 수 있는 보상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라 단물만 쪼옥 빨릴 가능성이 컸다.

또한 너무 큰 공을 세우면 역으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자리였다.

‘게다가 여길 지켜본 결과 여기 후계자 자리를 차지해도 좋을 일은 없는 것 같아.’

혈족이긴 해도 절반이 용병의 혈통인 만큼 여기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해도 하위 귀족들이 이탈을 하거나 아니면 랄트를 명분으로 내전이 일어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후계자 자리를 빼앗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독이 든 성배지.’

하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여기를 떠나기엔 다른 대책이나 정보가 없기에 베오날드는 이곳에서 계속해서 무예 단련과 필요한 물건들을 제작하며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라면 여기서 평온히 있는 것도 나름 힘든 일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노려보는 시선이 많이 느껴지는군. 메이라 부인이 본격적으로 날 노리려 하는 건가?’

메이드와 집사들, 그리고 주변에서 일하는 자들 사이사이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이 진하게 느껴졌다.

딱 봐도 랄트의 모친인 메이라 부인의 사주일 것이다.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 되더라도 똑같은 짓을 했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일을 방해하면 가만둘 생각은 없는 베오날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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