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같은 시각, 캘러메인 백작가의 서재.
“이게… 무슨……!”
베오날드는 아주 실망하고 있었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이자 저장 수단. 그렇기에 그 어떤 것보다 귀족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확보해야 하고 보관을 철저히 해야 하는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사람인 이상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으며 지식을 전수하는 데 있어 구전으로는 정보가 조금씩 손실되거나 수정되기도 하기 때문에 ‘책’의 가치는 더할 나위 없이 높게 여겨졌다.
‘고작 이것밖에 없다고오오? 백작가인데?’
하나 베오날드는 서재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베오날드의 키보다 살짝 큰 책장이 고작 5개. 한 책장당 앞뒤 다 포함해서 약 2~300권 사이의 책이 있는 것 같으니 최대로 많이 쳐줘도 1,500권. 하지만 책장에 가득 꽂혀 있지 않았으니 그보다 더 적을 것이다.
‘아니, 대체 왜 이 꼴이지?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어머나~ 소문으로 듣던 뉴페이스 도련님이 이 서재엔 어쩐 일이신가요?”
“어… 음, 그러니까 책을 보러 왔죠? 그보다 당신은?”
“마탑에서 이 백작가에 파견된 4급 마법사 셀리나라고 합니다. 지금은 여기 서재를 관리하면서 개인 연구 중이지요!”
자신을 소개하는 셀리나. 마법사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로브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키가 175센티미터가 넘는 게 특징인 여성이었다.
미모 또한 나쁘지 않아서 충분히 베오날드의 미인 컷에 들어갈 정도였지만, ‘마법사’라는 카테고리에서 그는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 마탑 새끼들, 입만 열면 돈 이야기만 꺼낸단 말이야. 진리니 근원이니 찾는다면서 맨날 후원금, 연구 자금……! 그러면서 마법사들을 독과점으로 운영하는 양아치 새끼들!’
대귀족이자 통일 제국을 지배한 베오날드도 도저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자들로 전략, 전술, 지혜적 가치를 비롯해서 고대부터 내려오던 ‘마탑’의 독점 구도 때문에 어떻게 해 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만 했고, 결국 거액의 후원금과 ‘연금술사’ 자격으로 자신도 마탑에 소속되는 걸로 그들의 압력을 간신히 제어할 수 있었다.
‘그거 되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젠장! 마스터를 따는 것도 힘들었지.’
마탑의 계급 체계는 최하위인 1급에서 9급, 그 위로 마스터로 베오날드는 정치적, 권력의 힘이 있었음에도 마스터를 딴 것이었다.
이렇듯 마탑에 관해선 좋은 인연이 없었기에 베오날드는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어머나~ 마법사를 혹시 처음 보는 건가요? 괜찮아요. 잡아먹지 않는답니다, 도련님.”
“그, 그런가요? 역시 그렇겠죠? 하하하. 아무튼 일단 구경이나 좀 해 볼게요. 그럼~”
다행히 셀리나가 시골 출신인 자신이 생전 처음 마법사라는 존재를 보고 놀란 것으로 오해한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둘러댈 수 있었다.
베오날드는 어울리기 싫어서 슬쩍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그녀는 관심이 있는 건지 베오날드의 뒤를 종종 따라왔다.
“…….”
“…….”
“저기, 무슨 용무라도?”
“그리폰을 길들이셨다면서요?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멀리서 봤는데 상당히 크던데! 언제부터 길들이셨죠? 그리고 먹이 공급은 어떻게 하시나요? 배변 처리는? 서열 정리는? 날개 한쪽이 안 보이는 이유는?”
속사포처럼 재잘거리면서 베오날드를 압박하는 셀리나. 베오날드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그녀의 말에 간단히 대답했다.
“지금은 제 방에 있습니다. 밖에 마음대로 풀어 둘 수 없어서 거기에 놔두었지요. 길들인 건 새끼 때고, 한 반년 다 되어 갑니다. 날개가 없는 건 아마 기형으로 태어나서일 겁니다. 그리고 먹이 공급은 밖에서 사냥으로 하고, 배변 처리도 마찬가지죠. 이 정도면 되었나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피라든가 깃털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시약 소재라든가 매개물 같은 걸 만들고 싶어서! 아! 물론 공짜는 아니구요. 또 기왕이면 데려와 주셔서 얼굴도 좀 보고 싶네요. 그리폰!”
“피는 무리지만, 깃털 정도라면 모아 놓은 게 있으니 그걸 드리죠.”
“정말요? 그럼 언제 찾아가면 될까요?”
“아뇨. 내일 다시 여기로 올 테니 그때 가져다 드리죠. 아무튼 전 독서나…….”
베오날드는 그렇게 셀리나를 멀리하고 책장으로 시선을 옮겨 하나씩 책을 뽑아 훑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여기에 고서(古書) 같은 것이 있어서 자신의 영지 베노피스에 대한 단서라든가, 아니면 그 즈음의 다른 정보 같은 것이 있을지 몰라서 계속해서 뒤져 보았다.
‘…영 영양가 있는 내용이 없군. 근데… 음? 설마?’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베오날드. 그는 책을 넘기지도 않고 갑자기 책 중간에 문장들이 나오는 부분만 보고는 홱 하고 넘겼다.
뒤에서 셀리나가 따라오는 것도 무시한 채 그렇게 빠른 속도로 책들을 넘겨 보던 베오날드는 책장의 절반 정도를 다 훑어보자 이 책들에 있는 내용이 전부 ‘필사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필사본밖에 없는 거야? 인쇄본은 없는 거냐고!’
“왜 그러시는지요? 마음에 드는 책이 없으신 겁니까? 도련님? 관심 가는 분야가 있으면 저에게 알려 주시면 제가 찾아 드릴 수도 있는데 말이죠~”
‘대체 50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이게 말이 되나?’
500년 전 베오날드가 있던 시대엔 엄연히 ‘활자 인쇄술’이 존재했다.
글자별로 파츠를 만들어서 문장을 조합한 다음 책을 비롯한 글로 담긴 ‘지식’을 찍어내어 대량 생산하는 기술. 그래서 평민들도 나름 책을 보유할 수 있었고, 베오날드 같은 대귀족의 경우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는 게 가능했었다.
“음? 도련님?”
“저기, 그… 활자로 인쇄된 책은 없나요? 도시라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활자… 요?”
‘마탑은 분명 500년 전에도 존재했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어. 그렇다면 필시 이 이유에 대해서 알겠지?’
“음? 그게 뭔가요? 무슨 글씨체 같은 건가요? 글씨체 책 같은 건 여기에 없는데요.”
‘뭐라고?’
‘활자’라는 것을 모른다는 대답에 베오날드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대체 500년간 무슨 일이 있던 것인가? 통일 제국이 분열한 것이야 뭐 그냥 역사적 흐름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멀쩡히 올려놓은 문명의 발달이 이렇게 후퇴한 것은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기 위해서 베오날드는 조심스럽게 슬쩍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마탑에서 오셨다면 엄청 멀리서 오셨겠네요. 마탑… 딱 산맥 속에 고고히 서 있는 거대한 탑이라는 이미지인데… 저도 산 쪽으로 사냥을 다녀 봐서 아는데, 그럼 꽤 위험하지 않나요?”
“아~ 한 500년 전쯤엔 그런 곳에서 지냈다고 하던데… 지금 거기는 파괴되었어요. 그래서 이름은 ‘마탑’이지만 그냥 제국 수도에 있는 ‘마법 대학교’ 같은 곳이 되었어요. 물론 상징성을 생각해서 ‘마탑’이라는 이름은 그대로이지만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후우~ ‘베노피스의 유산’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지식의 성소이자 본토였던 마탑은 무너지고, 대륙 전체에다가 엄청난 짓거리를…….”
‘설마 또… 난가?’
이게 말이 되냐면서 경악하고 싶었지만 베오날드는 일단 꾹 참았다.
대체 500년 전에 자신의 유산을 두고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리 탐욕에 미쳤어도 그렇지, 대체 어떻게 해야 인쇄술까지 까먹을 정도로 문명이 퇴화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면 여기에 암흑신의 음모가 끼어 있는 건가? 아니지, 내가 살던 시절에도 인쇄술은 결국 우리 같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지배를 위한 기술로만 사용하려고 외부 유출을 극히 꺼리고 통제했어.’
평민들도 책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귀족들에게 필요 없는 장서를 판 것일 뿐, 인쇄술은 아주 중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관련자를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소수만이 독점하고 있던 게 갑자기 공격을 받거나 해서 사라지면 아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 라기엔 너무 무리수가 많군.’
“아무튼 이제 ‘탑’ 형태의 마탑은 없으니까요. 또 다른 질문은 없으세요?”
“아, 일단은 없습니다. 그럼 얌전히 독서나 하겠습니다.”
베오날드는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참으며 이 500년 뒤의 세상은 같아 보이면서도 자신의 생각보다 엄청 변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깨달았다.
그는 장서들을 보면서 베노피스에 대한 단서라든가 역사에 대한 기록 같은 것을 열심히 탐구했지만 역시 제대로 활자로 생산된 책이 아니라 사람이 옮겨 적거나 직접 쓴 사본들이라서 내용도 중구난방이거나 갑자기 뜬금없는 문장이 들어가는 등등 정보 오염이 심각했다.
“도련님, 슬슬 저녁 시간입니다.”
“어, 알았어, 세인. 갈게.”
정신없이 책들을 훑어보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베오날드는 결국 도서관에서 아무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나와야만 했다.
여전히 의문인 지난 500년의 일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캘러메인 백작 일가와의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베오날드는 알테리오와 함께 나가서 사냥과 훈련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첫날이라 하루가 아주 길군. 후우~ 낯선 곳이라 그런가?’
삐이이잇!
“알테리오. 손~ 옳지~”
똑똑.
준비하면서 세인과 알테리오가 노는 것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베오날드가 들어오라고 하자, 문이 열리고 낯선 사내가 들어와 베오날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베오날드 도련님! 전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자 ‘제럴드 경’의 종자로 일하고 있던 에라솔 말데로브라고 합니다. 부친이자 이 영지의 사령관인 말데로브 경의 명을 받고 이 시간부로 도련님의 호위와 수련의 시중을 맡게 되었습니다.”
“흐음…….”
자신을 소개하며 들어온 에라솔이라는 남자는 밝은 금발에 깔끔하게 태운 갈색 피부를 가진 훤칠한 청년이었다.
기사를 모시는 종자이긴 하지만 역시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갑옷과 무장을 탄탄하게 갖춘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종자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원시원한 미소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쾌남의 모습. 누구라도 호감이 갈 만한 인상이었지만 왠지 성실할 것 같지는 않은, 뭔가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뭐, 인상만으로 모든 걸 결정할 순 없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그래, 잘 부탁하지. 근데 오늘 나는 이 녀석 밥 먹이러 사냥을 갈 거라 저녁엔 수련실을 쓰지 않을 거네. 그러니 내일부터 부탁하지.”
“아! 그럼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도련님은 아직 오신 지 얼마 안 된 만큼 영지를 다니시다가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당당히 말하는 에라솔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베오날드는 곤혹스러워했다.
아무리 말데로브 경의 아들이라곤 하나 아직 그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하는 게 아니며 자신이 ‘기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같이 가도록 하지.”
“예! 그럼 곧장 말을 데려와서 대기시키겠습니다.”
“그, 그래. 아, 맞다. 세인은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상냥하게 깨우러 와 줘.”
베오날드는 그렇게 세인을 돌려보낸 뒤 에라솔이라는 청년과 알테리오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홀로 남은 세인은 베오날드의 지시에 따라 그의 방의 문단속을 한 다음 저택 복도를 지나서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바로 랄트의 어머니인 메이라 부인의 방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세인. 그래, 그 망할 베오날드라는 놈에 대해서 어서 이야기해 주렴.”
“예, 마님.”